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 <세피아빛 초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다를 수 있는데, 나는 주로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중에서도 문학을 읽을 때, 종종 그런 강렬한 경험을 한다. <세피아빛 초상>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의미, 그러니까, ‘예쁘고 고운’ 세계에 가까워서가 아니다. 이 작품에는 분명 기만, 배신, 증오, 미움, 질투, 폭력이 존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러다 마침내 아름다움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인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한 그 무엇 때문에 끝내 ‘아, 아름답다’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도 여태껏 읽지 않았다. 후회한다. 나의 이 편견과 편식은 이렇게 나를 스스로 옭아매고 제한한다. 이 멍텅구리! 편견을 깨고 일찌감치 이 작품을 읽었다면 너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진작 알았을 테고, 그 아름다움의 바다를 유영하며 좀 더 행복했을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내가 지금에 이르러,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끽할 수 있을 나이에 이르러 그녀의 작품을 읽게 되어서, 그리고 앞으로 만날 그 세계가 더 많이 남겨져 있으므로…. <세피아빛 초상>은 <운명의 딸>, <영혼의 집>과 함께 이사벨 아옌데의 칠레 여성상을 대변하는 삼부작 시리즈라고 한다. <운명의 딸>-<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 순서로 읽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반드시, 꼭, <운명의 딸>을 먼저 읽고 읽어야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할 것 같다. 아옌데를 처음 만났지만 <세피아빛 초상> 한 권만으로도 문학이 줄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호사스럽게 누렸기 때문이다.
<세피아빛 초상>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이 작품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다른 이의 독서의 즐거움을 얼마쯤은 빼앗는 무례한 일이 될 것이다. <세피아빛 초상>의 맨 앞장을 펼쳐보면 가계도가 나온다(미리보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엘리사 소머스, 타오 치엔,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 크루스, 파울리나 델 바예, 럭키, 린 소머스, 마티아스, 세베로 델 바예, 니베아, 아우로라 델 바예, 디에고 도밍게스, 도나 엘비라, 돈 세바스티안 도밍게스 등등 익숙한 듯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어떤 관계는 결혼한 사이이고, 그 사이에 자식들이 이어져 이렇게 만나는구나, 한눈에 쓱 훑어볼 수 있지만 이 가계도를 보면 시작부터 조금 겁을 집어먹게 되기도 한다. 아니, 이 많은 등장인물이 얽히고설키는 거야? 엄청 복잡한 이야기인 거 아니야? 실제로 작품 초반에는 낯선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관계를 다시 따져보느라 가계도를 여러 번 펼쳐봐야만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이야기가 아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면서 더는 가계도를 보지 않게 된다.
복잡한 가계도를 맨 앞장에 소개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이 집안들, 그러니까 크게는 ‘델 바예’, ‘소머스’, ‘도밍게스’ 등등의 성(姓)을 쓰는 여러 집안, 그리고 그 집안 구성원 개개인의 이야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좀 더 중요한 사람이 있고 중요도가 덜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인 ‘아우로라 델 바예는’ <세피아빛 초상>의 화자로, 작품은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아우로라의 외할아버지가 ‘타오 치엔’으로 이 특이한 성(姓)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중국인이다. 타오 치엔과 ‘엘리사 소머스’ 그들의 손녀딸인 아우로라는 어쩌다가 ‘델 바예’라는 성(姓)을 쓰는 처지가 되는지, 그녀의 출생과 성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실 아우로라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기는 하지만 중국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외모에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생아이다(독자는 어느 지점에서 알게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받은 큰 충격 때문에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깡그리 잊고 만다. 그런 그녀가 부와 권력을 주무르는 여왕 같은 할머니 ‘파울리나 델 바예’의 집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과 가계의 비밀을 퍼즐 맞추듯이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퍼즐 맞추듯이 과거를 훑으며 한 사람의 인생을 재구성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흐름에 있다. 소설은, 문학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야기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나에게 <세피아빛 초상>은 이야기의 힘, 플롯의 힘을 오랜만에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게다가 작가가 인물 개개인을 묘사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완벽하지 않다. 어느 한 부분, 또는 그 이상의 나약함과 모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훌륭한 사업 수완으로 델 바예 집안을 일으키다시피 한 파울리나는 오랜 외국 생활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고, 보수적이고 위선적인 칠레 사회를 숨 막혀한다. 하나뿐인 손녀에게는 그런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불가지론자이고 사회주의자이며 여성 참정론자’라고 밝힌 마틸데 피네다 양을 아우로라의 가정교사로 고용한다. 그 세 가지는 칠레 사회에서 어떠한 교육 기관에도 고용되지 못할 이유로 충분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인한 여장부임에도 아우로라의 과거에 대해선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성인이 된 아우로라가 지적했듯이 인습에 도전은 할 수는 있었어도 자신이 속한 계층의 편견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리나와 엘리사, 두 남다른 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타오 치엔이라는 어찌 보면 이상적(理想的)인, 평범하지 않은 중국인을 외할아버지로 두고, 피네다 양처럼 깨어 있는 여성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우로라에게도 모순은 엿보인다. 보수적인 칠레에서 자란 여느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만 아우로라가 처음 사랑(이라 믿은)에 빠지는 모습과 그 사랑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는 그녀가 그간 받은 교육과 환경이 충돌하면서 그녀는 끝내 전복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다. 아우로라는 주저하고 망설인다. 끊임없이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등 이 작품에서 여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먼저, 누구보다 강하게 드러내는 니베아는 또 어떤가. 남자들이 넓은 세상에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녀는 사랑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그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위대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계가 없던 그녀 자신에게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니베아는 왜 그렇게 많은 아이를 계속 낳았을까. 낳아야만 했을까. 그만 좀 낳으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물론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영혼의 집>의 주인공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 여성들이 지닌 강렬한 매력과 모순들을 지켜보노라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는 결함 있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이기에, 그래서 그들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 아옌데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피네다 양은 내 태생을 모른다고 맹세한 뒤 사람의 인생이란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220쪽)
사진은 한 사람에 대한 증거이자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정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기술이란 현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을 본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79쪽)
“빛은 사진의 언어이고 세상의 영혼이란다. 그림자 없는 빛이 없고 고통 없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지.” (281쪽)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그래서 혼란스럽고 때때로 악몽에 시달리는 아우로라 곁에는 훌륭한 두 선생님이 있었다. 가정교사 ‘피네다’와 사진을 가르쳐준 ‘돈 후안 리베로’가 그들이다. 그들은 보수적인 칠레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았고, 그것을 자신의 제자에게 전해준다. 아우로라는 그들을 통해 그저 단순히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노력과 고통으로 단련된 얼굴들’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초상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담아내는 법을 알게 된다. 인간의 기억은 허구이기 쉽다. 대부분은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430쪽) 어쩌면 아우로라의 이 기록조차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우로라는 사진과 글을 통해 불명확했던 자기 존재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 그리고 그 혼돈의 과거를 밝히는 일에 기꺼이 자기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직조한 자기의 초상, 집안의 초상,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초상이 비록 고통과 피가 얼룩진 세피아빛 초상일지라도 그것은 정직하게 그리고자 했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아우로라가 앞으로 카메라에 담을 모습들은 더 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걸어갈 길은 더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