문보영 「남는 부분」, 『책기둥』 (민음사, 2017)
「남는 부분」에는 그것을 쓴 시인과 구분되는 인물들이등장한다. 인물의 행동은 시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시에서 어떠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은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물은 시에서 발화하는 ‘나’이면서, 시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남는 부분」은 “방울토마토를 한 개씩 잡아먹는 작가”가 “땔감을 구하러 숲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인과 시 안에 ‘작가’는 다르다. 시인은 시 안에 ‘작가’를 등장시키고, 행동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가 “책 속의 남자에게 줄 먹이”를 구하러 가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책’을 쓴 ‘작가’이면서,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 안에서 “책 속”은 ‘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세계로 보인다. 그곳은 나무로 된 가구가 가득한 곳이다. ‘나그네’는 “나무틀의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첫 번째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시에 등장하는 ‘나무틀의 창문’은 ‘열리지 않을 거라’고 인지하게 된다. ‘책 속의 남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다. 각주에 의하면,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에 맞지 않는 사람의 팔다리를 늘려 죽이거나 잘라 죽이는 인물이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잘려 나간 팔다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흘러 다니는 피”는 이미 누군가의 팔다리가 책 속의 남자에 의해 ‘잘려 나간’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한, 우리가 ‘책 속’에 있는 ‘책 속의 남자’에 대해 알아버린 이상, ‘작가’에 의해 책 속으로 던져진 ‘나그네’는 팔다리가 늘려 죽거나 잘려 죽을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작가’는 “팔다리가 긴 나그네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어딘가 넘치거나 어딘가 모자란 나그네들만이 쓸모 있다”며, “팔다리가 쓸데없이 긴 나그네”를 “책 속으로 던져 버린다”. 여기서 ‘작가’가 ‘나그네’를 대하는 태도는 폭력적으로 보인다. 팔다리를 늘려 죽이거나 잘라 죽이는 ‘책 속의 남자’의 행위를 유지하기 위해, ‘작가’는 나그네를 잡아다 희생시킨다. 죽기 직전에 ‘나그네’는 이미 작가가 글에 써먹은 인상, 표현을 피해 또 다른 측면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냉소적이다.
작가는 인물의 행동을 제한하는 자다. 그렇다면, 인물은 작가의 의도대로만 움직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건 그렇다고 믿고 있는 “어설픈 작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시 안에서 인물들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움직인다. 작가가 설정한 “작품 속에는 비가 내릴 수 없는데”, “작품 속 남자”는 “축축한 마룻바닥 위에 서 있”다. ‘작품 속 남자’는 ‘작가’가 정한 작품 속 서술과 설정에 어긋나있다. 마지막에 ‘작품 속 남자’는 우리가 ‘열리지 않을 거라고’ 인지하고 있던 ‘나무틀의 창문’을 연다. ‘나그네’보다도 ‘책’에서 중요해 보이는 ‘작품 속 남자’가 ‘작가’의 설정을 파기한다는 점에서 인물이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에 방증이 된다.
인물은 언제나 작가의 예상을 벗어난다. 여기에 보태어, 독자는 작가가 서술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분석하지 않는다. 글을 읽고, 글에서 벗어난 영역의 감정을 느끼며, 글에 설명되지 않은 의미 층위를 찾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장과 문장이 구조를 이루는 형식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유추한다. 시에서 ‘작가’는 “독자들은 잘려나간 팔다리들에 관한 깊은 지식을 얻는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자는 그걸 ‘안일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독자가 작가의 글을 어떻게 읽고, 느끼고, 분석하는가에 관해서는 작가의 예상을 벗어나있다.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인물의 모습은 허구라기보다 마치 살아있는 ‘현실’처럼 보인다. 시가 이루는 허구의 세계는 더 이상 허구로만 남아있지 않다. 「남는 부분」 안에 등장한 “책 속” 이야기는 다시 「남는 부분」 시를 이룬다. “책 속” 이야기와 시는 떨어질 수 없게 되며, ‘새어나간 빛’을 통해 책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닿고 있다. 허구와 현실의 세계가 모호한 경계에서 시는 허구를 뚫고 나와 현실을 드러낸다. 문보영 시인에게 ‘이야기’란, 책을 펼쳤을 때 살고 덮었을 때 죽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틈으로 빠져나온 ‘빛’은 곧, ‘현실’이다. 문보영 시인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책 바깥으로, 현실로 끝없이 번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