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 청소부 Nov 21. 2020

술에 취한 바다

그리운 엄마에게

 이생진 시인은 제주도 성산포에 가려거든 자신의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가지고 가라 했다.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 것이며, 바다에서 시를 읽을 것이라고 했다. 성산포에는 바다가 들려주는 시가 있고, 그리운 엄마와 나의 이야기도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는 날, 제주도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쉰네 살의 엄마를 급히 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이송했다. 뇌수술의 권위자로 알려진 담당 의사의 말로는 수술하면 괜찮아진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뇌수술을 받고 의식이 돌아온 엄마를 만나는 자리였다. 회복실로 들어가기 전 형제들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사경을 헤매던 엄마가 눈을 뜨고 누구 이름을 제일 먼저 부를까 궁금하다며, 언니는 집안 장손이자 막내인 남동생을 바라봤다. 엄마는 딸만 셋을 내리 낳고 귀하게 얻은 막내아들을 끔찍이 아껴왔다. 그때, 엄마가 처음으로 부르는 사람이 병간호를 도맡아 하는 게 어떠냐고 여동생이 제안했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던 엄마가 깨어났는데 간병이야 대수냐고 다들 그러자했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간호사가 엄마 이름을 부르며 깨웠다. 엄마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와 형제들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누구 할 것 없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멍한 눈빛. 눈빛이 좀 이상했다. 엄마는 낯선 이들을 보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우리를 알아보겠냐며 말 좀 해보라고 했다. 몇 초간의 침묵을 깨고 엄마는 “성은아.”하며 둘째 딸인 나를 불렀다. 의외의 호명에 깜짝 놀랐다. 여동생이 자신의 이름도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여동생에게도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는 언니, 남동생, 간호사에게도 “성은아.”라고 불렀다. 뭔가 잘못됐다. 주치의를 만나서 엄마의 상태에 관해 설명을 부탁했다. 의사는 뇌수술 후유증이라며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엄마는 말만 잘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인지능력도 떨어지고 괴성을 지르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병원을 나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엄마를 간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태가 심한 날은 엄마를 침대에 묶어놔야 했다. 내 이름만 부르는 바람에 엄마가 입원한 병동에서 ‘성은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형제들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녀들이 어렸고, 여동생 가족은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간병에 어려움이 있었다. 2년 전 이혼하고 친정에 들어가 살던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의 농담이 나를 엄마 곁에 붙잡아 둔 셈이었다. 나의 삶은 완전히 사라졌다.


  엄마의 후유증이 전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재검사에 들어갔다. 의사는 뇌수술 부위에 물이 찼다며 3개월 후 재수술을 하자고 했다. 간단한 수술이니 이번에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엄마는 상태가 더 나빠져 식물인간이 되었다. 운 나쁜 케이스의 환자였다. 뇌수술의 경우 자주 뇌를 열면 안 되기에 다시 6개월 후에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세 번째 수술을 받고서야 의식을 차렸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정신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언어장애는 계속되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이후 5년 동안 엄마의 몸은 정신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인생의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왜 내 이름만 불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정신을 끝내 차리지 못한 엄마에게 이유를 듣지 못했으니 나름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중에도, 주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밥을 먹다가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해 질 녘을 바라보다가도, 잠자리에 들어 하루를 돌아볼 때도 수시로 엄마는 나를 불렀다. 그럴 때면 나도 물었다. 왜 나만 불렀냐고.

  엄마 병문안을 왔던 샛엄마는 다른 형제들은 다 행복한 가정을 이뤘는데 짧은 결혼생활을 마치고 혼자된 내가 걱정되어 불렀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엄마와 아빠는 자라온 환경과 성격 차이로 결혼하고 나서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부부는 각방을 썼고 사적인 대화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을 때 즘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나와 살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늘 엄마 편이었던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큰소리쳤다. 엄마는 그런 딸이 좋았는지 종종 서울에 와서 좁은 원룸에서 며칠씩 지내다 갔다. 남대문 새벽시장도 가고 가을빛 가득 담긴 비원의 뜰을 거닐었다. 혜화동에 있는 소극장에 가서 연극도 보고 인사동 주점에서 내 친구들과 함께 술도 마셨다. 엄마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럼 나도 그 행복에 같이 젖었다.

  일 년에 두어 번 직장에서 휴가를 받아 제주도로 가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성산포에 꼭 데려다주었다. 나는 제주에서 태어나 살면서 성산포가 제일 좋았다. 신비함이 있었고 일출봉에 올라 제주라는 섬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내려오는 길에 엄마와 나는 해녀들이 파는 소라와 해삼 한 접시를 사서 푸른 바다 앞에 앉아 소주 한 잔씩 마시며 행복해했다. 그 소주 한 잔에 서울에서 가지고 온 피로가 다 풀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와 마시는 술은 그 어떤 귀한 술보다 맛이 좋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뭔가 고민이 생겨 답답할 때나 엄마 얼굴이 보고 싶을 때면 성산포에 갔다. 어느 해인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시인 친구는 이생진 시인의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을 보내주었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말만 하고 

  바다는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약하다.

  (이생진, <술에 취한 바다>)


  엄마와 함께했던 일출봉 아래 바닷가 너른 바위 위에, 쟁반에 든 해삼과 소라 한 접시, 소주 한 병을 놓고 앉았다.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시간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엄마와 나는 이곳에 앉아있다. 엄마는 나와 술을 마시며 언젠가는 시골에 집을 지어 귤나무도 심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살고 싶다고 했다. 가끔은 둘이서 여행을 떠나자고도 했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나만 같이 있어 준다면 행복할 것이라 했다. 나 또한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을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내 영혼의 친구였다.  

  우리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귓가에 대고 나는 말했다. “엄마, 내 안에 들어와서 살아….”


  바다를 바라보며 내 안에 있는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여기 참 좋지….’ 소주 한 병을 마셔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시인 말대로 바다가 술에 더 약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울보의 라일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