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지 선녀탕은 서귀포시에 위치한 자연 풀장입니다. 태평양 전쟁시절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자폭 어뢰정 같은 무기를 숨기고 수영을 즐긴 곳이기도 하죠. 1968년에는 남파 간첩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6.25 전쟁의 포탄도 피해 갔던 한국 최남단의 제주도에 간첩선이 등장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죠. 이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선녀탕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동네 아이들의 수영장이었던 선녀탕이 매스컴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SNS에서 입소문을 타자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황우지 선녀탕은 외돌개로 향하는 올레 7코스 내에 있어서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들과 자주 찾아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올레길을 따라 서귀포의 습습한 바다공기를 거스르던 학생들은 선녀탕 안에서 유유자적 스노클링을 즐기는 관광객을 발견합니다. 장비 대여 업체가 곳곳에 천막을 치고 있고, 선녀탕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에는 관광객이 흘린 바닷물이 모여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쌤! 제발!..."
감질난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학생들의 애절한 표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씨는 덥고, 제주 바다는 푸르고, 사람들은 즐거워 보입니다. 몇몇 학생은 입맛만 다시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림의 떡이네요"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주차장으로 올라갑니다. 선녀탕을 200% 즐기지 못했지만, 선녀탕은 눈으로만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죠. 우물, 목욕탕, 크레이터를 닮은 황우지 선녀탕은 정말 선녀들이 다녀갈 것 같은 신비롭고 기이한 지형입니다. 선녀 설화가 없더라도 이곳은 참 많은 사연과 역사가 담긴 곳이죠. 몇 발자국 옆에 있는 외돌개에도 바다로 떠난 할아방을 그리워한 할망이 돌로 변했다는 망부석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쩌다 서귀포를 찾을 일이 생기면 선녀탕에 종종 들립니다. 사람이 없는 계절과 시간대의 선녀탕은 인적이 끊긴 여느 제주의 해안선과 다를 게 없죠. 카페는 모두 문을 닫았고, 좌판과 파라솔은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문을 닫은 카페 벤치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차지했습니다. 한철 장사를 끝낸 수영장에는 파란 하늘만이 담겨있습니다. 소란스러움이 사라지자 바람과 파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도민, 관광객, 외국인, 일본군, 북한군,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까지... 선녀 빼고 모두가 찾아오는 선녀 없는 선녀탕은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인간들이 스쳐 지나갔던 시대의 교차점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냉전이 찾아오고, 전쟁이 사라진 장소에는 다시 고무 튜브를 허리에 두른 아이들이 찾아옵니다. 저기 멀리 가녀린 전통배, 테우를 모티브로 세운 새연교가 보입니다.
이젠 선녀탕이 거대한 전골 그릇처럼 보입니다. 지도사의 입장에서 설명할 이야기는 참 많지만,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복잡한 맛을 가진 장소. 호기심이 사라지고 잡다한 정보로 가득 차버린 장소에서는 새로이 맛볼 즐거움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여행은 잘 모를 때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이것저것 신나게 물어보던, 학생들의 생기 넘치는 표정이 마냥 부럽기만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