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또 시작
2017년 마카오에서 촬영
K는 구급차를 타고 퇴원했다.
구급차는 큰길에 섰고 들것에 실려 주인집 마당까지 왔는데 문제는 가파른 2층까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골목과 마당을 꽉 채운 인파 속에서 너의 남동생이 나섰다. 매형은 내가 업어 모시겠다고. 하지만 힘에 부쳐 계단참에서 교대해 오 선생이 방까지 업어다 주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너는 서둘러 막내에게 젖을 물렸다. 막내는 무척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네가 다시 물리자 도리질을 치며 손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수유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47일 만에 돌아온 집은 낙원이 아니었다.
병원보다 여러모로 불편하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보름 동안 막내 산후조리 해주러 왔다가 며느리 입덧한다고 닷새 만에 돌아갔던 너의 어머니였다. 힘들다고 가버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워낙 중차대한 일이다 보니 소리 없이 맘먹고 도와줘서 고마웠다.
집으로 오면서 윤 선생 동생한테 이틀에 한 번씩 한방 치료를 받았다.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K는 일어서기 연습을 시작했다.
K의 형수가 낮에 막내를 돌봐주기로 했다.
너의 어머니는 마음 놓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 시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씩 왔다.
시어머니는 병원에서 쓴 돈이 전부 얼마냐고 물었다.
“병원비 백십만 원하고 약값, 교통비, 식사비 포함해서 총 이백만 원 넘게 들었어요.”
시어머니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느 성이 맨날 밥 해다 날렀는디 뭔 식사비가 들어? 친정이 가난항께 전부 빼돌리고 시방 딴소리하는 거 아녀?”
너는 말없이 병원에서 기록한 수첩을 시어머니한테 건넸다.
다시 또 시작이었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딸을 낳고 시어머니 구박이 극에 달했을 때 너의 모습이 선했다. 이주일 간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부엌으로 나온 너는 여전히 절룩거렸다. 출산 때 찢어진 상처가 덧나서였다.
K는 장가가는 친구 결혼에 함진아비를 한다고 사흘간 순천에 갔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시어머니가 말했다.
“니가 오죽 맘에 안 들면 신혼인디 사흘씩이나 집에 안 들어오겄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가 마음 붙일 곳이 읎어서 날마다 밤이슬을 맞고 돌아 댕기다니 이대로는 도무지 안 되겄다. 너 내일 날 밝는 대로 농바리 처싣고 지저바 업고 친정으로 가거라.”
너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 왜 대답 안햐. K 오기 전에 나가라니께!”
자다가 써늘한 느낌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발치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K가 외박만 하면 이렇게 뭇 여자 만나고 다니다 어디서 애라도 낳아 오면 어떡할래? 하고 약까지 올렸다. 그 무렵 3년간 K는 사업하려다 사기를 당해 재산을 많이 날린 상태였다.
시어머니는 모든 분풀이를 너한테 하는 것이었다. 두 달도 안 지나 너는 갑자기 숨 막히는 증세가 나타나 극한의 고통에 시달렸다.
점심 설거지를 하려는데 부뚜막 구석에 무언가가 있었다. 작고 낡은 복주머니였다.
시어머니가 그곳에 놓고 깜빡 잊은 것 같았다. 뭔지 모르지만 방으로 가져가기도 그렇고 부엌에서 잊었으니 부엌에서 찾겠지 싶어 성냥갑에 넣어 찬장에 보관했다.
그때 마침 K의 형수가 왔다. K의 형수는 목마르다고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다 성냥갑 안에 있는 복주머니를 들고 이게 뭐냐고 물었다.
“부뚜막 구석에 있길래 어머니 교회에서 오시면 드리려고 거기다 뒀어요.”
K의 형수는 얼른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어머, 금반지잖아! 동서도 참 그렇다. 이렇게 귀한 걸 찬장에 두면 어떡하냐?”
너는 아무 잘못 없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동서는 복주머니를 들고 교회로 시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저녁나절 서슬이 시퍼런 시어머니가 대문을 들어섰다.
기저귀를 걷던 너는 앞이 캄캄해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시어머니는 너한테 빨리 따라오라고 했다. 틀림없이 복주머니 문제일 것이다. 눈을 감고 헉헉거리는데 시어머니가 빈정거렸다.
“뭘 잘못했는지 아능 갑지? 발짝도 못 띠는 걸 봉께!”
너는 간신히 숨쉬기를 되찾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가 소리쳤다.
“하다 하다 인자 도독질꺼정 하냐?”
네가 깜짝 놀랐다.
“다락 깊숙이 묻어둔 내 반지를 니가 훔쳐다 찬장에 감췄다매?”
“부뚜막 구석에 있길래 성냥갑에 넣어 찬장에 둔 거예요!”
“긴말 필요 읎다. 가족회의 열어서 갖은 챙피 다 당하고 나갈래 아니면 이 질로 그냥 조용히 나갈래?”
시어머니가 놓은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었다.
너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K가 집에 없으면 사업하다 사기당한 게 아니라고 했다. K가 그 돈 전부를 가난한 너의 집에 가져다 바쳤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도둑질까지 했으니 가족회의조차 필요 없다고 당장 친정으로 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