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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May 24. 2021

찬란한 사랑

불꽃같던 시간들의 기억


펑! 펑펑! 퍼버벙!!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 터지는 듯 한 소리가 운동장 쪽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이 모두 복도로 뛰어 나갔다. 운동장을 내다보니 책가방을 멘 학생들 몇몇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갈아 신을 겨를도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다. 순식간에 운동장은 아이들로 가득 찼고, 다들 완전히 흥분한 상태로 불꽃이 터질 때마다 소리를 질러댔다.


  불꽃놀이를 주도하던 아이들은 미리 운동장에 잘 박아 세워두었던 불꽃 막대에 불을 붙여대기에 바빴고, 우리는 그 주위를 몇 겹으로 빙 둘러싸고 서서 그것들을 구경했다. 미처 운동장으로 나오지 못한 아이들, 또는 1층까지 내려오기 귀찮아서 복도에서 구경하는 선배 언니들을 비롯해 많은 아이들이 건물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함께 환호하며 빵빵 터지는 불꽃들을 감상했다. 가뜩이나 감성으로 가득 찬 고등학생 소녀들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지겨운 야자 시간을 꾸역꾸역 버티고 앉아 책과 씨름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뜻하지 않은 횡재냐고 생각했던 건 아마 나뿐이 아닐 것이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옆 건물 남자 고등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복층구조로 되어 있는 그 학교 건물 구조상, 뒤쪽 교실의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 쪽 교실로 달려와 함께 구경하고 있을 것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간혹 그 모습을 상상해 본다. 건물이 앞쪽으로 기울어 휘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상상.) 그중 몇몇은 우리처럼 건물 밖으로 나와 운동장에, 스탠드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지만, 여학생들이 가득 들어찬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테니, 대부분은 그저 멀리서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무릇 불꽃놀이는 멀리서 보는 것이 진리이므로, 그들의 선택이 옳았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린 감상을 넘어 동참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정신없이 뛰어 나갔던 것일 테고.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미친 감성의 이벤트를 작당한 멋진 그녀들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대충 계산해보아도 한 학교에 2천 명씩, 대략 4천 명에 가까운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환호하고 있으니, 두 학교의 야자 당직 선생님들은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사태를 파악한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뛰어나오기 시작했고, 마지막 불꽃 막대에 불을 붙인 그녀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를 쥔 원두가 빛의 속도로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원두는 국어 선생님의 이름이다. 그에게는 분명 성이 따로 있었고, 선생님이라는 존칭도 꽤 어울리는 좋은 분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OO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끼리 있을 때 그는 그저 원두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를 무시했느냐, 절대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던 선생님 세 분 중에 한 분이었다. 원두는 그의 이름이자 애칭이었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뛰어봤자 그들은 몸이 무거운 운동부족의 고등학교 여학생들이고, 원두로  말할 것 같으면 점심시간마다 옆 남학교 선생님들과의 미니 축구 경기에서 늘 선전하는, 군대를 제대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젊디 젊은 청년이었다. 그들이 간신히 운동장 끝 쪽에 다다라 이제 막 교문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즈음, 뒤쫓아 가던 원두에게 거의 따라 잡히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획대로 멋지게 도망가고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완전 범죄가 성립되는 것,
아마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곧이어 야자 2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우리는 막대기를 손에 든 또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토끼몰이를 당하며 교실로 밀려 올라갔다. 물론 극도로 흥분한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소녀들의 목소리에 묻혀 “조용히 하고 올라가, 이 녀석들아.”라고 열심히 외쳐대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야자 2교시는 엉망진창이었다. 우리의 소녀 가슴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채로 두근거리고 있었고, 이런 바람직한 사고를 친 그녀들은 이미 전교적인 영웅이 되어 있었다. 사실 손으로 불을 붙여 터트리는 불꽃이라는 것의 성능은 미천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도 두 개 건너 하나씩 불발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가 학교에서, 그것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교실마다 꽉꽉 들어차 있는 평일 야자시간에 불꽃을 터트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탈이었고, 그런 모험을 감행해 준 그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히기 위한 선생님들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복도 곳곳에서 울리고 있었고, 이미 조용한 가운데 공부를 하는 것이 불가한 우리들은 숨죽여 키득거리고 있었다. “와!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냐.”


  얼마지 않아 어디에선가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추측컨대 원두에게 붙들려 온 오늘의 영웅들이 매타작을 당하는 소리 이리라. 비명소리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예상보다 훨씬 살벌해진 학교 분위기에 우리 모두는 각자 책상에 머리를 쳐 박고 공부하는 ‘척’을 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야자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고, 우르르 복도로 쏟아져 나온 우리들은 여기저기 공중을 떠다니는 소문들을 짜깁기하여 오늘 사건의 대략적인 시나리오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오늘의 영웅 : 2학년 언니들 세 명 (세 명인 걸로 나는 기억하는데 이건 확실치가 않다.)

· 반란의 이유 : 수능을 두 달 앞둔 3학년 선배들 위로 차

· 그들의 계획 : 야자 1교시 때 몰래 빠져나와 불꽃놀이 준비를 한 후 쉬는 시간에 터트린다. 그리고 미친 듯이 도망간다. (치밀한 선배들... 그래서 미리 가방까지 메고 있었던 것이다.)

· 반란의 결과 : 장시간 매타작을 당한 후 야자 끝날 때까지 벌 섬



  그들의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으나,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었으니, 그날 야자 당직 선생님 중에 원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긴 꼭 원두가 아니었어도 그들은 잡혔을 가능성이 크다. 신설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립학교였던 우리 학교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 꽤 많았으므로. 우리들은 시나리오를 약간 수정해보았다. 그들이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겁나게 뛰어갈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 파고들었다면 어땠을까. 죄다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단발머리들을 하고 있으니, 그리고 모두들 한마음으로 시치미를 떼 주었을 테니, 그 편이 범죄를 은닉하기에 보다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내년에는 우리가 그렇게 한번 해볼까?


  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소녀들이 저지른 하룻밤의 일탈이라 여기고 넘어가 주었는지, 부모님을 모셔 와서 함께 꾸중을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일로 징계를 먹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다 같이 서명운동이라도 해서 그들을 구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 덕에 행복했고, 3학년 선배들 역시 분명 그들의 정성으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학교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는 선생님들의 걱정은 그저 기우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학교 축제가 있었다. 낮에는 연극 등 갖가지 공연과 작은 이벤트와 먹거리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어둠이 내릴 무렵에는 학교 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 캠프파이어와 함께하는 즐거운 댄스 타임! 스피커가 찢어질 듯 크게 울려 퍼지는 신나는 노래들을 함께 따라 부르며, 되도 않는 막춤을 추겠다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대며, 우리는 그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때 우리 모두를 환호하게 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R.ef의 ‘찬란한 사랑’이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한쪽 손을 가슴에 얹은 다음 더없이 처절한 표정으로 절규와도 같은 내레이션을 따라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도저히 끝까지 두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지만, 그 당시엔 상당한 파격이었고 간지 작렬의 무대였다. 게다가 귀공자 같은 외모의 이성욱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사실 그 파트는 성대현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성대현 역시 도저히 닭살스러워서 할 수가 없다며 이성욱에게 그 파트를 떠넘겼고, 그건 이성욱도 마찬가지였지만 할 수 없이 꾹 참고 했다고 한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성대현이 말하기를, 첫 무대에서 이성욱이 촤~악 무릎 꿇고 내레이션을 시작하는 순간 팬들의 엄청난 환호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고 한다. 내가 그냥 할 걸, 하고.



  여기까지가 그 시절을 생각하면 늘 함께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선배들의 불꽃 이벤트,
같은 장소에서 활활 타오르던 캠프파이어의 불꽃,
그리고 그 불꽃만큼이나 뜨거웠던 R.ef의 ‘찬란한 사랑’.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시절 다이어리를 뒤지고, 포털에서 R.ef에 대해 검색해보고, 유튜브에서 그들의 노래를 찾아 듣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내 기억 속에서 불꽃놀이와 캠프파이어와 ‘찬란한 사랑’은 늘 함께 기억나는 고등학교 시절 추억의 한 조각이었고, 불꽃놀이를 볼 때마다, TV에 R.ef가 나올 때마다 나는 늘 어김없이 그 일들을 동시에 떠올리곤 했었는데...... 놀랍게도 불꽃놀이가 있었던 것은 내가 1학년 일 때, R.ef의 ‘찬란한 사랑’이 발매된 것은 그다음 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꽃놀이의 불꽃과 축제 캠프파이어의 불꽃과 ‘찬란한 사랑’의 불꽃같은 퍼포먼스를 난 죄다 섞어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짐작컨대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서, 내가 살아온 세월이 길어지면서 그 기억들은 기다란 시간의 막대에서 하나의 점처럼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래 뭐, 그 1, 2년 차이가 뭐가 그리 중요할 텐가. 몇십 년이 더 흐르고 나면 피구왕 통키의 ‘불꽃슛’까지 하나의 불꽃으로 통틀어서 기억될 것인데.



  대학에 입학한 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다름 아닌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막상 고등학교 때는 그저 같은 반이라는 것 외에 큰 교류가 없던 친구인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대학 입학식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대동단결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둘은 그동안엔 몰랐던 상대방의 사람됨을 금세 좋아하게 되었고, 대학시절 내내 단짝으로 지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해마다 9월이 되면 우리는 그 불꽃 이벤트를 기억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제 우린 졸업생이니까 끌려가서 맞을 일은 없지 않을까? 후배들 독려 차원에서 사고 한번 치러 갈까?” 물론 후배들 독려보다 더 중요한 ‘술 먹는 일’ 때문에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지만, 아마 우리말고도 그런 상상을 하는 W여고 출신 친구들이 많았을 거라 생각된다.



  얼마 전 우연히 포털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 중에 ‘선생님들 연령대가 높은 편이라’라는 대목을 보고 혼자 웃었다. 사립학교라 선생님들 이동이 잦지 않았을 것이고, 그 푸릇푸릇하던 청년쌤들이 이제는 ‘연령대 높은’ 분들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것이다.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마 그 시절 그분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진 나를 보고 “누구세요?” 하실 것이 뻔하므로. 그저 어쩌다가 학교 앞을 지나게 되면 그쪽을 향해 한번 방긋 웃어준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다시 돌아간다면 언제로?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주저 없이 고등학교 때! 라고 대답하곤 했다.



선생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이상하지만,
꽤 아름다웠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리들 세상.
불꽃같은 시간들이었다.





P.S.

위에 언급한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옆 건물 남자 고등학교’ 대한 부연 설명을 잠시 하겠다.

우리 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쓰는, 같은 재단의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다. 원래 그 학교가 먼저 남녀공학으로 개교를 하였고, 2년 후 같은 울타리 안에 우리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그때부터 그곳은 여학생들의 싸움터가 되었다고 한다. 두 학교를 합쳐 남녀의 비율이 1:3이 되었으므로. 보다 못한 학교는 그 학교를 남학교로 바꾸기로 했고, 그걸 반대하는 학생들이 한동안 투쟁을 했다고 한다.

결국 학생들은 학교를 이기지 못했고, 그 이후 두 남학교와 여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만우절이면 교복을 바꿔 입기도 하고, 교실을 바꾸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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