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 노부코, <물망초>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근대 문학 시기를 보면 남성 작가들 이름만 주르륵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나 역시, 한국 근대문학이나 일본 근대문학을 접할 땐 주로 남자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예전보다는 그 무렵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종종 만날 기회가 생기고 있다. 덕분에 히구치 이치요, 하야시 후미코에 이어 요시야 노부코의 <물망초>를 읽는다. 이 작품은 서문부터 말랑말랑하다.
시냇가 기슭에 홀로 피어난
은은한 하늘빛 작은 물망초
물보라 밀려와 입맞춤하고
아무도 모르게 잊히어 가네.
작가는 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쓰려한다고 밝힌다. ‘이 세상의 여자아이가 한 번은 지났을 법한, 그런 날도 있었지-하고 미소 지을 법한 혹은 멀리 떠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쓸 법한’ 그런 이야기들. 실제로 <물망초>는 여고시절을 거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 또한 그 시절을 잠시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작품 초입은 온건파, 강경파로 나뉘어 한 학급을 소개하고 있다. ‘온건파’란 한마디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말한다. 공부보다는 영화나 음악, 연극을 즐기고 로맨스를 꿈꾸는 아이들로 학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에 비해 ‘강경파’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교과서만 판다. 강경파의 머릿속에는 학교의 자랑이라든가 모교의 명예 같은 관념으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재미를 찾는 온건파 아이들이 보기에 강경파는 앞뒤 꽉 막힌 답답한 종족이다. 물론 중립지대도 있다. 온건파와 강경파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로 그들은 ‘자유주의자’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온건파 아이들처럼 영화든, 연극이든 종종 보러 간다. 그러나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어느새 강경파로 돌변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교과서와 노트로 달려든다.
학창 시절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지금쯤 난 이 세 무리 가운데 어디에 속했을까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굳이 따지라면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완벽히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자유주의자 말고도 극소수의 개인주의자’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어떤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고독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딱히 이것도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개인주의자 그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런 학급 분류가 이어지고는 그 파의 대표 격인 아이들이 소개된다. ‘아이바 요코’는 온건파의 여왕으로 예쁜 수다쟁이이다. 수업 말고도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따로 배우며, 아버지는 사업가로 집안이 부유하다. 닉네임은 클레오파트라인데, 줄여서 ‘클레오’라고 부른다. 강경파의 대장은 ‘사에키 가즈에’로 으뜸 모범생이다. 닉네임이 무려 ‘로봇’- 인조인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피도 나오지 않을 것처럼 공부만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세 남매를 키우고 있으며, 집안도 넉넉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걸출한 개인주의자인 ‘유게 마키코’가 있다. 말이 없고 개성 있는 성격으로, 모 대학교수 이학박사인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산다. 닉네임은 따로 없고, 다만 반 아이들은 유게 마키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엄숙해진다. 이 작품은 이 개성 넘치는 세 소녀의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면서 그 시절 소녀들이 겪은 집안에서의 억압과 성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강경파의 대장인 ‘가즈에’와 걸출한 개인주의자 ‘마키코’는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데다 개성도 뚜렷하고 자기만의 꿈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소녀가 저마다 자기의 꿈을 이뤄나가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앞에 놓여 있다. 돌덩이처럼 무겁다. 그런데 그 돌덩이는 집안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두 소녀에게 안겨줬다. 앞서 가족 구성원을 소개했는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두 소녀는 저마다 한 집안의 장녀이고, 둘 다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들 집안에서는 그 어린 남동생을 신처럼 떠받든다. 가즈에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마키코처럼 아버지가 살아있어도 아들이 집안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은 다르지 않다.
가즈에의 아버지는 직업이 군인으로, 만주 수비대 있을 때 병을 얻어 퇴직 후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병사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이들 앞으로 남긴 유서가 참으로 가관이다. 가즈에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남긴다. ‘너는 장녀다. 내가 죽은 후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집안일을 해다오 아버지 뒤를 이을 아들 미쓰오를 위해서나 어린 막내 동생 유키에를 위해서 평생 좋은 누나와 언니가 되어주길 바란다. 때에 따라서는 동생들을 위해 네가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임해다오.’(45쪽) 이런 막중한, 말도 안 되는 돌덩이를 남긴 것이다. 그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너는 집안의 소중한 아들이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군인이 되라는 말을 남긴다. 이처럼 죽은 아버지가 떠받든 아들을 어머니 또한 충실히 맹목적으로 따라서 섬긴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미쓰오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 아버지 뒤를 잇게 하겠다는 목적에만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미쓰오가 일가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었고,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준다. 가즈에가 보기에는 마치 ‘아들에게 복종’(76쪽)하는 것 같다. 로봇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아들, 남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쓰여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나 가즈에는 이런 집안 분위기에 얼마쯤은 이미 체념한 것 같다.
살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마키코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학박사이면서도 여성들의 지식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딸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은 자기 뒤를 이을 든든한 학자로 여긴다. 그에게 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식이다 마키코의 학교 성적이 좋은 걸 기뻐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본인의 전공인 과학 말고는 음악이니 미술, 문학에 아무 흥미도, 관심도 없는 이 꽉 막힌 아버지는 소중한 외아들이 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데에도 불쾌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마키코에게 만에 하나 병약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와타루의 누나이자 어머니 대신’이라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 주제에 비열하게 성공하고자 하는 혐오스러운 속물근성까지 갖추고 있다.
온건파 여왕인 아이바 요코가 어느 날 마키코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하는데, 개인주의자인 마키코는 그답게 그 초대를 거절한다. 친하지도 않은 아이가 초대한 것이 의아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가 영 마뜩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식탁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마키코의 아버지는 ‘아이바 요코’라는 이름에 떡하니 입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아이바 씨는 그가 앞으로 세우려는 과학연구소에 막대한 기부금을 약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비굴한 아버지는 감히 그런 분 따님의 생일 파티 초대를 거절하느냐며 성을 낸다. 미친놈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부모,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마키코가 거절하고 안 가면 아버지 겐스케 씨 기분이 어떻겠냐고 딸을 윽박지른다. 아니, 초대한 당사자 요코의 기분이 아니라 왜 그 아버지 겐스케 기분을 생각하는지? 참으로 역겨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그는 엉겁결에 자기 본심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나중에 내가 궁지에 처할 수도 있어.” 오오, 너무 싫다. 영리한 마키코는 이런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꿰뚫어 보고 그를 싫어하고 어려워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과 협박에 못 이겨 마키코는 결국 요코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요코-마키코-가즈에 세 사람의 우정과 연애, 그 중간 어디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들은 잔소리만 해대잖아. 생각도 고리타분하고, 따지고 보면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나 벌써 각오했어. 엄마가 돌아가신 대도, 아빠가 돌아가신 대도, 소녀 소설 속에 나오는 애들처럼 울거나 우울해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담담해질 거야. 근대에는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해.”(132쪽)
이 작품에서 빛나는 캐릭터는 단연 ‘아이바 요코’이다. 요코는 공부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마키코에게도 서슴지 않고 다가가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그 애정공세를 할 때도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요코는 가즈에나 마키코와 달리 집안이 부유하고, 그렇기에 누구도 어린 요코에게 남동생 같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요코가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물론,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 깜찍한 소녀의 말은 한번쯤 귀 기울여 볼만하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짐 지운 장녀 콤플렉스와 착한 딸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요코의 이 말은 통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이 요코는 작가의 분신은 아닐까? 그 오래전,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숏 컷을 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을 평생 동반자로 삼아 50년을 함께 살아온 작가의 당당함은 이 캐릭터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