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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Sep 17. 2021

우리 머릿속 경계선을 지우는 이야기들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경계선>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경계선》을 쓴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저 먼 스웨덴의 백인 남자가 나는 왜 궁금해지는 걸까?  시작은 <렛 미 인>이다. 나는 아직 책은 읽지 못했다. 오리지널 영화를 보고 이 작품에 홀딱 반했다. 다락방 님처럼  뱀파이어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뱀파이어도, 호러/공포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렛 미 인> 영화도  개봉 후 한참 지나서 봤다. 그런데 이 영화는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단순히 뱀파이어물로 정의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왕따 소년과  그에 못지않은 왕따(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속할 수 없는) 소녀의 우정 또는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렛 미  인>의 원작자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이 작품을 ‘자전적’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뱀파이어일 리는 없고(아닌가? 혹시  정말 그런가? 알라딘 작가 소개란에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좀 그렇게도 보인다), ‘자전적’이라고 말한 까닭은 아마도 그 자신이  유년기에 왕따 소년 ‘오스카르’에 가까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십 대 때부터 거리 마술쇼를 선보였고, 마술사로 활동하며 북유럽 카드 트릭 챔피언십에서  입상’하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평범하지는 않다. 조금 유별나고 독특해서 사람들에게 이상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렛 미 인>도 처음에는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고 출판사 여덟 곳에서 거절을 당했단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나처럼  영화로든 원작 소설로든 만나본 이들은 그 독특하고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가는  틀림없이 소외가 무엇인지, 차별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경계선》에서도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은 여전하다. 그중 표제작인 <경계선>은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이 작품도 2018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2019년엔 국내에서도 개봉해 화제가 되었던 듯하다. 작품은 ‘티나는 사내가 나타나자마자 뭔가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티나는 스웨덴의 카펠셰르 항구 출입국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밀수품을 귀신 같이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티나는 이 문제의 사내, 즉 ‘보레’가 나타나자마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내는데, 아무리 그의  짐을 수색해도 밀수품은 찾아낼 수가 없다. 단 하나 기묘한 게 있다면 ‘벌레 부화기 상자’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이상한 남자는 짐  수색을 마친 뒤 출입국을 떠나면서 티나에게 ‘또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그녀 뺨에 슬쩍 입맞춤을 하고는  유유히 떠난다. 티나는 무슨 짓이냐면서 화를 내지만 참 이상하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티나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큰돈을 벌고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걸 마다하고 외딴집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롤랜드’라는  남자 친구도 있지만 이름만 남자 친구일 뿐 그는 티나에게 기생해서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 둘은 섹스도 하지 않는데 언젠가 한 번  시도했다가 티나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성관계를 전혀 하지 않는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티나는 롤랜드에게  다른 여자랑 하고 와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롤랜드는 주기적으로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오고, 티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사실 티나는 지나치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학교 졸업파티에서  쿵짝이 잘 맞았던 남자애로부터 “너랑 다 똑같은데 얼굴만 다른 여자랑 사귀고 싶다.”는 엿같은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고, 그 이후로 사람들과의 정상적 교류를 거의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롤랜드가 나타났고, 티나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기에 거의 체념 상태로 그가 남자 친구라는 이름 아래 자기 집에  하숙하는 걸 내버려 두고 있다. 혐오스러운 외모로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설상가상으로 티나의 직업은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더 부채질한다. 마을 주민이 은밀히 갖고 들어오는 밀수품을 족족 잡아내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법대로 처벌하니, 티나는 그야말로 ‘세관에서 일하는 마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보레’ 이 기묘한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고는 ‘또 볼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로 티나는 이 남자를 문득문득 떠올린다. ‘틀림없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그 숨기는 게 뭘까? 라는 궁금증도 있지만 실은 그 남자에 대한 기묘한 끌림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그의 겉모습이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호감은커녕  티나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이다. 땅딸막한 근육질 몸, 넓적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수염과 짙은 눈썹 등 지나치게 남자다워  보이는 과장된 남성성이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한다. 그런데 티나는 그런 그에게 자기도 모르게 끌리면서, 묘하게 동질감까지 느낀다.  단순히 자기처럼 외모가 혐오스럽기 때문일까?


얼마 후 보레는 다시 항구에 나타나고, 이번에는 그의 비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겠다고 굳게 다짐한 티나는 그를 또 불러 세운다. 여전히 뭔가 수상쩍다. 아무리 짐을 샅샅이 뒤져도 지난번의 그 벌레 부화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게 눈에 띄지 않자,  티나는 남자 동료에게 그의 몸을 수색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잠시 후 티나 앞에 나타난 남자 동료는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당신이 조사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이윽고 그가 또 말한다. “저 사람은 여자에요. 가슴도 나왔고… 성기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엉덩이 바로 위 꼬리뼈 부근에는 커다란 흉터도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아니 그 못생긴 남자가 사실은 여자라니, 티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렇게 남자다운 남자가 여자라고?! 몸수색을 마치고 어리둥절해하는  티나 앞에 선 보레는 조금 수줍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난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티나는 보레를 향한 기묘한 관심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보레가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나 또한 한방 먹은 듯 티나처럼 아니 뭐라고 띠용?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띠용?’이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후 계속 이어진다. ‘띠용?’ ‘띠용?’ ‘띠용?’ ‘띠용?’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해 준다. 남성다운 외모를 하고 있다는 묘사만 읽고 자연스레 보레를 ‘남자’라고 단정한 나의 이 몹쓸 편견이여! <경계선>은 이렇게 여러 번 젠더와 인종에 관한 사람들의 편견을 무너뜨린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견고하게 쌓아 올린, 머릿속의 ‘경계선’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게  우리 머릿속의 경계선을 지우는 데 일조한다. 이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 ‘다른’ 존재들,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 정의 내리고,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 존재들보다, 그런 이들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인간들의 머릿속 ‘경계선’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 경계선이 곧 인간 개개인의 삶을 ‘감옥’으로 만들고 ‘벽이 어디 있는지, 자유의 한계’(18쪽)를 더 또렷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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