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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Jun 23. 2024

어디에 있었니, 지금은 어디로 간거니

책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 리뷰

방송인 홍진경이 친구 정신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홉살에도 열네살에도 스물셋에도 내가 찾던 사람. (중략) 정신의 이야기들은 뒤틀어져 엉거주춤 힘겨운 숨을 내쉬던 나를 촉촉히 펴주었다. (중략) 이제 나는 정말 더 찾지 않는다.' 이 편지를 읽으며 나도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홍진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일찍이 17살에 그 친구를 찾았다는 점이고, 같은 점이 있다면 나 역시 그 이후로는 누구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찾은 이후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찾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정확히는 '찾아야 한다'는 감각 자체를 잊었다. 그런데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을 읽고 있자니 왠지 내가 작가같은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찾아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어야 한다고 착각했을까? 당연한 듯 차도하 작가는 '내가 찾던 그 사람'의 자리를 넓히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을 자의식 과잉이라고 소개하고, 책을 읽는 당신 역시 그렇다고 말하는 책 첫 장에서 마음이 꿈틀했다. '댁이랑 나랑 얼마나 같겠어?'라고 냉소하며 책장을 넘겼다. 냉소는 시원하게 깨졌다. 작가가 나와 너무 비슷한 사람이라 멈추지도 못하고 책을 끝까지 읽었다. 종국에는 '나 자의식과잉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의식과잉'을 검색창에 쳐넣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작가는 한 끗 차이로 나와 달랐다. 달리 말하면 그 한 끗만 아니면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책에 쓰인 문장을 보고 있다니 이 작가가 글을 쓰는 한 나는 영원히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나의 생각, 나의 불만, 나의 감정을 이 작가가 모두 세상에 말해 줄 거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남이 쓰는 말이 이토록 내 맘 같을 수도 있나?


아닌게 아니라 작가가 나와 공유하는 정체성과 공간이 너무 많았다. 작가 차도하는 99년생이다. 나와 동년배다. 그의 고향은 경북이고, 나 역시 그 인근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한국예술종합대학을 다녔고, 거긴 내가 나온 대학의 이웃대학 중 하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OASIS의 곡은 Wonderwall이고, 그건 내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OASIS곡이다. 그는 졸업 직친구들과 바다에 갔고, 역시 그랬다. 그는 SNS를 즐겼고, 나 역시 그곳에서 서식한다. 비슷한 곳에서 나고 자라, 비슷한 곳에서 서울살이를 했고, 비슷한 걸 즐겼다. 그의 말이 나의 것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의 생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였을 거다.


덕분에 나는 번도 각주를 읽지 않았다. '헤녀우정' 따위의 단어에 달린 각주는 굳이 읽지 않아도 이미 뜻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서울살이의 고통과 20살 초반에 겪은 불면증에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작가가 나와 비슷한 공유했다는 점은 이래서 좋았다. 그의 언어와 감정을 읽어내는 데 있어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나 자신이기만 하면 그를 알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서 어떤 특별함을 느낀 건 아니다. 그가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나는 하지 못했지만 나도 분명히 느꼈을 그 감정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흉내내지 못할 감성을 가진 작가라고 들었는데 그의 개성은 화려한 문체라기 보다는 분명한 언어에서 나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저 스쳐지나갔을 순간들을 그는 언어로써 세상에 끄집어냈다. 재밌는 건 그건 어떤 명명이나 호명이라기 보다는 순간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일례로 책에서 작가는 글쓰기에 관해 이렇게 썼다.

내가 알게 된 건, 내가 운동같은 글을 좋아한다는 것. 다이어트 목적 말고 그냥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걷는다는거나 기뻐서 혹은 괴로워서 달린다거나. 헤엄치기 수축하기 팽창하기 등등. 그러니까 말 그대로 운동. _21p

이 순간, 나는 내가 글을 좋아하는 이유를 처음 느꼈다. 글쓰기가 자기표현이라는 말에 왜 그렇게 거부감이 들었는지, 글을 지적 받아도 나는 왜 그렇게 슬프지 않았던 건지, 누구도 읽지 않을 글을 왜 굳이 썼는지...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욕심내야 하는 것들을 욕심내지 않았고, 내 글이 별 거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 들였던 이유를 여기서 알게 됐다. 나 역시 운동같은 글이 좋았던 거다. 지금 이 순간, 차도하라는 사람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이 글을 쓰는 거 처럼. 그는 꼬여 있는 감정과 순간들을 풀어내 다시 자신의 표현으로 엮어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에세이를 읽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그의 표현에 꿈틀한 게 민망해질 정도로 그렇다. 내 삶에 비견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이 책의 좋은 점을 말할 수 있겠지만, 내 삶에 비견했을 때 더 재밌게 읽힌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가 맞다. 누군가의 삶을 읽고 싶어하는 욕망은, 읽히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이 책을 읽고 찾아 본, 작가가 너무 장해서 눈물이 났다거나 작가가 너무 솔직해서 불편했다는 평가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런 리뷰가 잘못돼서가 아니다. 그 모든 평가들을 읽고 있자니 그들의 삶이 보였다. 작가와 비슷한 삶을 산 나뿐만 아니라 작가와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들 역시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이 책을 읽었다는 방증이다. 에세이를 읽는 모두는, 역시 자의식과잉이다.


홍진경은 친구 정신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때까지 어디에서 살았냐는 질문을 막 해댔다고 한다. 찾아 헤매던 이가 눈 앞에 있는데 누가 그런 질문을 안할까? 나도 차도하 작가가 눈앞에 있었다면 그렇게 물었을 거 같다. 대체 어디있었냐고. 우리는 10대에도, 20대에도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그런데 다른 질문을 해야 할 거 같다.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야 할 거 같다. 분명 잘 살아 보고 싶다고 말해놓고 가버렸다.


죽은 사람의 글은 더 꼼꼼하게 읽힌다. 특히 그의 일생과 관련하여.
내가 죽어도,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내 글을 대충 읽어주면 좋겠다. 다음 작업을 기대해주면 좋겠다.
반대로 내가 살아 있을 땐, 죽은 사람처럼 나를 꼼꼼히 읽어주면 좋겠다. 이 사람이 어째서 죽게 되었는지, 이 사람이 죽기 전에 무엇을 썼는지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_17p

죽은 사람 글이라서 꼼꼼하게 읽은 건 아니었노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살아 있었다면 이 사람이 어째서 죽게 될지 상상하지도 않았을 거다. 평생 잘 먹고 잘 살며 다음 작품이나 빨리 내주길 바랐을 거다. 그리고 이 마음은 지금도 같다. 이 작가의 글이 더 보고 싶다. 침착하게 사랑하는 초능력을 얻고 싶었다는 이를 어디서 또 찾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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