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나 - 국지승
기계처럼 그림을 그리던 날들이었습니다. 길면 석 달, 짧으면 한 달 안에 그림책 여러 권의 그림을 마감해야 하는 시절이었어요. 보통 한 권에 16장은 그려야 하니 적어도 매일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해야 마감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그림이 어땠겠어요. 지금도 그때의 제가 그린 책을 누가 볼까 아주 무섭답니다(어디선가 저의 예전 책을 발견하신다면 부디 못 본 척 지나가 주시길). 그림은 엉망이어도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작업실 생활도 즐거웠고 주어진 시간 안에 적당한 그림을 차질 없이 그려내는 생활은 나름대로 성취감도 있었어요.
그날은 마감을 하고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을 읽었습니다. 그전에도 몇 번 읽었던 책이었지만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느릿하게, 나른하게 아침이 찾아오고 두 사람은 낡은 배를 물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고즈넉이 나아갑니다. 한순간 산과 호수는 초록이 됩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다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 셋 꽃다발 셋』 채색을 앞두고 세련되고 멋지게 그리고 싶어 고민이 깊었습니다. 오랜만의 출간이라 아주 잘하고 싶었거든요. 몇 장을 망치고 드디어 볼만한 그림을 그렸다 생각했지만 그 그림은 거짓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부끄럽고 답답했던 이유는 그럴법한 거짓말을 그렸기 때문이란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건 저에게 아주 발전적인 깨달음이었어요.
더 이상 기법이나 기교에 숨어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니 어딘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엄마 셋 도시락 셋』 『바로의 여행』 『아빠와 호랑이 버스』까지 작업을 이어가며 점점 책이 나와 닮아가는 걸 느낍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담지 않아도 나답게 이야기를 하고 독자들과 나눌 수 있게 되어 즐겁습니다. 아직 멀었을지 몰라도 조금은 내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습니다.
『돌랑돌랑 여름』은 코끼리 가족의 남쪽 끝섬 여행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엄마 코끼리는 여행지에서 일어날 혹시 모를 일들이 걱정돼서 잔뜩 짐을 꾸렸고 아빠 코끼리는 여행까지 왔지만 회사 일로 머리가 복잡하고 불안합니다. 걱정과 불안을 달고 도착한 남쪽 끝섬은 다정하게 코끼리 가족을 맞이해 주어요. 공기는 온화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바다는 다정하고요. 하루를 느리게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여행 가방 안에 따라온 걱정과 눈썹 사이에 붙어있던 불안은 어느새 사라졌지요. 단순한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창작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캐릭터의 성격과 상황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걸 좋아합니다. 운이 좋으면 제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만나게 되고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거든요.
제주도라는 여행지를 정하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았습니다. 코끼리 가족의 모자가 세찬 바람에 몽땅 날아가는 것도 코끼리 가족이 하나가 되는 찰나의 순간도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제주도 바람만을 상상하며 자유롭고 평온한 마음으로 즐겁게 그렸습니다.
‘이렇게 심심한 이야기를 좋아해 줄까?’ 걱정과 달리 많은 분이 이 책을 읽고 행복하고 편안해졌다는 기분 좋은 답장을 주셨어요. 책을 펼치면 잠시라도 여행을 떠난 듯 홀가분하고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아 몹시 기뻤습니다.
제게 그림책은 남쪽 끝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짓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 오랫동안 헤매다 겨우 다다른 아름다운 남쪽 끝섬. 남쪽 끝섬에서 오래도록 다정한 편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잘 받았다는 답장을 기다리면서요.
국지승_그림책작가, 『돌랑돌랑 여름』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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