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에른스트 <똑딱 소리를 내는 작은 눈물샘>
작품의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클까요? 위 작품의 제목은 ‘똑딱 소리를 내는 작은 눈물샘(La Petite fistule lacrimale qui dit tic tac)’입니다.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의 그림이지요. 작품에세이 연재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바로 이 그림이 되었네요.
제가 처음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보기 전에, 그림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림 외적인 것들은 뒤로하고, 그림 자체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같은 패턴을 가진 채 반복되는 다섯 개의 기둥입니다. 오르간의 파이프 같기도 하고, 독특한 모양의 스피커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나무줄기 같기도 하네요.
기둥들은 나란히 나열되어 있지만 모든 기둥의 길이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왼쪽부터 1, 2, 3, 4, 5번 기둥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을 때, 3번 기둥과 5번 기둥의 길이가 1, 2, 4번 기둥의 길이보다 짧습니다. 두 기둥은 마지막 패턴이 모두 그려진 1, 2, 4번 기둥과는 달리 마지막 패턴의 중앙 즈음까지로 잘리어 있죠. 그리고 5번보다는 3번 기둥의 길이가 더 짧은 듯합니다.
이렇게 기둥의 길이를 다르게 함으로써 에른스트는 다섯 개의 큰 직선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평면적인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합니다. 그림 사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 본다면 저의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을 위아래 반으로 나누어 그림 아래쪽을 손바닥으로 가려 보면 정말 입체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림으로 보입니다. 반면 그림 위쪽을 손바닥으로 가려 보면 분명히 1, 2, 4번 기둥은 돌출되어 있고 3, 5번 기둥은 쏙 들어가 있는 입체적인 그림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아마 두 파란색 부분일 것입니다. 한 파란색은 그림의 왼쪽 위에, 한 파란색은 그림의 가운데 아래에 있네요. 두 파란색은 단절되어 있는 동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모순적인 설명이냐고요?
왼쪽 위에 있는 파란색은 물레방아 바퀴 모양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아래에 있는 파란색은 흐르고 있는 물줄기 같아 보이네요. 이 물줄기는 뒤로 푹 꺼져 있는 3번 기둥과 연결되어 그림 하단부에 입체감을 한층 더하면서, 감상자 쪽으로 흐르는 듯해 보이는 효과를 일으킵니다.
처음에 제가 이 그림에 있는 기둥들이 ‘파이프’ 같아 보인다고 말씀드렸지요? 적어도 3번 기둥은 파이프가 맞는 듯합니다. 그림 상단부에 있는 물레방아를 거쳐 간 물이, 3번 기둥을 통해 흘러내려, 감상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물길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단절된 듯한 물레방아와 물줄기는 파이프를 통해 보이지 않게 연결됩니다.
저는 이 작품을 단순히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작품은 그림인 동시에 서사가 담긴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에른스트가 이 작품에 붙인 제목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은 거창하게 설명한 것과는 달리 이 그림의 내재적 작품성은 출중하게 훌륭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빛나게 만든 것은 바로 ‘똑딱 소리를 내는 작은 눈물샘’, 작품의 제목입니다.
도대체 이 그림이 어디를 보아서 ‘눈물샘’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작품의 작가인 에른스트는 이 그림에 ‘작은 눈물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그림은 ‘눈물샘’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죠. 또, 그 눈물샘에서는 ‘똑딱’ 소리가 난다고 설명합니다. 그 순간부터 이 그림은 ‘똑딱 소리를 내는 작은 눈물샘’이 됩니다.
작품의 제목만큼 작가가 작품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작품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해석은 감상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작품의 제목만큼은 모든 감상자, 평론가, 작가 자신에게 동일합니다. 제목에 대한 작가의 힘은 바로 당신의 인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만 볼 때는 눈물샘은커녕 눈물도 떠올리지 못했던 감상자는 작품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부터 자신의 인식 속에서 물레방아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합니다. ‘똑딱’ 소리와 함께 말이지요. 그리고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감상자 쪽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다름이 아닌 ‘눈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보며 저는 김춘수 시인의 널리 알려진 시인 ‘꽃’의 일부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
이름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까요? 제 이름은 푸름입니다. 하지만 ‘ㅍ, ㅜ, ㄹ, ㅡ, ㅁ’이 글자들의 조합이 저의 알맹이와 동일시될 수 있을까요? 이름은 알맹이를 편하게 부르기 위한 껍데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껍데기인 이름이 달라진다고 하여 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푸름’이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푸름’이 되고야 맙니다. 껍데기인 이름이 저의 본질의 정체성을 안정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것이지요. 가재의 갑옷은 껍데기이지만, 그런 껍데기까지 함께 해야만이 가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제 이름과 함께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작품을 통해 에른스트는 어떤 것의 ‘이름’이 그것의 본질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끔 합니다. 사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에른스트는 그 누구보다도 작품의 제목을 통해 작품에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에 탁월했던 작가였습니다.
에른스트의 작품을 고민하며,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연관성, 자신 주변의 사물의 이름과 그 사물 자체의 연관성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림 바깥에 왜 여백이 있을까?
이 그림은 (아마도 에른스트의 집의) 벽지를 떼어내어 그 위에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즉 삐뚤빼뚤하게 떼어진 벽지에 에른스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큼만 그린 것이고 그래서 여백이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의 제목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 <흰나비 사냥에 나선 33명의 소녀들 Thirty Three Little Girls Set Out For The White Butterfly Hunt>
- <나이팅게일의 위협을 받는 두 아이들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
- <빅 브라더: 살인자들의 학교를 위한 교수진 Big Brother: Teaching Staff for a School of Murderers>
등이 있습니다.
*작품 정보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 <똑딱 소리를 내는 작은 눈물샘 La Petite fistule lacrimale qui dit tic tac>, 1920, Gouache, pencil, and ink on printed wallpaper on board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