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은 뫼 가운데서도 무엇에 쓰려고 나무를 애써 키우는 뫼이다. 갓은 재와 함께 한자말 산이 잡아먹은 우리 토박이말이다. 갓을 옛날에는 '가시'라고도 했는데, 산림이나 산림지대, 수풀이 우거진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책에는 ‘가시라’라는 말이 있다. 가시는 산림이나 임산을 뜻하고 ‘라’는 땅, 나라를 뜻하니 ‘가시라’는 곧 삼림의 땅, 산림의 나라이다. 이것은 이두 표기인데, 비슷한 뜻을 다르게 적은 것으로 가서라, 갈사국, 하서량, 하슬라, 아슬라 따위가 있다.
가시는 곧 예(濊)를 가리키고, ‘가시라’는 예족, 예국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예(濊)를 가리켜 적은 네 개의 한자(獩, 濊, 穢, 薉)가 모두 그 음부의 소리가 하나같이 ‘셰’인 것에 주목하고, 이 소리가 고대에는 ‘가시’로 소리 났음을 증명한다. 갓 혹은 가시는 예(濊)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환록 들에서 발견되는 가시라, 가서라, 갈사국, 가섭원, 하서량, 하슬라, 아슬라 따위는 모두 예족, 예국, 예의 수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한편 경상도 말에 ‘가시나’라는 말이 있다. 주로 여자아이를 낮추어 부르거나 친한 사이에는 부르는 말이다. 물론 여자아이를 가리킬 때도 쓴다. 이 말은 [가시+ㄴ#아]로 분석된다. ‘가시’는 ‘가시다’의 어간이고, ‘ㄴ’은 꾸미는 말꼬리다. 곧 가시나는 ‘가신 아이’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풀어보면 깨끗하게 하는 아이, 깨끗한 아이, 깨끗해진 아이라는 뜻이 된다. 이 말 또한 예족의 말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 수풀(산림)을 거룩하게 여기는 믿음(신앙)과 필시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시나는 범서낭을 모시는 나라의 여사제였을지 모른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덥다. 전 세계가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대다. 이제 지구의 생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위험에 놓여 있다고 한다. 아마존의 갓(밀림)과 러시아의 갓(숲) 들이 인간의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다 망가진 까닭이다.
이런 시대에 갓을 거룩한 서낭으로 여겨 떠받들고, 갓의 임금 범을 모시며 살았던 예족의 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갓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나무와 숲을 신처럼 떠받들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맞닥뜨리게 해준다. 백두대간의 도도한 갓 줄기에는 지리적 국토 차원을 넘어 민족의 먼 시원적 역사의식이 배어 있다고 믿는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갓이라는 말을 되찾아 쓰고, 그 거룩한 정신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