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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Sep 27. 2021

용서와 화해는 누가 말해야 하는가?

비그디스요르트, <의지와 증거>




추석이 끝났다. 연휴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집안에서 가족들끼리 다툼과  화해의 과정을 거듭했을까. 서로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상처를 주고, 차마 화해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도 있을 테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화목하게 웃고 떠들다 헤어졌어도 마음속으로 서걱서걱한 감정의 골을 되새기고 있는 그런 가족도 있을  것이다. 물론, 드물기는 하겠지만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기쁘게 만나고 헤어진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집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가족 중 한 사람은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의지와 증거>의 가족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집안의 문제는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섯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상속 문제로 다툼 중이다. 부모가 죽고 나서 형제들끼리 상속 다툼을 벌이는 일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조금 이상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몇 주 동안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재산인 휴가용 오두막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를 놓고 격한 분쟁에 휩싸인 상태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오두막을 네 형제자매 중 셋째와 넷째  딸들, ‘아스트리드’와 ‘오사’에게만 상속하고자 한 것이다. 장남 ‘보드’도, 맏딸 ‘베르기요트’도 유산 상속에서 거의 배제된  상태이다. 이런 불평등한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나선 장남과 달리 베르기요트는 유산 상속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알고 보니 거의  20년 전부터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아왔던 그녀. 오빠 보드는 가족과 소원하기는 하지만 아예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  터라 이번 상속 문제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베르기요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장남과 맏딸은 어쩌다 가족과 그렇게 멀어졌을까? 형제 넷이 모두 부모와 연을 끊을 만큼 사이가 나쁘다면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 깊은 골이 있으리라 짐작할 텐데, 유독  위의 두 남매만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지, 책을 읽는 이들은 이 집안의 사정을 제 나름대로 헤아려 보게 된다. 나 또한 베르기요트의  일기와도 같은 글을 따라가면서 이 집안의 내막을 추리해 나갔는데, 한없이 이기적인 엄마와 종종 폭력적인  아빠의 모습에서 아마도  이 가족의 문제는 부모가 유독 위의 두 남매에게 큰 자식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아버지가  큰딸이나 장남에게 성폭력을 가한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일그러진 가족 모습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큰딸이나 장남에게 그런 일이 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렇다. 아버지는 큰딸이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성추행(폭행)을 해왔고, 그걸 알고 있을 거란 이유로 장남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사정이 이러니, 성인이 된 두 남매가 가족을  멀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가족의 추악한 비밀을 알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초반부터 누구나 짐작 가능할 만큼 그 어두운 비밀이 남긴 상처와 고통의 흔적은 베르기요트의 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기만의 일도 있고, 착하고 품위 있는 남편도 있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도 둔 그녀. 이런 평범한 외적 조건과 달리 그 내면은 위태로울 만큼 불안정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그것도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그런 자신에게 ‘난 어디가 잘못됐기에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반문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어서 그런지 인간관계 맺는 일에도 서투르고 겁부터 집어먹는다. 자기의 상처 때문에 남편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되는데, 유년기의 그 트라우마를 알게 되면 아,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언어도 완전히 결백하지 않다. (98쪽)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 베르기요트의 집안에서는 정말 그렇다. 이 집안의 문제는 아버지의 폭력에만 있지는 않다. 책을 읽는 내내 베르기요트의 어머니에게도 분노가 치솟는데, 이 어머니는 딸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는커녕 자기 삶을 즐기느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 아예 무관심했던 여성이다. ‘연약하고 맵시 좋은 여자’였던 엄마는 남편보다 열렬히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모든  애정과 관심은 그를 향해 있었고, 남편은 그런 아내 대신 ‘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 심지어 그 아내가 ‘제 몸으로 낳은 그런  여자’(165쪽)인 딸에게 성적으로 집착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둘 다 부모로서는 빵점, 아니 한 인간으로서도 빵점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베르기요트의 엄마는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자기를 보호하고자 묵인하고, 남편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유부남에게 빠져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때는, 어떤 정당한 근거를 찾아내려고 딸에게 혹시 네  아빠가 너에게 손을 대지 않았는지 묻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이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불안정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런데다가 큰딸이 가족의 이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거나, 주위에서 알아차릴만한 이상 행동을 할까 봐 부모 둘  다 노심초사 큰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다른 두 여동생들은 박탈감을 느끼며 그들 나름대로 상처 받으며 자란다. 아버지의 끔찍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부모에게 사랑받고자 성인이 되어서도 온갖 노력을 다 하는 이 두 여동생  또한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피해자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분명 베르기요트이다. 유산 상속 문제로 가족의 위선을 다시 맞닥뜨리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용기 내어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로 치부된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는 여전해서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양, ‘사악한 음모에 휘말린 비극의 주인공인 양 신파극을 쓰고 있다’. 엄마 진짜 속셈은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싶은’(25쪽) 것이다. 베르기요트는 애초에 이상한 아이였고, 지금 하는 말들도 그 이상한 아이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인권 운동가인, 아주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동생 아스트리드는 베르기요트에게 섣불리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 이제  상처는 잊고 가족을 위해 화해와 용서를 해야 한다고. 그러나 베르기요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상처를 제대로 꺼내 본  적이 없다. 이제야 드디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는데 오빠 보드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보드도 유산  상속 문제에서 저쪽 편이었다면 베르기요트에게 지지를 보냈을까? 어쩐지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화해는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발칸 분쟁에서 일했으니 그런 이야기는 영원히 낡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214쪽)
철학자  아르네 요한 베틀레센은 전후 진상조사와 화해 과정의 문제는 대체로 피해자에게 가해자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며 그 자체가  내재적인 불평등이라고 했다. 나는 이 명제를 종종 숙고하다가 우리 가정의 화해 과정 역시 엄마와 아빠, 내 동기보다 내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전후 진상조사와 화해위원회가 꾸며질 때는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누구이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그 점에서조차 합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나? (254쪽)


화해는 갈등 당사자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나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게다가 이런 일에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가해자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화합을 위해 굳이 다시 꺼내서는 안 될, 덮어두어야 할 이야기로 치부될 때가 더 많다. 게다가 그 진실은 종종 의심받기 일쑤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이렇게 처음부터 합의하기 어려운 불공평이 존재한다. <의지와 증거>는 한 집안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불평등 문제를 짚는 한편, 그 사이사이 발칸반도 문제나, 전후 피해자들의 문제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고통받은 사람들, 학대당한 피해자들의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한다. ‘학대는 학대당한 사람을 파괴하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고통은 누군가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면 강한 노력이 필요하다.’(268쪽) 베르기요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학대 경험을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게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의 말이 거짓이나 망상,  또는 연극 대본이 아님을 그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로 증언한다. 누군가는 결코 믿으려 하지 않더라도, 동의하지 않더라도,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고’(173쪽) 입을 열었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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