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나의 인생>
첫 직장에서 만나 이제는 친구가 된 이가 있다. 동갑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그 친구와 나는 비록 부서가 달랐지만 ‘입사동기’랄까 이런 공통사항 때문에 어느덧 점심시간에 같이 산책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햇살 좋은 봄날 산책을 하며 벤치에 앉아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대부분 ‘대학 때가 좋았죠.’ 이런 종류였다. 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회사의 갑갑함에 몸이 아플 것 같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첫 월급 액수에 놀라던 그때의 나와 그 친구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를 했으니 고작 스물셋 혹은 스물넷이었던 우리에게 나이 서른을 넘은 대리, 과장, 차장급 사람들의 삶은 무료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저 나이가 되어도 이런 답답하고, 비전도 없어 보이고, 어쩐지 고인 물 같은 느낌이 드는 이런 회사에서 멍청하게 하루하루를 죽여가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회사를 퇴사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이런 갑갑한 회사에 다시 올까요?’ 그런 이야기들-
한자리에 자리를 잡으면 듬직하게 오래 앉아있는 성미의 그 친구와 나는 어쨌든 그 회사에서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침에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일념에 새벽같이 만나 학원을 같이 다니고, 건강도 챙겨야겠다며 새벽에 스쿼시를 함께 배우러 다녔다. 그때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보통 새벽 6시 혹은 5시이랬다. 외국어 학원에서 함께 강의를 듣고 그리 멀지 않은 회사까지 함께 걸어오는 이른 아침 출근길은 어쩐지 무척 뿌듯했다. ‘아,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런 기분들.
3년이 넘어 더는 그 회사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또 비슷한 시기에 그곳을 떠났다. 같은 회사에 있었지만, 서로 할 줄 아는 부분은 달랐던 그 친구와 나는 각각의 ‘밥 벌어먹는 재주’를 살려 서로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인연의 끊은 계속 이어져 이제는 ‘회사 동료’였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편안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외국어 관련 출판사에서 일하던 그 친구는 필요성을 느껴 어느 날 훌쩍 어학연수를 떠났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홀로, 불현듯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10개월 가까이 지나서 그 친구가 돌아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백수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 친구와 나는 자주 만났다. 한가한 평일 오후 홍대나 광화문 근처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수다를 떨었다.
대화 내용은 보통 이렇다. ‘그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몰라’ 이런 이야기들. 새벽같이 만나서 학원을 다니고, 건강을 챙긴다며 스쿼시를 배우러 다니고 이런 시간의 의미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도 나름 순진하게 ‘사회의 제도권’ 안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계발’이라는 것을 하면서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혀를 찬다.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사실은 ‘무얼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고 ‘사회가 원하는 규격화된 사람’이 되기 위한 부끄러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나는 그때의 우리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민망해했다.
‘회사’라는 공간이 사람의 자율성을,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얼마나 좀 먹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돈을 주기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시켜도, 회사 규칙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다 따라야 한다는 그런 폭압적인 광경에 아연실색한다. 그렇게 돌아보면 그 친구와 내가 만난 그 첫 직장이 ‘고인 물 같이’ 조용하고 갑갑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강압적인 상사도, 야근문화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야근이라고 해봐야, 8시만 되면 불을 끄려고 당직 직원이 돌아다닌 곳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그곳을 나가 다른 직장을 전전하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조금 덜 받아도 좋으니 인간의 자율성을 덜 침해하고, 야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는 없는 걸까 우리의 결론은 늘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런 지옥 같은 생활’로 돌아가기 싫어서 할 수 있는 한 백수 생활을 지속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갑부 집 자식들도 아니고, 가족일지라도 타인에게 손 벌리고 사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성미라 어쨌든 다시 그 ‘지옥과 같은 전쟁터’로 나아가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곤 했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재주가 특출 나지도, 용기가 남보다 많은 이들도 아니라 백수로 자유롭게 지내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갈 것을 그 친구도 나도 늘 인지했다. 다만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래도 우리가 좀 더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톤 체호프의 중편 <나의 인생>을 읽으며 그 친구와 내가 나눈 어느 오후의 대화들이 떠올랐다. 체호프가 담담히 조용하게 써 내려간 <나의 인생>에서 주인공 미하일은 행복해지기 위해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육체노동’을 하는 ‘도장공’이 된다. 지식노동을 하는 귀족들의 위선과 허울에 환멸을 느끼고 육체노동자들의 단순하고 건강한 삶에 매료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농부’가 되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하층민의 무례함, 무식함, 그들 사이의 위선, 난폭함 등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들이 사는 곳이고,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계급이나 위선과 난폭함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미하일은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을 선택하고, 그렇게 조용히 늙어간다. 처음에는 귀족이었던 이가 육체노동을 한다며 손가락질하고 비웃던 이들 모두가 마침내 그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미하일의 선택이었고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미하일처럼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하고 그 안에서 좌절도 겪어야 하고,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는가 보다. 그런 순간을 지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 잘하는 일, 행복해지는 일을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나는 어떤 것도 그저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아주 작은 걸음조차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는 미하일의 말처럼 친구와 나의 그 모든 시간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가 있으리라. 이십 대 시절의 그 시행착오들도 그렇고. 적어도 그 시절을 통해 우리가 ‘사회가 바라는 규격화된 인간형’에는 아무리 끼워 맞추려 해도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깨달음은 얻지 않았는가. 살아가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친구도 그리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