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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Aug 27. 2021

엄마, 딸 그리고 모든 인간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주 편안한 죽음>


오래전 엄마가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십 대의 끝자락을 맞이한 즈음이었고, 어린 동생들은 이제 갓 십 대에 들어선 때였다. 철이 없던 때라 고3인데 날마다 병실을 드나들게 한 엄마가  밉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혹시 수술이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마침내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간 날,  외할머니가 오셔서는 우리와 함께 병실을 지키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엄마가 이런저런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병실로 돌아왔다.  마취가 덜 깬 엄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어린 동생들과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놀라 병실 한구석에  쪼그라들어서는 어쩔 줄 몰라했던 것 같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 엄마가 우리를 한참 물끄러미 보더니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쟤들 누구야?”

마취에서 덜 깬  상태였으므로 그럴 만했다. 그래도 그걸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엄마가 나를, 자식들을 몰라봤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아서, 엄마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건가 싶어서 터지는 눈물을 참으려고 병실을 뛰쳐나와서는 병원 한 구석에서 엉엉 울었다.  자기 엄마는 알아보면서 우린 못 알아보네, 섭섭한 마음도 컸다. 동생들도 저마다 그 순간이 충격이었는지, 아직도 다들 “엄마  쟤들 누구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자식을 몰라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생애  최초로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지만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그토록 나약하기에, 또다시 그런 일이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와, 할머니가 이제는 엄마를 못  알아보는, 그리고 물론 나를 포함한 동생들도 못 알아보는 순간이 있었으므로. 

엄마가  마취가 덜 풀려서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노화와 그로 인한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문득 “넌 누구니?” 묻는 순간이 온다면 어떨까. 그 어린 날의 철부지 같은 섭섭함과 충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읽은 두 권의 책,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아주 편안 죽음>은 내내, 그 기억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 서늘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두 책 모두가 노년의 엄마, 병든 엄마와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딸(아니 에르노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치매 문병 일기이다. ‘간병’이  아닌 까닭은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해지자,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문병을 다니며 틈틈이 그날의 일기를  적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어떤 면에서는 노년을 향해 걸어가는 아니 에르노 그 자신의 삶과 죽음, 노년에 관한  단상이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여럿 읽어  본 이들이라면 그녀에게 어머니의 존재가 매우 특별했음을 알 수 있다. 식료품 잡화상을 하면서도 딸에게만큼은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그런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가 속한 세계와 계급을 벗어나길,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그토록 바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억척스럽게도 일했던 그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그 강인한 어머니가 노화로 인한 질병, 그로  인한 치매로 서서히 육체도 정신도 소멸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딸인 아니 에르노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치매로 말미암아 ‘비로소 육체와 정신적 고통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 자기 안에서 ‘부활되고 있음’을 깨닫는다(64쪽). 침대에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쌌다고 목소리를 낮춘 채 말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릴 적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자신도 똑같이 말했음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되었음’을, 그러나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음을(31쪽)’, 그런 ‘어머니는 바로 내 미래의 노년기 모습’(42쪽) 임을  깨닫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가 엄마와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면서 자기의 노년을 응시한다면, 보부아르는 여러 면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어머니의 늙은 육체와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인간의 실존을 생각한다. 치매에 걸린 에르노의 어머니와 달리,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어느 날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이런저런 검사를 통해 엄마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진실을 차마 엄마에게  전하지는 못하고 그저 복막염이라고 둘러대고는 그날부터 동생과 함께 엄마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음은 서서히 엄마를  갉아먹는다. 보부아르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엄마의 삶, 그리고 엄마로 인해 괴로웠던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엄마에 대한 미움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듯이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마찬가지’(<아주 편안한 죽음>,  42쪽) 일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보부아르가 느꼈던 슬픔은 모두 이해 가능한 범위 안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이란 그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에르노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를 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아주 편안한  죽음>, 153쪽)



보부아르도,  에르노도 어머니라는 특별한, 아니, 그저 특별하다는 말로는 도무지 부족한 그 존재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모든 인간의 죽음을 생각한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인간이 육체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는 것’(<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26쪽)이라는 것도 ‘늙는다는 건 생기를 잃어가는 것이며 동시에 마음속의 움직임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67쪽)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엔 실제로 수많은 축제가  미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노년의 요양원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인생의 뒤안길에서 꾸며지는 허상의 축제일뿐,  이제 다시는 진짜 축제의 날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72쪽)이라는 것도.

에르노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노라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그런 상태에서도 어머니로서의 ‘사랑의 몸짓’을 잊지 않는다. 그 순간  앞에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Jene suis pass sortie de manuit’는 어머니의 말은, 어쩌면 나는 나의 삶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는 나의 딸을 떠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말은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떠난 이후 에르노의 기록은 헛헛하고 공허하다. 고통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치열하던 예전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세상 전부를 잃은 기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에 있으면 마치 내가 어머니를 찾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깥, 그것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세상 어딘가에 어머니가 존재해 있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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