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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Aug 31. 2021

옳고 그름, 그리고 선과 악

그레이엄 그린, <브라이턴 록>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은 어떻게 다를까. 선(善)은 언제나 옳고, 악(惡)은 언제나 그릇된 것일까? 아니, 반대로 생각해서 옳은 것은 항상 선이며, 그릇된 것은 언제나 악일까?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누군가에게는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옳은 것이  항상 선(善)일 수 없고, 그릇된 것이 늘 악(惡)일 수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며 대개는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대개’라고 말하는 까닭은 때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죄자를 처단하느라 피치 못해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당방위를 하다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단순히 사람을 죽였다는 것만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악인으로 몰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도 있다. 이렇게 누군가를 죽인 사람을 보호하거나 감싸주는 것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중 어디에 속할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가 되었을 때 손쉽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울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에 따라,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것이 선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래서 범죄를 처단하는 것은 ‘정의’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현실 세계, 세속적인 세상의 판단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죄를 지은 자가 법적으로 처벌받는 것만으로  선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레이엄 그린의 <브라이턴 록>은 이렇게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를.

하드보일드 범죄소설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은 단순히 범죄가 일어나고 그 범죄를 처단하기까지의 속 시원한 결말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사뭇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범죄가 일어나긴 하지만 살인 방식도 교묘하게 은폐되고(그 모든 살인 방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벌 방식도 대부분의 범죄 소설 결말이 그러하듯이 시원하지 않다. 게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열일곱 소년, 미성년자라는 점도, 그 범죄에  자기도 모르게 가담(?)하게 되는 또 다른 인물도 열여섯 소녀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이 들게 한다.

작품은 신문기자인 프레드 헤일이 누군가에게 불안하게 쫓기며 시작한다. 그는 사실 지역을 장악한 불량 조직 우두머리 콜레오니의  정보원으로, 그를 위해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 목숨이 다급해 쫓기는 와중에 낯선 여자들을 이용해 위험한 순간을 피하려고  애쓰는데, 그러다가 건장한 체구에 사람 좋아 보이는 여인 ‘아이다’를 만난다. 그녀와 함께 운 좋게 피신하지만 아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콜레오니와는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조직인 카이트의 오른팔 핑키에게 살해당한다. 아이다는 그저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떠난 줄로만 알았던 헤일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검시관은 헤일이 심장 마비로  자연사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므로, 살해를 저지른 핑키 일당은 운 좋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는데, 뜻밖에  정의감 넘치는 아이다와 핑키의 알리바이에 모순이 있음을 알아차린 웨이트리스 ‘로즈’ 두 여자들 때문에 마음 편히 사건을 덮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은 이렇게 헤일의 진짜  사인(死因)을 알아내고, 그를 죽인 범인을 잡으려는 아이다의 집요한 추적과, 그 추적을 피함과 동시에 무언가 알고 있는 ‘로즈’의  입을 막으려는 핑키의 노력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옳고 그름의 문제와, 선과 악, 세속적인 세상의 정의와  종교적인 세상의 정의의 문제를 질문한다. ‘아이다’와 ‘로즈’ 그리고 ‘핑키’ 이 세 캐릭터가 무척 인상 깊은데, 먼저 아이다는  죽은 헤일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날 우연히 만나서 하룻밤 보낼 뻔했던 사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그녀는  헤일의 죽음에 집착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른바 ‘정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아이다 곁의 남자들도 그녀가 그토록 그 문제에 연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이다는 단호하기만 하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죽음을  무시할 수 없어서, ‘정정당당한 것을 좋아’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직접 실행하려는, 말 그대로 정의의  사도이다. 

‘로즈’는 이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로즈가 자신의 범죄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음을 눈치챈 핑키는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 행세하며 로즈의  마음을 빼앗는 데 성공하는데, 핑키에 비해 로즈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핑키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가톨릭’  신도이기 때문에 그와 자기 자신을 ‘같은 부류’라고 느낀다. 로즈는 핑키처럼 지옥도, 천벌도, 불구덩이도 믿는다. 그래서 핑키를  신뢰하지만 말끝마다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아이다는 불신한다. 애초부터 로즈는 아이다의 웃음소리만 듣고도 그녀를 싫어하는데,  그것은 마치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의 웃음’이다. 핑키도, 자신도 지옥을 믿지만 그 여자는 하나도 믿지 않는 것 같다. 그 여자는 ‘세상이 온통 근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대죄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옳고 그름’만  이야기한다. 마치 자기가 그걸 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여자는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려고 해도 그러지 못할”(234쪽)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다는 핑키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처벌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로즈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핑키와 로즈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기에 로즈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문제적인 캐릭터는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17세 소년 ‘핑키’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런데  천국은 믿지 않는다. 종교는 그에게 ‘그냥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는 지옥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옥 또한  ‘그냥 있는 것’이다. 자신은 평화를 누릴 만한 복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걸 믿지도 않는다. 천국은 말일뿐이지만 지옥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지옥불이 두렵지 않다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부모, 황량한 슬럼가 출신에 갱단  우두머리 카이트가 양아버지나 다름없었으며 카이트 패거리가 식구인 핑키. 미성년인 그의 주위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다. 살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다. 성행위에 극도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자신의 필요 때문에 로즈와 가까워지면서도 손을 잡는다거나, 입을  맞춘다거나, 또는 더 나아가 성행위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는 사랑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 속지 않는다고, ‘침대에서 벌어지는 토요일 밤의 움직임’ 같은 것으로는 이 지옥 같은 삶의 탈출구가 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일에 힘을 쏟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열일곱  나이에 성적인 관계에 그토록 혐오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한데, 사실 소년은 어릴 때 부모가 토요일 밤마다 벌이는 ‘그 짓거리’를 훔쳐보면서 ‘그 짓’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어릴 때 사제가 되고 싶었던 핑키에게 사제란 ‘뭐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것들’, 그러니까 성행위나 술을 마시는 등 쾌락을 위한 행동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제가 되기를  꿈꾸던 어린 소년은 자기도 원치 않는 사이에 부모의 성행위 장면, 즉 한없이 쾌락 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그 행위를 보고야 말게  되었고. 그에게는 그게 하나의 원죄이자 대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고통은 열일곱 소년의 머릿속을 지배할 만큼 강력하다. 한 번  타락한 천사가 다시는 천사가 될 수 없듯이, 핑키는 자기 자신을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간다. 어찌 보면 그레이엄 그린의 또 다른  작품 <권력과 영광>의 타락한 ‘위스키 사제’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왜 나는 잠깐이라도 천국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을까. 설령 그것이 브라이턴의 담벼락 사이에 난 조그만 틈에 불과하다 하더라도’(468쪽) 읊조리는 그를 지켜보노라면  처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변해요.” 로즈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를 봐, 이제껏 조금도 변한 적이 없잖아? 그건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 같은 거야.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막대 사탕 말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인 거야.” (409쪽)

“나는 적어도 네가 모르는 것  하나를 알고 있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지. 그건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여자 말이 맞았다. 그 두 단어는 로즈에게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했다. 그 두 단어의 맛은 더 강렬한  음식인 ‘선과 악’에 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여자는 자기가 모르는 선과 악에 대해서는 로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로즈는 핑키가 악하다는 것을 산술적인 수학처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 핑키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411쪽)


살인을 저지른 핑키는 분명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서도 그릇된 행동을 했으며, 선과 악으로 판단해서도 악이다. 로즈 또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핑키라는 인물은 악(惡) 그 자체일까. 그토록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아이다는 선(善)을 행한 것일까. 한때  사제를 꿈꿨던 타락한 천사 핑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두컴컴한 조그만 고해실’이나  ‘신부님 목소리’,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분홍빛 유리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등불 앞이나 조각상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흐릿한 향수에 젖어들고, 그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이런 핑키에게 조금의 선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천당과 지옥이라는 두 개의 영원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피폐한 영역’이다. 로즈가 아무리 자기를 사랑한다  해도, 사랑은 증오나 혐오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느낀다. 죽음조차도 그렇다. 그렇기에 로즈의 애정도 그에게는 구원이 될 수 없다. 

신부님은 로즈에게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 말하면서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악마와 더 많이  접촉하는 것” 같다고 한다. 핑키는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을 지녔었기에 가장 나쁜 것으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만일 ‘그 짓거리’를 보는 대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그 짓거리’를 목격한 그 일 자체를 그토록  죄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삶이 조금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자기에게 내려진 한 치의 오점도 허용하지 못했기에 그는 그토록 타락하고  만 것은 아닐까. 핑키의 그 부서지기 쉬운 순수에는 분명 ‘어떤 선한 것’이 있었으리라. 구원과 지옥의 형벌을 믿었던 핑키는 어쩌면 그래서 신의 자비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정의를 이룩해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다를 지켜보노라면 세상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어쩌면 참으로 편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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