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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권리

22. 너 없는 사이

by 글마중 김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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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노이드 : 2025년 10월 8일 컴퓨터 바탕화면


너는 비로소 사회인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모지에서 급성장한 우리나라였다. 단기간에 선진국이 되면 몇 가지 후진국 특성이 남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상담문화였다. 상담은 정신과 병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편향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을 정도였다. 상담학이 학문적으로 자리 잡은 건 1978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그때부터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고 상담센터 등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불타는 투지에 비해 상담센터 업무는 지극히 단순하고 한가했다.

융통성 없고 성실하기만 한 너는 한가하면 책을 읽고 글도 썼다.


근무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사정이 급변했다.


상담사가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센터장 대신 네가 상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가끔 있는 일일 테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가끔이 아니었고 센터장한테 긴급하다는 전화를 받으면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몇 시간씩 근무했다. 근무 외 수당 한 푼 없이.


네가 그만두려고 주춤거리면

K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담자의 성별과 연령대와 직업과 고민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양했다. 연장근무가 대다수가 돼버리자 몸이 힘들고 의도적으로 상담사를 괴롭히는 내담자가 많아 마음은 더 지쳤다.


하루에 한둘

희망을 찾는 내담자가 있었다.

그 벅찬 보람이 너의 발길을 센터로 이끌었다.


너는 몰랐다.

너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네가 밤늦게까지 내담자의 고민을 들어줄 때 K는 아이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공포에 떨게 했다.

명분은 언제나 좋았다. 올바른 사람 만들기와 성적 향상이었으니까.


밤 10시 퇴근해 늦은 저녁을 먹으면 아이들이 수저를 들고 밥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그 시간이 사무치게 행복했다. 그때마다 K가 소리쳤다. 아까 저녁 먹었으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이 시시덕거리며 앉아있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했지만 물러터진 너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말에 반격도 하지 못하고 K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웃들이 조심스럽게 너에게 말했다.


K가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때린다고! 네가 격분해서 아이들 때리지 말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면서도 조심했다. 하지만 네가 없으면 더더욱 심한 폭행을 가했다.


너는 질 높은 상담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30년 근무한 너는 수많은 상패와 자서전을 안고 영광스럽게 퇴직했다. 직업인으로도 성공했고 가정도 잘 이끌었다며 너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가끔 K와 소풍 가고

부부 동반 모임 네 군데 참석하고

친구들과 만나 식사하고

한 달에 두 번 봉사하고

본격적으로 상담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너는 이상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가족 상담사인 네가 나타났다.


낯선 상담사인 너는 날카롭게 너한테 질문했다.

“K가 병난 뒤 너를 한 대라도 때렸다면 어떡했겠니?”

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K와 당장 헤어졌을 거라고.


낯선 상담사인 네가 비웃었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은 죽을 만큼 얻어맞아도 가만히 있었다고?”


너는 흠칫 놀랐다.


낯선 상담사인 네가 거침없이 말했다.

"물론 몰랐다고 핑계 대겠지. 몰랐다고 용서받을 수는 없어. 모르는 게 죄일 때가 훨씬 많으니까. K는 심적으로 힘들거나 너한테 불만이 생기면 무조건 아이들한테 화풀이를 했던 거라고. "


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너는 입만 열면 아이 셋 낳은 게 자랑스럽다고 떠벌이더라. 낳기만 하면 뭐 하니 잘 키우지도 못했으면서? 이 세상에 너처럼 이기적인 엄마는 없을걸? 폭력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거야. 너는 엄마가 아니라 살인 방조자였다고. 오죽하면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고 했겠니? 어떤 이유로든 아이들한테 손댄 그 자리에서 K와 이혼했어야지!”


너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몇 달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K 병나고 40년 지난 뒤에

상담사인 너를 통해 겨우 깨닫게 된 것이었다.


세 아이는 영혼까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장년층에 이르렀다.


다 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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