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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Sep 26. 2024

삶의 (찌질한) 주인

0. 들어가며 : 들어가기도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산책. 의식적으로 시작된 몇 번의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기계적인 무수한 발자국들을 거쳐 어느 순간 급작스레 끝나는 과정. 삶을 닮았다. 독서, 직장생활, 연애, 수다... 이런 것들은 생기를 지닌 채 의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적으로 익숙해지며 우리는 다소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이어가고는 했다. 기계적인 상태로 접어들면, 관성을 저항하기는 어려웠고 나는 그저 그 레일 위를 걷게 될 뿐이었다.

 가끔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들은 늘 인생의 관성을 저항해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관성이 작용하는 순간 그것을 끊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예술가를 질투하고 동경하면서도 늘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기만 하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딛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나는 연인과 권태가 심하게 찾아와도 그저 극복해 내려 애쓴다.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임에도 섣불리 옮기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삶의 주권을 가진 존재라고 숱하게 들어왔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삶의 거대한 흐름을 통제하지 못했다. 내가 삶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삶이 흘러가며 발생하는 거대한 관성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찌질하다.

 그러므로,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은 삶에 저항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의 기저에 늘 미묘한 슬픔이 깔려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저항은 결국 이별과 상실을 수반하기에, 나는 저항하기를 늘 주저하고 타협한다. 그런데 찌질한 주인도 있지 않을까? 내가 겨우 해내는 저항은 찌질하고 소소하다. 이별도 상실도 필요 없는 저항. 이를테면, 퇴근 후 멍한 상태에서 하얀 모니터를 켜는 것. 어렵게 한 문장을 적는 것.

 삶을 사는 , 백지  글을  내려가는  모두 산책을 닮아 있다. 이것들을 낭만화하려는  아니다. 산책에서도 ‘기계적으로 걷는 상태 닮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것들은 내일이 오기에 반복되는 움직임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며 흘러가는 것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감지해 내려 발버둥  , 비로소 제대로 걷고, 쓰고, 살고 있는  같았다. 나는 용기는 없지만 욕심은 많은 사람이다. 스쳐 지나가는 직장인들  피로에 찌든 얼굴에 질투의 표정이 얼핏 비치는 얼굴, 그것이 요즘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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