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d City> @ 세화미술관
흥국생명빌딩 3층에 위치한 ‘도심 속의 미술관’ 세화미술관에서 ‘도시’를 주제로 한 전시 [Solid City]가 진행 중입니다! 총 아홉 팀/개인 작가가 작품을 선보이며, 2021년 8월 31일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화미술관의 전시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는 없습니다.
세화미술관에 가본 적이 있다면 쉽게 공감하겠지만, 세화미술관은 정말 문자 그대로 ‘도심 속의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이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자리, 한 거대 보험 회사의 고층 빌딩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미술관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세화미술관을 찾게 된다면 ‘정녕 이곳이 미술관 입구란 말인가요?’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화미술관이기에, ‘도시’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세화미술관과 잘 어울릴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번 [Solid City] 전시는 세화미술관에서 ‘도시’를 주제로 선보이는 세 번째 전시로, 지난 2018년에는 [Wonder City] 전시가, 2019년에는 [Phantom City] 전시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리자면 이번 [Solid City] 전시는 3~4개월 전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된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전시와 함께, 현재까지 올해 제가 다녀온 18개의 전시 중 최고의 전시였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관객이 작품과 소통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은 전시라는 점이 이번 [Solid City] 전시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듯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특히나 매력적인 작품들을 위주로 세화미술관의 전시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설명은 미술관의 작품 설명에 기반한 제 해석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설명을 듣고 궁금한 작품이 생겼다면, 꼭 미술관에 방문하여 직접 전시를 관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전시장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거대한 검은색 물체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풍선 같기도 하고 검은 봉투 같기도 합니다. 기괴한 모양이, 어딘가 이불 작가의 소프트 조각을 떠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화려한 장식을 매단 채 곤충의 다리 형상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이 작품은 이병찬 작가의 <불쾌한 골짜기>입니다.
본 작품은 관객참여형 작품입니다. 작품 한쪽에는 하얀 문이 달려있는데요, 관객이 그 문을 여는 순간 공기로 가득 차 있던, 비닐로 된 검은색 조형물 속의 공기가 빠져나갑니다. 관객의 행위로 작품의 질량이 왜곡되는 것이지요. 작가는 이처럼 관객의 영향을 받는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되는 도시의 질량을 표현합니다.
책 “사피엔스”에서 저자 유발 하라리가 설명하듯이, 여러분이 그 수식어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21세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문명인은 자의 반 타의 반 ‘자본주의자’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본주의적 행위를 하지요. ‘자본주의자’라는 지위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저 역시 미술관에 가는 길에 버스를 타기 위해 비용을 지급하는 자본주의적 행위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작품과 감상자 간 상호작용을 해석해봅시다. 우선 가만히 있는 작품 자체는 일정한 질량을 지닌 도시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편 작품의 문을 열면 작품의 질량에 영향을 주는 감상자의 신체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요. 위에서 설명하였듯 우리는 ‘자본주의자’이니 말입니다.
자본주의인 감상자의 손이 닿지 않은 작품의 질량은 일정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인 감상자의 손이 문고리에 닿아 문이 열리는 순간, 작품 즉 도시의 질량은 왜곡됩니다. 자본주의가 극단에 치솟을수록, 절대적인 질량은 변할 수 없는 도시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문을 열고 작품 내부에 들어가면, 밟으면 기이한 소리를 내는 펌프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모형 심장이 바닥에 놓여있고, 천장에는 환풍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빛나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조형물들의 조합은 작가의 과거 지하 작업실 생활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작가의 감정을 반영합니다.
도시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비극과 희극의 장면이 달라지는 곳 같아요.
-이병찬 작가
작가의 말처럼, 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는 도시 속에서 우리는 비극과 희극을 봅니다. 작가는 그 왜곡을 작품에 담아냅니다.
이병찬 작가의 전시 공간을 돌아 다음 공간으로 향하면 색다른 분위기의 작품이 펼쳐집니다. 마민지 작가의 작품입니다. 총 세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영상작품과 일종의 레디메이드 작품, 그리고 관객 참여식 설치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세 작품은 하나의 작품 공간으로서 작용하기도 합니다.
위의 작품이 바로 제가 ‘일종의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부른 <풍요의 길>입니다. 글씨를 읽다 보면 깨닫겠지만, 천장에 매달린 현수막들은 바로 부동산 투자 광고 문구가 쓰인 것을 오려 붙인 것들입니다. 이 <풍요의 길>은 전면에 설치된 영상예술 작품인 <셀프 고사>와, 관객이 직접 돌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염원>을 이어주는 길이 됩니다.
영상예술 작품인 <셀프 고사>는 작가의 퍼포먼스 영상작품입니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입니다. 작가는 전시 공간에도 있는 방석 위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을 반복하며, 절에서 시주를 할 때 하는 것인 듯한 동작을 반복합니다.
영상의 자막과 배경의 번쩍번쩍한 건물들, 그리고 영상 주변을 장식하는 <풍요의 길> 현수막들은 작가의 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의 명의로 된 땅값이 오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술적 행위로 부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는 작가는, 관객 역시 작가의 ‘현대식 샤머니즘’에 동참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제안의 작품은 바로 <염원>인데요, 저 역시 이곳에서 돌 하나를 올려두고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 명의로 된 땅이나 집이 없어서 땅값과 집값이 오를 수 없긴 하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마민지 작가는 그의 부모님 세대에 시작된,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국의 부동산 투기 광풍의 세태를 꼬집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가 자신 그리고 관객을 포함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이들의 은근한 염원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도시의 경계 안에서
끊임없이 이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민지 작가
작가의 말처럼, 현대의 도시 생활은 ‘대박’이 없는 한 역마살이 붙어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대박을 사냥하는 이들을 욕하는 한편 대박을 바라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를 주술적 작품으로 풀어냅니다.
독특한 구조의 세 화면에서 영상이 상영됩니다. 단절된 세 화면에서 상영되는 것은 하나의 작품, <마후라>입니다.
작가 송주원은 안무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역시 작가는 안무를 담은 영상예술 작품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마후라’, ‘머플러’의 일본식 표기입니다. 작가가 ‘Muffler’라는 단어를 일본식 표기로 읽은 것은 ‘Muffler’가 ‘마후라’라고 읽힐 때 보통 자동차의 소음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것 역시 ‘자동차’라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이 자동차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상에서 다루는 것은 ‘장안평 중고차 시장’입니다. 장안평 중고차 시장은 1970년대에 조성된, 한때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잘 나갔던 국내 최초의 중고차 시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발을 맞추지 못하여 점차 쇠퇴한 공간이 되었지요.
영상 속 배우들은 한때는 생기 넘쳤을, 그러나 이제는 꽤나 팍팍한 모습을 띠는 곳이 되어버린 장안평 중고차 시장에서 직접 춤을 추며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배우들은 ‘아이고’라는 가사 때문에 곡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노래를 부르고, 자동차의 부품으로 검술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과 버려진 자동차 부품 간 물아일체의 상태를 보이기도 하지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어진 두 화면 그리고 그것과 엇갈리게 동떨어진 또다른 화면에서 안무 동작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은 그 중앙에 서서 자신 주위를 맴도는 안무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장안평 중고차 시장에서 작품을 촬영한 것은, 이 지역이 서울시 도시재생 사업 거점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후라>는 작가의 도시공간무용프로젝트 <풍정.각>의 11번째 시리즈로, 해당 프로젝트에서는 재개발과 도시재생 사업 등으로 사라지는 도시 공간을 담는다고 합니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고,
각자의 기억과 호흡으로 일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송주원 작가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사라져가는 도시의 작은 목소리를 담으려 하는 송주원 작가의 향후 작품활동 역시 기대되지 않을 수 없는 듯합니다.
다음으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바로 송호철 작가의 <젠틀맨 게임>과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는 영상작품이고 <젠틀맨 게임>은 일종의 조형예술 작품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는 <젠틀맨 게임>의 의미를 해설하는 영상입니다. 즉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는 <젠틀맨 게임>의 설명서입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개념이 된 젠트리피케이션은 ‘둥지내몰림’이라고도 불리는 현상입니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그곳에 중산층 이상의 계급이 유입됨으로 인해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들이 비싸진 부동산 가격이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지역으로 내몰리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젠틀맨 게임>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직관적으로 풀어낸 예술 작품이자 단순한 게임입니다. 버튼 하나를 누르면 작품이 움직이는데 이 움직임의 의미는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를 시청하면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젠틀맨 게임>은 버튼을 누르면 피규어 아래에 있는 나무판자가 움직이며 작동합니다. 투명한 천장에 있는 저금통 입구에 타이밍을 맞추어 동전을 넣으면 그 움직이는 판자는 동전을 앞으로 밀어냅니다. 동전이 많아지면 동전들은 하얀색 구조물을 건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작동의 함의는 <젠트리피케이션 설명서> 영상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판자 위의 사람들은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사람들, 움직이는 나무판자는 재개발의 움직임, 그리고 동전은 재개발 투자 비용입니다. 타이밍을 놓치면 잘못된 부분에 동전이 떨어지는데, 이는 재개발 투자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까지 잡아낸 것이었기에 특히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한편 하얀색 건물들은 기존의 건물, 즉 원주민을 상징합니다. 재개발에 투자되는 동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들은 점점 더 바깥으로 내몰리고, 결국에는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죠.
송호철 작가의 작품은 저의 설명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이 직접 작품에 참여해보는 것이 더 쉬운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이러한 작품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동전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참 아쉽네요. 여러분은 꼭 동전을 챙겨가 보시길 바랍니다. 너무나도 직관적이고 훌륭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을 풀어내 작품입니다.
도시는 내 삶의 터전이자 나에게 계속 극복해야 하는 상황을 던져줍니다.
-송호철 작가
이처럼 송호철 작가는 보통 긍정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도시 재개발과 부도심 활성화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아마추어 서울은 서울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 그룹입니다. 이들은 서울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담은 지도를 만들고, 사람 한 명 한 명의 작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역시 그들은 그들이 지금껏 제작해온 지도들을 선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집합니다.
아마추어 서울의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구글폼 화면이 켜진 컴퓨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폼에는 “서울이 사람이라면 그의 성격은 ~하다”와 같은 양식의 문장에 빈칸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여럿 나열되어 있고, 컴퓨터 앞에 쏘아진 화면에는 다른 사람의 구글폼 답변 예시가 투영됩니다. 관객은 응답을 채워나감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에게 전달할 수 있고, 전달된 답변은 작가에게 자료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저 역시 재미있게 답변을 채워내고 왔습니다. 서울 생활 경험이 있는 관객분이라면 꼭 한 번 응답지를 채워 보길 바랍니다. 지난 서울살이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다양한 시간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소망은 허물고 ‘새로 짓기’ 보다는 있는 것을 ‘오래 잘 지키기’에 대한 가치를 인지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아마추어 서울
이번 전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감상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알려드릴 수 없을 듯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한 시간 내외의 장편 다큐멘터리만 4편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방문으로 모든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상영관’에서는 참여작가들의 장편 다큐멘터리들이 시간표에 맞게 상영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상영시간표입니다. 특별히 감상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이 상영되는 시간에 맞추어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가 소개한 작품 외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뛰어난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로 가득 찬 전시이니,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별도의 사전 예약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세화미술관의 [Solid City]를 소개해드린 [도슨트 by 푸름], 푸름이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에도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5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