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회사에서 햇수로 8년째 직장생활 중이다. 중고등학생 시절보다도 길고, 군대를 합친 대학 시절보다도 길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다. 굳이 새해가 아니더라도, 일련의 소회가 없을 수 없는 세월이다.
나는 업무 외의 모든 시간 속에서, 직업을 나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거나 지워버리려고 노력한다. 직업은 직업일 뿐이다라고 의식적으로 계속 되뇌인다. 직업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고 대표할 수 있도록 방치하지 않고, 직업 활동에 내 정신적 삶이 침식당하지 않도록 애쓴다. 내가 주말이나 퇴근 후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나, 자신의 도구적 가치나 수동적 역량의 증진이 아닌, 진리 탐구와 관련된 적극적인 학습과 내면화 활동(푸코는 이것을 ‘자기 배려’라 하였다)에 몰두하는 것은 말하자면 직업의 호명-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부르심‘에 저항하는 일종의 내적 투쟁이다. 서동진의 표현처럼 ‘자기계발하는 주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하여, 남들이 자격증을 따거나 인맥쌓기에 몰두할 때 나는 차라리 파스타를 만들거나 업무와 전혀 무관한 이론서를 공들여 읽는다. 호명에 거역한다는 죄의식이나, 혹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따위를 애써 떨쳐낸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사실 그리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는 번듯한 직업을 일부러 싫어하고 떨쳐내는 것일까? 왜 과장된 위악을 가장해 직업에의 몰입을 맹렬히 거부하며 스스로 피곤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페미니즘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옳다. 사람마다 좋다고 ‘느끼는’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르고, 이 감각적 총체가 개인적인 미학을 구성하며, 그 미학이 충돌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열함과 구태의연함을 혐오하고, 무신경하고 섬세하지 않은 성정을 싫어한다. 타협하지 않는 숭고한 고집을 좋아하고, 손익 따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것을 사랑한다. 이 심미적 호오가 바로 내 정치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나는 사회생활이라는 구실로 나날이 비열해지고 저열해지는 인간의 습성을 증오한다. 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서슴없이 다른 사람을 수단화하거나, 옳지 않은 말과 행동에 동참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직장 밖에서 직업으로 사람 간의 우열을 재고 아첨할 사람과 무시할 사람을 나누는 것이 역겹다. 이런 삶의 방식은 나의 윤리의식에 반한다.
한편 대부분의 현대인들, 특히 한국인들은 자기 자신을 직업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 존재는 그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보다는, 어느 대학을 나와 무슨 일을 하며 얼마만큼의 소득과 자산을 가졌는지로 거의 완전히 기술될 수 있는데, 그 중심에 결국 직업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윤리와 정치의 미학적 모태, 판단의 기준이다. 그래서 직업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주체 형성의 틀이며, 권력과 예속화의 무한 동력 장치다. 선망되는 직업과 기피되는 직업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배달노동자나 청소노동자, 식당 종업원을 멸칭으로 부르고 무시할 수 있는 건 단순히 능력주의나 배금주의, 중산층 특유의 경제주의적 추격의식 따위가 아니라, 내 직업이 그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미학적)자기인식 때문이다.
이 자기인식이란 결국 번듯한 사무실에 앉아 깔끔한 옷을 입고 전문적인 일을 한다는 것, 사람들이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것, 비교적 풍족한 급여와 용이한 은행 융자, 대략 이러한 신체적 감각의 종합이다. 어깨를 펴고 당당한 표정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건 몸의 기억 덕분이다. 반면 대체로 위축되어 있고, 종종걸음을 걷거나 무기력해 보이는 저임금 노동자의 모습 역시 반대되는 감각 경험의 누적에 의한 학습 효과다.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고 성공하는 데에만 골몰한 엘리트는 자기가 타고난 특권이나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며, 반대로 시시각각의 생계와 생활의 곤란에 내몰린 사람의 빈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의 구조적 불합리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 전자는 더 올라가기 위해, 후자는 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열해지고 악독해진다. 나는 이런 성공과 실패의 이항대립, 악덕만을 낳는 재생산의 굴레가 지겹다. 다들 학교에서 ”모든 직업은 기능적으로 필요하고 그래서 동등하다. 직업의 사람의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예속화란 주체를 호명하는 권력에 종속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런데 그 호명으로 인해 만들어진 주체도 권력을 갖는다. 이러한 양가성은 그 권력의 행사를 통해 같은 주체를 계속 생산하는 효과를 낳는다. 예컨대 우리는 부장이나 임원이 되어 휘두르기 위해 그들에게 복종한다. 복종이란 나보다 그의 미학과 정치를 우선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정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어느새 없어져 버린다. 남는 것은 남루한 주체뿐이다. 판사, 의사, 고위직 임원의 주체와 행위성이라고 해서 남보다 더 의미 있거나 아름다운가? 타인의 고통을 제물삼아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사는 일은 과연 가치있는가?
예전에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을 기독교적인 'calling'으로 오독하여, 결국 신앙적 주체 형성과 소명의식 고양으로 귀결되는 기묘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좀 우스웠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이고 열광적으로 권력에 예속되고자 한다. 이러한 정념적 애착은 당연히 그들이 나쁘거나 멍청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 지배구조가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장치와 부속품들이 한 목소리로 각 자리에 알맞은 주체를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체는 하나의 자리잡음,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권력적으로 분배된 감성, 들뢰즈식으로는 배치의 산물이다. 이것은 전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자리이고 위치이고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열망도 비전도 없는 무기질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미학적 호오에 충실하려 하고, 진리와 사랑과 예술과 해방을 믿으며,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이 모든 것을 위해 나 자신과 삶을 적극적으로 변형하고 나날이 수정하며 살아가려 한다. 윤리와 정치는 그 행위적 부산물일 뿐인데, 그게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극을 희망으로 해석한다. 나는 역겹고 추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뭐가 역겹고 추한 것인지도 분간 못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산다. 그러니 한낱 자리, 역할, 배치쯤은 내겐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며, 결코 그것이 나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불편이라봐야 사소한 것이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기, 이것이 나의 유일한 새해 다짐이라면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