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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27. 2021

당신을 위하여

치열했던 그 시절의  나를 위하여


  날씨가 이제 막 쌀쌀해지기 시작한 초겨울이었던 것 같다. 회사로 가는 차 안, 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멍하니 신호등만 노려보고 있는데, 늘 그랬듯 그날도 밝고 명랑한 이숙영 님이 역시나 통통 튀는 목소리로 다음에 내보낼 곡을 소개한다.
 
“더 크로스의 ‘당신을 위하여’ 들려드릴게요.”



  비장한 멜로디의 전주가 흐르고, 그보다 더 비장한 목소리의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마음을 모아서 당신의 귓가에 다가가 말하고 싶어.

 

  요즘 말로 숨멎이다. 이런 노래가 있었다고?‘떠나가요 떠나지 마요’라는 노래로 더 크로스라는 그룹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 뭐지? 사실 노래가 시작되기 전엔 거의 무념무상의 상태였으므로 제목을 정확히 듣지 못했고, 노래를 다 듣고 난 후엔 제목이 너무나 궁금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검색엔진을 열어 더 크로스를 입력했고, 대충 비슷한 제목의 노래를 죄다 검색해 봤고, 일일이 1분 미리 듣기를 해봤다. (그때만 해도 유튜브에 그렇게나 많은 자료가 있지 않았었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사이트를 이용하거나 불법 다운로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이 역시 라테 이즈 홀스.) 찾았다!
 


  그날은 유난히도 힘든 아침이었다. 요즘 들어 밤낮이 바뀌어버린 울 꼬맹이는 낮 동안에 할머니 댁에서 서너 시간씩 낮잠을 자고, 내가 퇴근 후에 데리러 가면 푹 자고 일어나 기분 좋은 얼굴로 방긋 웃는다. 집에 데려가 씻기고 조금 놀아주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아이를 맡기고 나도 씻는다. 그리고 나면 어느새 자야 할 시간. 애석하게도 이 녀석은 전혀 잘 마음이 없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만난 엄마 아빠를 보고 어떻게 잘 수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굉장히 맑은 얼굴로 방긋 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날 또 출근을 해야 하므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잘 생각이 전혀 없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재워놓으면 따박따박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유를 찾는다. 이제 무려 돌쟁이인데!! 아직도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유를 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언제까지 신생아 코스프레를 할 것이냐, 나의 딸아. 흑.
 


  아이를 낳은 후 산후조리는 친정에 가서 했다. 아픈 아빠를 돌보느라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이 힘든 엄마에게 가서 산후조리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그래도 엄마한테 가고 싶었다. 산후조리원 행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나, 조리원 그 좁은 방 안에서 혼자 벽보고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엄마 옆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막내딸의 이기심이,
내가 있는 동안 한숨 제대로 못 주무실
엄마를 걱정하는 효심을 간단히 이겨버렸다.
나도 태어나서 처음 하는 출산인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릴 때나 커서나, 심지어 딸이 무려 40대가 된 지금이나, 엄마는 나를 애지중지 키우신다. 똘똘하고 독립적인 아이라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살아오던 나는, 불과 몇 년 전에 문득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마마걸인 것 같다. (이건 분명 엄마가 나를 계속 애기처럼 대하시기 때문이다. 결코 내가 덜 자란 것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엄마는 출산 후 친정 행에 흔쾌히 동의해 주셨고, 나와 아기뿐 아니라 사위까지 함께 기거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사실 정확히 해두어야 할 것은 ‘허락’ 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아기는 처음부터 엄마 아빠가 함께 돌보아야 하는 거라며 사위에게 친정에서 출퇴근할 것을 ‘명’ 하신 것이다. 처음엔 ‘남편은 출근하려면 푹 자야 할 텐데 집에서 혼자 편히 지내고 주말에만 들러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나도 생각했었으나, 지나고 보니 엄마의 말씀이 옳았다.



나도 처음, 너도 처음,
우리 모두가 처음인 이 육아라는 일은
서투르게나마 함께 시작하는 것이 옳다.
 


  덕분에 남편은 아이 돌보는 일에 결코 소홀함도 서툼도 없다. 잠을 깊게 자는 편인 나보다 잠귀도 훨씬 밝아 아이가 조금만 소리를 내도 깨서 얼른 우유를 타다 준다. 그럼 안고 있던 내가 먹이고, 때로는 그 반대로 역할을 분담한다. 굉장히 협조적이고 화기애애한 부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하나 있다. 누구 하나 깊이 쭉 잘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출산휴가에 들어가기 직전,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동료가 나에게 슬쩍 조언을 해 주었다. 절대 출근할 남편을 배려해서 방을 따로 쓰지 말라는 거다. 계속 돈 버는 사람과 육아하는 사람을 나눠서 생활할 것이 아니고, 너도 곧 직장에 복귀를 해야 하므로 잠시나마 남편을 배려하는 그런 착한 마음은 먹지 말아라, 그래야 복귀 후에 후회하지 않을 거다, 라는 것이다. 왜 이런 조언을 해 주었냐고? 본인의 아내 분께서 이런 배려를 한 덕에(탓에?) 다시 맞벌이를 시작한 현재도 어쩐지 본인은 육아를 적극적으로 안 하게 된다는 거다. (중요한 조언을 해줬다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내 분께는 몹쓸 남편이구만! 그걸 알면서도 안 하고 있었던 거잖아?)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아침이 되면 둘 다 좀비가 되어 있다. 밤새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어느덧 아침이 되고, 남편은 회사가 멀어 새벽같이 길을 나서느라 고생, 나는 아이까지 챙겨서 시댁에 데려다 놓고 출근하느라 고생.
 




  그날따라 유독 더 잠을 자려 들지 않고, 유독 더 자주 깨던 아이는 마지막 우유를 먹은 후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고, 그때부터 우리의 출근 전쟁은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 옷을 갈아입히고, 따뜻한 담요로 돌돌 싸맨 후 카시트에 태워 시댁으로 출발한다. 엄니께 아이를 인수인계한 후 서둘러 차를 돌려 회사로 향한다. 가끔은 운전을 하다 말고 식겁해서 뒤를 돌아본다. 내가 혹시 정신 줄을 놓고, 아이를 집에 두고 혼자 출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또는, 엄니 댁에 들르지 않고 아이를 태운 채 회사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비어있는 카시트를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기 엄마에서 직장여성으로 서서히 변신한다.
 


  정신없는 아침을 보낸 후 차에서 듣는 짱짱한 이숙영 님의 목소리는 대체로 여전히 멍한 상태인 나를 각성시켜주는데, 그날은 그 활기찬 목소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 그 노래...... 전주가 굉장히도 비장한 그 노래가 순간 나를 각성시킨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그 곡은 내 인생의 최애곡이 되어버렸다.
 


  사실 ‘당신을 위하여’는 지치고 힘든 육아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기엔 너무 섭섭한, 절절한 사랑노래다. 더 크로스 앨범에 담긴 많은 곡들을 작사, 작곡, 편곡까지 한 시하가 가장 애정하는 곡으로 꼽은 노래이기도 하다. 가사가 얼마나 시적인지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동이다. 이제는 이성에 대한 가슴 절절한 사랑을 꿈꿀 수 없는 기혼여성의 처지이지만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두 근반 세 근반. 뭐,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이 어린 나이에 생각쯤은 어떨라고.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간주 부분에 나오는 기타 연주이다. 처음 시작은 피아노와 현악기의 풍성한 소리가 주를 이루다가 간주 부분에 이르면 멋들어진 일렉 기타의 연주가 짠하고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진정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타 잘 치는 성당 오빠였던 남편에게 연습을 종용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노래가 아니라며 들은 척도 안 한다. 이제 결혼한 지 몇 년 되었다고 멋지게 보이기를 포기하는겐가. 흥!
 


  그럼 여기서 잠깐 이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낸 시하에 대해, 그룹 더 크로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처음 ‘Don’t cry 뮤직비디오에서 단발머리의 시하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보고, 난 분명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가 작사, 작곡을 직접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더 크로스의 노래들 중 상당 부분에 피아노와 현악기 연주 소리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시하의 전공은 음악이 아니었다. 건반, 드럼, 베이스, 기타, 바이올린까지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걸로 봐서 자라는 동안 음악 공부를 많이 해온 듯하나, 어찌 되었든 그의 대학 때 전공이 음악이 아닌 것은 나로서는 굉장히 놀라웠다. 그냥 사람이 똑똑한 걸로 해야겠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더 크로스의 대표곡 ‘Don’t cry를 고등학교 때 작사, 작곡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노래방만 가면 Steelheart의 She’s gone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에 버금가는, 한국의 She’s gone을 만들고 싶어서 지은 곡이라는 거다. 그 엄청난 명곡이 무려 고딩이가 만든 곡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고, 또 한 번 시하에게 반해버렸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저 존경스럽고 부럽다. 그리고 정말 사랑스럽다.)
 


  ‘당신을 위하여’는 더 크로스 1집에 실린 곡이었으나 막상 1집에서 더 많이, 어쩌면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널리 알려진 곡은 ‘Don’t cry였다. 우리 세대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 부분을 위해서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부른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Don’t cry의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언제나 영원히’를 부르기 위해 노래의 끝을 본다.

 


  어릴 때 노래방에 가면, 없는 돈에 정해진 시간 동안 많은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에, 노래는 반드시 1절만 불렀다. 간혹 2절까지 부를 욕심으로 마이크를 계속 들고 있는 친구가 있으면 누군가는 가차 없이 정지 버튼을 눌러버린다. 그럼 조용히 물러나 다시 두꺼운 책자를 뒤적이면 된다. 그러한 우리만의 룰 속에서도 예외로 쳐주는 몇 안 되는 곡이 있었으니, 우리 때는 그게 바로 ‘비와 당신의 이야기’였다. 사실 이 노래는 부르기보다는 듣기에 좋은 곡이나, 뒷부분 떼창을 위해 종종 선곡하곤 했었다. ‘Don’t cry’가 우리 다음 세대에게 그런 곡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더불어서 임재범의 ‘고해’처럼 노래 좀 한다는 남자사람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사람에게 어필하기 위해 선곡하는 노래 중에 하나라는 것도.
 


  더 크로스는 사연이 많은 그룹이다. 이시하라는 멤버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메인 보컬이 몇 번 바뀌었다. 1집은 태생이 락커인 김혁건, 2집은 미성의 발라드 보이스를 가진 김경현이 함께 했다. 2집에서는 1집에 담겨 있던 몇몇 곡을 다시 수록하여 그 멋진 명곡들을 두 보컬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호사까지 허락한다. 이후 1대 보컬인 김혁건이 다시 돌아와 현재의 더 크로스로 자리 잡았다. 김혁건은 앨범 녹음을 앞두고 큰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으나,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예전 같은 고음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타고난 매력적인 보이스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종종 각종 매체에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들을 알게 된 것은 사실 나중의 일이고, ‘당신을 위하여’를 알게 되었을 당시 나는 그저 지친 나의 하루에 위안이 되어줄 하나의 도구인 듯, 막연하고 맹목적으로 이 곡을 사랑했다. 운전할 때나, 일할 때나, 집안일할 때나 무/한/반/복.
 


  직딩맘의 생활은 영 녹록지 않았다.


결혼하고 애 낳으면 그만둘 ‘여자’ 애를 왜 뽑았느냐는 타박을 윗선으로부터 들었다면서, 그러한 일들로 인해 그만두지 말고 꼭 오래오래 다녀달라 부탁하신 첫 번째 팀장님과의 의리 때문에, 실은 스스로의 입신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욕심 때문에 나는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회사는 아직은 보수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보다 조금 더 옛날 사람들이 많은 조직이었고, 전공에 부합하는 전문직으로 입사를 한 것과는 상관없이 난 그저 ‘여자’였다. 능력이 부족해 밀리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 수는 없었으므로 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여자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보통의 남자 직원들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일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회사에서는 그런 나를 어느 순간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노력과 정신이 그렇게 무장된다 하여도, 신이 주신 나의 신체는 여전히 ‘여자’ 일 수밖에 없었다.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 있어 한없이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합의하에, 이번엔 내가, 다음엔 네가 출산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참 많이도 했다.


  첫아이의 출산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3개월 휴가에 들어갔는데, 출근 마지막 날, 짧으나 짧지 않은 기간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같은 팀 동료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잠시 커피 한잔하는 시간을 가질 때였다. 나보다 몇 살 위인 미혼의 남자 동료가 묻는다.



  “임신하면 엄청 졸리다 던데 괜찮았어요?”
  “왜 아니겠어요. 죽을 뻔했죠.
도끼눈 뜨고 겨우겨우 참았어요.”
라는 대답에 돌아온, 다 들리는 혼잣말.
  “독한...女...ㄴ”



  농담으로 웃어 넘기기는 했으나 씁쓸했다. 남자들이 어려움을 참아가며 열심히 하면 프로페셔널한 거고, 여자가 그러하면 독한 년이 되는 세상.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다. 참 서러웠다.


  지금은 거의 당연시되는 출산휴가 후의 1년 육아휴직을 그땐 꿈도 못 꿨다. 3개월 출산휴가를 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눈치 보이는 일이었고, 무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출산휴가 3개월을 다 쓰고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이 내가 최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기를 키우는 애 엄마는 아예 없다는 뜻이었고, 회사에 있는 동안 유축을 할 만한 장소도 당연히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사정이 그러하다고 해서, 나 없는 동안 내 일을 나눠가며 처리해야 했을 같은 팀 동료들에게 복귀 후에 까지 배려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임을 알기에, 난 회사 복귀 후 아기 엄마가 아닌 척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회사의 눈치가 보여서 라기보다는,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입사할 때처럼 ‘여자’라는 것이 ‘틀림’ 또는 ‘부족’으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밤새 아기 돌보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실어 나르느라 피곤하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아무렇지 않은 척이 나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 아침 사거리 신호등에서 문득 듣게 된 노래 하나에 크나큰 위로를 받고 감동을 느꼈으니, 몸과 마음이 무척 힘든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결국 난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를 배려해주고 도와주었던 동료들에게도 미안하고, 그토록 치열하게 앞으로 달려가던 나의 젊은(지금도 젊다고 생각하지만 more than) 시절에도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다.



하지만 인생은
다만 한 가지 방식으로만 흘러가지 않음을 깨달았고,
다른 흐름의 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젊으나 젊지 않은 지금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여전히 나는 그 절한 사랑 노래인 ‘당신을 위하여’를 들을 때마다 출근길 차 안의 고요하고 적막한 공기가 느껴지고, 그 아침의 피곤과 그러나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가 기억난다. 어쩌면 그 시절 나의 ‘당신’은.....‘회사’ 였을지도 모르겠다. 웃기지도 않은 결론이지만 이 노래와 나의 그 시절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당신을 위하여’가 지난 십몇 년간 나를 위로했듯, 같은 기간 긴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에게 위안을 주던 그 시절의 동료들에게 오랜만에 연락 한 번 해봐야겠다. 잘들 지내시냐고. 요즘 어떤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고 계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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