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새벽 <그 여자의 소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없는 국가의 역사란 없으련만,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과 전쟁, 격변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민중의 역사는 무엇으로 쓰였을까. 한데, 그 역사 속 민중의 얼굴은 누구인가. 혹은, 자명한 것으로 읽혀온 역사는 어떤 사람(Man)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극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여인의 모습을 조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레이션과 함께 거슬러 올라간 시점은 일제 강점기. 조춘 엄마가 김씨(임규한 분)네 씨받이로 들어가 작은댁(김다애 분)이 되는 장면이다. 김씨는 본처인 큰댁(정선욱 분) 간에 아들을 얻지 못한 모양이다. 작은댁의 남편은 독립운동하러 가고, 시아버지와 딸 조춘(유믿음 분)을 길러내 왔다. 가문의 성을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여성이 교환 가치로 여겨지며 남의 가정에 귀속되는 일(들). 홀로 지내는 여성은 일제 수탈의 대상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 말해지는 비극적 역사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가정이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며 공동체의 역사가 비극으로 말해진다면, 비극의 역사는 누구의 얼굴로 쓰였는가?
작은댁은 아들만 낳아주고 김씨네를 뜨려 했으나 오랫동안 태기는 없고, 날로 심해지는 수탈에 김씨네 살림도 이전 같지만은 않다. 큰댁은 귀분네(최지선 분)와 궂은일 마다 않고 살림 꾸리기 바쁘고, 작은댁은 귀한 아들을 밸 몸이라며 노동에 참여할 기회도 없는데 밥만 축낸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마침내 태기를 감지한 작은댁의 걱정은, 태아가 아들이 아니면 어찌해야 할지다. 작은댁은 김씨네서 무사히 아들을 낳지만, 김씨는 작은댁을 놔줄 생각이 없다. 김씨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그 여자가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이 없다.
해방마저 도둑처럼 찾아오고, 독립운동 나갔던 조춘 아버지(정범진 분)는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오지만 김씨네 둘째를 밴 작은댁을 ‘되찾아’ 올 수 없다. 조춘 아버지는 작은댁이 김씨네로부터 씨받이의 대가로 시댁에 넘긴 땅문서를 그녀에게 돌려주지만, 작은댁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작은댁은 조춘에게 땅문서를 물려줄 때까지 문서를 땅에 묻어두기로 한다. 조춘 아버지는 그 여자를 떠나며 곱씹는다. ‘착한 사람’ 이라고.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일 때나 ‘착한 사람’으로, 역사는 지면을 허락하는가.
역사는 흐른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리고 역사라는 이름의 무대로부터 가려진 얼굴들의 삶 역시 흘러왔다. 얼굴과 삶이 가려진 만큼, 겪어온 차별과 고통, 부조리 역시 가려진 채. 식민지배 시절에도, 해방공간에서도, 전쟁통에도, 시대의 격변하는 굴곡 그 어디에서나. 가려진 삶조차 위태로울 적에는 숨어들고, 삭히고, 침묵해야 했던 것이야말로 비극적인 역사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비게 된 큰댁의 자리를 대신하는 작은댁을 한 여자가 찾아온다. 혼사를 알리러 온 조춘이다. ‘모진 어미’가 되어버린 작은댁은 조춘의 혼례에 참여할 면목이 없다. 이를 짐작했던 조춘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물러나려 한다. 작은댁은 묻어뒀던 땅문서를 파내어 조춘에게 건넨다. 여자가 재산을 소유해 무얼 하냐며. 조춘은, 자신은 여자가 아니냐고 어머니에게 되묻는다. 결국 조춘은 땅문서를 받지 않는다. 그저 마음만을 받을 뿐이다. 그것은 진정 조춘이 자신의 삶을 가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자식에게 헌신하며 물려주도록 놔두지 않는 것, 그 여자가 자신의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을 해방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조춘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언어가 ‘남편의 견실함’ 밖에 없다는 먹먹함은 묵직하게 대물림된다.
작은댁은 가부장적인 김씨에게 시달리다 도망을 나오기도, 결국 풍으로 넘어간 김씨의 노년을 동반하기도 하며, 우리가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그 여자(들)의 이야기’가 되어온다.
연극의 제목은 어째서 <그 여자의 소설>일까. ‘그 여자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어머니’이면서, ‘그 여자의 할머니’이면서, ‘그 여자의 딸’이기도 하며, 혹은 ‘그 여자’의 이야기가 ‘이 여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이 여자는 나나 당신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성차별은 물론, 많은 부조리와 처벌되지 않는 범죄들이 있다. 역사나 사회, 이분법적 성별과 제도가 비극적으로 구성해온 것들이 상식과 규범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의 사회로 이어진 역사의 욕망은 어떻게 그것을 당연한 것들로 견고하게 다져왔는가? 혹시 외면된 역사나, 무대가 조명하지 못한 배우나, 소설로서 이야기되는 삶 같은 것은 없었는가?
만일 이것이 소설로만 읽혀지는 시대가 된다면, 그 시대는 희극적인가, 비극적인가.
적어도, 연극으로서의 <그 여자의 소설>은 故 엄인희의 <작은 할머니>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극단새벽은 이 작품의 티저를 유튜브에 공개하여 홍보한다. 이 티저의 주인공은 오늘날의 여성이다. 어머니와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시선은 소설책을 관통하기도, 바깥세상을 관통키도 한다.
한편, 여성 서사로 읽히는 <그 여자의 소설>은 그 무대와 극장에서 남성 관객을 배격하지 않는다. 특히나 조춘 아버지의 선량함은 일말의 가능성이지만, 그들이 무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은 이중적 비판으로서도 기능한다.
코로나의 창궐은 재난으로서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비극의 현장은 예술계, 무대를 비껴가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이 절실한 인간성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듯, 예술이 무너져갈 때 예술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극단새벽의 연극 <그 여자의 소설>은 무대가 떠나버린 코로나 시국에, 무대를 회복하기 위한 고민이자 시도이다. 무대예술은 관객이 없다면 그저 실연이다. 극단새벽은 <그 여자의 소설>을 미리티켓&후원과 [문화예술&청년과 어깨걸기 프로젝트]로 부산지하철노동조합에서 청년을 위해 마련된 50석과 함께 무대를 만들고 있다.
<그 여자의 소설>을 비롯하여 코로나로 인해 떠나버렸던 부산의 무대가 하나, 둘 되돌아오고 있다. 소극장 연극에서 관객보다 스태프가 많은 일화는 종종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 이마저 여의치 않은 시국이다. 무대의 회복을 위해서는 예방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소독을 비롯한 질병 예방수칙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시국아, 손 털고 발 털고 후딱 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