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관계에 지쳐있고 새로운 관계형성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행동하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최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 공간 속 나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 소위 말해 무례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중요시 여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거리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각자의 공간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이 공간을 침범하면, 그때부터 둘 사이에 호감보다는 적대감이 크게 나타난다. 이 거리는 친구사이 뿐만이 아니라 학교의 학생과 교사 사이에도 나타난다. 누가 요즘 담임선생님을 ‘은사님’이라고 부를까? 오히려 비하하는 단어를 쓰면 썼지, 좋은 단어로는 불리지 않는 경우의 교사들이 많다. 교사들도 자신들이 나쁘게 불리는 것에 대해 모를 리가 없고, 학생들 일에 이리저리 불려 다녀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싫어 차라리 학생들의 일에 신경을 끊는다. 교사가 학생들의 일에 관심을 끊으면 자연스레 학생들 또한 교사와의 관계형성에 소극적이다. 인간관계에 지쳐있는 현재의 교사와 학생, 둘 사이 관계는 그것이 다이고, 이것이 ‘은사님’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이유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려면 어느 정도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자신 또한 상대방의 공간에 들어가야 하지만 새로운 관계 형성에 소극적이고 각자의 공간만을 주장하면서 멀리 서로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좋게 말하면, 각자의 공간을 독립적으로 유지하고 그 독립성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우리는 소위 말하는 ‘예의바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에 ‘지쳐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그에 대해 감정을 소비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나또한 지쳐있고, 굳이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남의 공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상대방의 공간에 예고 없이 들어가는 무례한 사람이 될 바에는, 각자의 공간에 선을 넘지 않으면서 듣기에는 좋은 예의바른 사람이 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낯섦으로부터 설렘은 없어지고,
익숙한 것만 추구하는 우리들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