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조영남 <모란 동백>
동서고금에 걸쳐 노래 가사에는 이 문장이 참 많이 나온다.
나를 잊지 말아요.
Forget me not.
Never forget me.
나는 굳이 누군가에게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 따라, 끝없이 지나가는 세월의 물결 따라 누군가는 새로이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빈 의자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다.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이 땅 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함께해서 고마웠고 함께해서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감은 눈 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어머니, 아이들, 언니, 친구들, 이웃들ᆢ.
그 모든 얼굴들 위, 가장 높은 곳에 가장 우뚝 서 있는 이가 있다. 남편이다. 남편은 이 말을 참 좋아할 것 같다.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예전에는 무심히 보았던 나비들이 수시로 눈길을 끈다. 뚜렷한 존재감으로 내 의식에 와닿는다. 숲 속에서, 공원에서, 아파트 정원에서.
육체의 종말, 영혼의 해방, 변화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이미지를 가진 존재, 죽음 이후의 세계와 이승을 연결하는 존재, 평안히 잘 있다는 사후통신 매체, 나비.
새벽 시간, 도시 한복판 옥상 텃밭에도 나비들이 날아온다.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팔랑팔랑 나풀거리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또 금세 날아가 버리곤 한다. 오늘은 내가 머무는 내내 텃밭을 떠나지 않는다. 계속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화려한 무늬의 독특한 나비 한 마리. 가지 끝마다 보라색 꽃을 가득 매단 방아의 은은한 허브향이 매혹적이었을까? 소담스런 꽃잎 아래 달콤한 꿀이 감미로웠을까? 핸드폰을 갖다 대고 사진을 찍는데도 꿈쩍하지 않는다. 장난스레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넸다.
"사랑해."
거친 접근에 깜짝 놀랐는지 포르르 저만치 날아오르더니 곧 다시 돌아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그맣게 인사말을 했다.
"잊지 않을게요."
옥상문을 닫을 때까지도 나비는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대 그리고 나, 우리는 서로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함께 일구어 온 가정. 서로의 깊은 헌신을 알면서도 다투고 원수가 되었던 시간들. 그러면서 또 어찌 그리 함께한 시간들이 많았는지. 동네 술집 순례, 아침 산책, 주말 산행, 철 따라 휴양림 숙박, 연극 영화 관람, 음악회 전시회 감상, 성당 활동, 국내외 여행, ME 주말피정, 백화점 문화센터 부부 댄스 강습까지.
'같이'라는 말과 '하자'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서슬 퍼렇게 엄포를 놓는 남편과 밀당을 벌여 가며 늘 함께했으니 상처뿐인 영광이 많았다. 희희낙락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으며 웃다가도 새파랗게 삐져서 몇 날 며칠 팽팽하게 전의를 불사르던 시간들. 롤러코스터와도 같이 날 선 감정들.
남편이 떠난 지 2년의 시간이 흐른 요즘, 친구들이 자주 말한다. 많이 건강해졌고 많이 좋아 보인다고. 나도 밝게 받아들인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어. 많이 편해.
예민하고 완벽주의자인 사람, 거기다 본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모범생인 사람은 날카롭고 부정적이기 쉽다. 많은 것이 당신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 거슬림을 쉬이 용납하지 못한다. 특히 가까운 가족에게는.
떠난 사람은 가해자고 남은 사람은 피해자라는 말이 있지만 떠난 사람은 슬펐고 남은 사람은 미안하고 그립다. 서로의 미숙한 결핍을 품어 안을 성찰과 여유의 시간을 생전에 갖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죽음 앞에서 잠깐씩 혼미해지기도 했던 시간, 남편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너무 뭘 몰랐어."
"당신 덕분에 많이 누렸어."
똑같은 처지에서 미처 그 고백을 하지 못한 나는 이 한마디로 때늦은 사죄와 감사를 전한다.
"잊지 않을게요."
내 옆을 떠나지 않는 나비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고마워, 미안해,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