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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May 26. 2021

존중과 신뢰가 빚어낸 아름다운 인터뷰집

고레에다 히로카즈, <키키 키린의 말>


내가 마지막으로 본 키키 키린의 작품은 <인생 후르츠>이다. 사실 이 작품에는 키키 키린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2018년 세상을 떠난 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어느 노부부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키키는 이 작품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나는 이 영화를 그의 죽음 몇 달 후인 2019년 1월에 보았는데, 화면에는 키키가 나오지 않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라고 읊조리던 그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합쳐 177살, 65년을 함께한 부부의 노년의 삶과,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관조하는 하는 듯한 키키의 음성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 영화의 감동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 1950~6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 시절의 작품과 현대의 몇몇 감독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일본 영화를 크게 즐기지 않는데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챙겨보는 편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장이나 오글거림이 없어서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키키 키린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고레에다의 작품을 통해서이다. 거의 10여 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키키 키린은 어머니이자, 할머니로 등장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혜자 또는 고두심 같은 역할이랄까. 그런 까닭에 고레에다의 페르소나라고 불리기도 하는 키키 키린. 그이는 고레에다의 페르소나이자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노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2008년부터 키키가 세상을 떠난 2018년 사이 나눈 여섯 번의 대담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 키키의 60여 년 연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가 함께 한 작품 이야기도 여럿 나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는 책이 되기도 한다. 고레에다는 이미 그의 에세이집인 <걷는 듯 천천히>에서도 키키를 향한 애정을 서슴없이 밝힌 바 있다. ‘배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옛날부터 키키 키린 씨의 팬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어떤 점 때문에 키키의 팬이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작품 <걸어도 걸어도>의 한 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아들 부부는 거실 쪽으로 걸어갈 때 준비해 둔 슬리퍼를 신는 걸 잊어버린다. 그러자 키키는 순간적으로 이 슬리퍼를 들고 허리를 구부린 채 그 뒤를 따라간다. 각본에 쓰인 대로가 아니다. 키키의 애드리브이다. 고레에다는 컷을 외치는데, 촬영감독이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최고잖아…… 몸을 굽힌 저 모습” 그때 고레에다는 그것은 바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임을 깨닫는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고레에다는 키키에게 주인공 소년의 외할머니 역을 부탁한다. 크랭크인 전날 키키와 그는 초밥을 먹으러 갔는데, 자리에 앉자 키키는 이렇게 운을 뗀다.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좀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걷는 듯 천천히), 124쪽). 실제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이며, 그렇기에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오다기리 조’나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처럼 성인 배우들도 나오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왔는지조차 기억의 희미할 정도로 어른은 배경으로 머문다. 그러나 성인 배우들이 스스로 배경 머물기를 기꺼이 청했기에 그런 영화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키키 키린의 말>에 수록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메모. 그가 그린 키키의 얼굴이 참 귀엽고 앙증맞다. 


이 두 가지 일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는지, <키키 키린의 말>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고레에다와 키키, 두 사람의 감독과 배우로서의 자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고레에다는 자신의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톤이나 밸런스까지 염두에 둔 키키의 조언에 감명한다. 키키는 애드리브도 결코 그 자리에서 생각난 대로 연기하지 않는다고  평한다. 이렇게 기꺼이 ‘배경’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는 키키의 배우로서의 철학은 이 <키키 키린의 말>에서 숱하게 만날 수 있다. 키키는 2007년 영화 <도쿄타워>에서 어머니 역을 맡기 이전에는 주로 영화에서 단역만 고집했다. 고레에다는 왜 큰 역할을 맡지 않았는지 묻는데, 그에 키키는 TV 방송과 달리 영화는 계속 남겨지기에 꺼려졌다는 말을 한다. 그 옛날에는 TV 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해두는 경우도 없었으니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게 좋았는데, 이제는 TV 방송도 기록이 남아버리는  시대가 돼서 무섭다는 말이다. 그러나 키키는 병(암)을 앓고 나서부터 영화에 대한 마음가짐이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조금은  겸허해진 것 같다는 말. 연예계는 재능이 아니라 인품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 자신을 물처럼 만들어서 세모난 그릇이라면 세모, 네모난 그릇이라면 네모, 동그란 그릇이라면 동그라미가 되어 꾸밈없이 거기에 들어가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키키 키린의 말>, 17쪽)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걸까. 영화 속 키키를 보면 그이의 말처럼 세모 그릇, 네모 그릇, 동그란 그릇 어디에나 꾸밈없이 거기에  그대로 들어가 자연스레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키키는 ‘평범한 대목의  평범한 움직임을 봐주는 게 배우로서 굉장히 기쁘다’ 말하는데, 이 평범한 움직임을 자연스레 재현하는 게 가장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배우였음에 틀림없다. 한편 고레에다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아내는 재주가 빼어난 감독이다. 키키 또한 그런 고레에다를 칭찬한다. ‘인간이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고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은  확실히 보고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 찍는다.’라고 말한다. 나 또한 이 의견에 공감한다. 키키는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다 하는 착각이 드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있기에 인간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키키의 말은 그의 철학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말이 아닐까.

<키키 키린의 말>에는 이렇게 키키의 연기와 삶에 대한 자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노인을 연기하는  그이의 자세와 관찰력, 시선 등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나이 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앉아 있을 때 젊은 시절에는 등을 쭉 펴고 앉았지만 노인을 연기할 때는 점점 작아져서 마지막에는 얼굴 바로 아래에 가슴이 오도록 하는 식이다. 서툰 배우일수록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을 알기 쉽게 내려고 등을 구부리는데, 키키는 ‘목이 없어진다는 느낌’을 살리는 식이다. 또 ‘뼈를 뺀다’는 표현도 눈길이 간다. 중심을 확 아래에 두고 밑위를 길게 해서 다리를 짧아 보이게 만들고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게 티가 나지 않도록 헐렁헐렁한 옷을 입는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서 옆으로 두꺼워지게’ 만드는 일이나 ‘입 주위 근육을 느슨하게’ 한다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키키는 평소 여러 노인을 보고 관찰하며 이런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가 없는 사람과 생활하면 어떨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각본에도 없는 틀니를 빼서 씻는 연기를 애드리브로 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나이를 먹으며 이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 다며 ‘배우로서는 솔직히 본인의 이상한 모습, 추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무척  부끄럽지만 그런 묘한 사명감과 결점을 내보이려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라 그렇게 되어버린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는 말이지만,  자신의 추한 모습까지도 꺼리지 않고 연기하는 그 자세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키키의 연기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요, 키키와 함께 있으면 ‘제대로 된 감독이 되고 싶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어떤 배우에게 ‘이 사람은 제대로 된 연출가다’라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주는 배우가 있다는 게 연출가에게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배우의 연기를 제대로 보고, 배우에게 ‘아아, 그런 부분을 보는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연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연출가이고 싶다고 말하는데,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그런 배우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 고레에다는 키키에게 그의 장점을 알아보고 그것을 극대화해주는 감독이었을 테고. 이처럼 서로의 장점을 잘 알아보고 믿고 존중하며 함께 했기에 그들이 함께한 1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처럼 수많은  명작을 빚어낼 수 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절묘한 조합은 마침내 빛을 보아 두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작품인 <어느 가족>은 2018년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는 병색이 완연한 키키가 바닷가에 앉아 어렴풋이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각본에 없는 장면이라 고레에다도 나중에 편집실에서 키키의 입 모양을 한참이나 돌려보고 나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 그 말은 키키 키린이 고레에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가슴 깊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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