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늦을수록 좋은 줄 알았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라기보다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진짜를 써야 하는 일일 텐데 지금의 나를 빼고는 나의 글들이 어쩐지 가짜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이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난해 10월 남편이 나를 두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온통 그를 보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떠나지 않는 그를 불러내고, 괜찮은 것처럼 나를 포장하며 애써 모른 척했다.
누군가 이제 좀 괜찮으냐고 물으면 많이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아닌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나는 진짜 괜찮은가? 하고 깜빡 속을 뻔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결코 괜찮은 일은 아니다.
오래 아팠고, 오래 준비했고, 혼자 연습도 했고, 떠날 사람을 두고 아들과 둘이 살아갈 미래도 상상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내게 닥친 현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얼마를 준비했고, 얼마나 객관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별에 대해 무심했다.
아마도 나는 이별이 늦을수록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스럽고 계속 괜찮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지도 몰랐다.
그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나는 이런 나를 글로 쏟아내지 않고는 절대로 다른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버렸다.
남편은 결혼 후 3년이 지난 여름에 만성신부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물 치료를 했지만, 결국 투석을 하게 되었고, 투석한 지 2년 만에 폐암이라는 진단을 더 받아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는 동안 남편이 느꼈을 패배감과 우울감을 지켜보면서 나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우린 우리의 일상을 살아내자. 남들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서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을 특별하지 않게 보내자."
이 말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인지, 깨달을 수도 없는 고통과 상실이 그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어차피 2인칭의 존재인 나는 다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감히 알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 그를 남겨두고, 내 멋대로 그의 고통을 해석한 것 같아서
지금의 나는 많이 아프다.
후회라고 하는 것도, 한껏 꾸민 말처럼 담백하지 않게 들리는 것 같아 이 말 또한 할 수가 없다.
긴 고통 속에서 그는 10년 가까이 살았고, 누구에게도 감정을 드러냄 없이
내가 말한 것처럼 일상을 살아냈으며,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했고, 우아했고, 그의 죽음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들이 맞은 특별하지 않은 매 순간들을 그는 나의 말처럼 잘 살아내 주었었다.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그 마지막으로 인해 내가 겪고 있는 가슴속 진짜 파동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는 신파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는 그리움이라는 말로 정의 내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별해야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라고 하고 싶다.
열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떠나는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온전히 다 살아내지 못한 남자의 후회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로 인해 얻은 삶의 가치와 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완성시켜 준
그를 향한 감사의 인사로 정의하고 싶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았던 12년 동안 사랑한다는 말은 말고,
고맙다는 말을 정식으로 한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부부처럼 사랑하고 웃고 투닥거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가 결국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내가 느낀 이 감사의 마음을 과연 그에게 정식으로 전한 적이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 글들을 통해 진짜의 감사를 전하고, 진짜 이별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이별을 이제 진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