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뷰 MoBeau Dec 07. 2022

읽기에 대한 짧은 소회

리뷰를 100개 하고 나서 뿌듯해진 한 독자의 무의식적 헛소리

  이 글을 쓰게 된 건 딱히 어마어마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블로그에 꾸준히 업로드 중인 100번째 책 리뷰를 마쳐서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걸 좋아한다. 보는 것보다 읽는 게 좋다.


  이유는 딱 하나다. 영상이나 사진보다 텍스트가 나에게 있어서 상상할 여지를 더 많이 제공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영상을 제작하여 재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반론이 있을 경우 당신 말이 맞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거다.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왜 텍스트를 읽는 것이 영상을 보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작업이라 말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다. 


  내가 읽은 100개의 작품의 면면을 보면 멋지고 수려해보이는 케이스는 거의 없고 대부분 킬링타임용이다. 심지어 각 작품마다 총 분량이 10권을 넘나드는 판타지 소설 / 웹소설 위주다. 그렇게 거진 단행본 1000권 분량의 텍스트를 별생각 없이 어마어마한 시간을 투자하며 읽어제낀 것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 시간에 개발 공부를 했으면 아마 훨씬 훌륭한 개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좌우간 나만의 독서론을 한 번 설파해보도록 하겠다. 



  

  어차피 영상을 보나 텍스트를 읽나 이를 이해하고 저장하는 역할은 변함없이 뇌가 담당한다. 다만 그 세부적인 기작이 조금 다르다는 의견이다. 영상의 경우 시각적으로 노출된 이미지 자체가 그대로 뇌를 관통하여 인식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반면, 텍스트는 나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쓰인 다른 방식의 언어를 나의 방식으로 재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텍스트를 인식하는 데 있어 그 과정은 텍스트의 이미지화로 갈음된다.




  나는 어렸을 적엔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항상 도서관에 앉아서 삼국지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 한국사 만화를 읽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나에게 텍스트는 직접적 이해가 불가능한 어려운 무언가였고, 어쩔 수 없이 직관적인 이미지로 시선을 돌렸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텍스트를 어려워했던 시절, 아버지 책장에 꽂혀있던 "치우천왕기"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뽕 + 환빠 기질이 넘실대던 그때의 나는 아버지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그 책이 너무나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읽으려고 시도해도 어휘나 문장이 너무 어려운지라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페이지를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하지만 언제였더라...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책상에 꽂혀 낡아가는 책이 눈에 밟혀 다시 한 번 펼쳐보았다. 20세기 말 한국 판타지 소설 특유의 장황하고 방대한 세계관 설명으로 1권이 가득 차 있었다. 이해도 못하고 한껏 지루해하는 내 뇌를 열심히 다독여가며 계속해서 한 자 한 자 읽어나갔다. 


  그 인고의 시간을 지나, 어느샌가 치우천이 주신의 깃발을 들고 대륙을 내달리는 영상이 내 머리 한편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처음 있었던 그 신비한 경험을 한 그날, 나는 학교 + 학원의 환장의 콜라보가 만들어 낸 피로를 이겨내고 밤을 꼴딱 새워 전권을 끝까지 완독 했다.




  그 이후로 만화보다는 텍스트를 읽게 되었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를 봐도 원작 소설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잘 만들어졌다고 일컬어지는, 나는 잘 모르는 그 미장센이라는 것이 가득한 영화를 봐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나만의 영상을 재생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흥미로운 경험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바로 판타지라는 걸 여러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다른 종류는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 그렇게 해리포터, 룬의 아이들, 드래곤 라자에 완전히 매료된 10대 한상현은 판타지를 신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나이를 먹고 대학생이 되어 소일거리로 그 감상을 내 온라인 일기장에 남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름 열과 성을 다해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기를 1년 반이 지나 마침내! 100개의 작품을 나만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뭐라도 써 내려가 본 경험을 갖게 되었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이해한 결과물을 다시 텍스트로 변환하는 작업은 내가 지금까지 행해 온 여러가지 지적 작업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직후, 이 쓰잘데기 없이 긴 글을 써보았다. 이렇게까지 길고 내용 없는 글을 왜 썼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뿌듯해서 썼다. 별 이유는 없다.


  요즘은 리뷰를 쓰다 보니 내가 그냥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몇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써도 이것보다 잘 쓰겠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나는 누군가의 창작물을 이해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까지는 하겠는데 아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작업은 못하겠더라. 재능이 없는 걸수도? 아니면 그저 읽는 게 좋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게 좋진 않았을지도.




  이렇게 끝내면 아쉬우니까 굳이 이 글에 조금 더 사견을 담는다면, 나는 모든 사람이 꼭 깊은 인사이트가 담긴 교양서나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판타지 소설에도 충분히 곱씹을만한 인문학적 모먼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뇌 내에서 재생산하는 과정 자체가 꽤나 흥미로운 인간만의 유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 판타지 1000권 읽은 나, 결코 헛된 시간을 보낸 건 아니라는 정신승리다. 내일은 꼭 개발 서적을 읽도록 노력해야겠다... 하지만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던 와중에 갑자기 생각나서 밀리의 서재를 켜고 치우천왕기를 다시 읽고 있는 건 비밀이다.

작가의 이전글 T의 일기장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