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 ~ 26 장 <장례외 혼례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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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가운데 풍속은 어리석고 미련하기(蠢蠢)가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어버이 장례를 치를 때 며칠 전부터 몸을 삼가(忌)여 집에 차일을 치고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동네 사람들을 모아 각별하게 많이 먹이고 무당과 경재인(경을 읽으며 복을 비는 사람)을 모아 종일 밤이 되도록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적에 북과 장구를 치며 피리와 대금을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묘까지 가니 장수(葬需)는 모으는 일이 없고 폐백(玄纁) 드리는 사람도 없고 선비라 칭하는 이라도 신주(神主)하는 이 없고 돌아와 제 한 번 지내니 제 이름은 넋제라 하는데, 대충 장사의 술과 고기와 풍류를 착실히 한 후에야 이웃 사람들이 장례를 잘 지내니 그 상주가 착하다 하고 장수를 약간 잘 차려 지내도 풍류와 술과 고기가 착실치 못하면 장사를 잘 못 지냈다 하고 꾸지람이 많다고 하니, 들으니 우습기도 우습고 놀랍기도 놀랍더라(駭然). 장례 이러한데 혼인하는 모양은 더욱 말할 것이 없더라. 혼인날 신랑이 오면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내달아 얼굴에 먹칠도 하는 등 많이 피곤하게 보채어 급제한 선달을 선배(先進)가 보채는 듯이 보채고 딴 방에 종일토록 앉혀두었다가 납채(納采)하는 일 없고 전안(奠雁)하는 일 없어 신랑 신부가 낮에 보는 일 없고 동네 잔치하는 일 없어 밤에 신랑 있는 데에 처녀를 들여보내고 다른 예절이 없다고 하니 섬 가운데에 양반이라 칭하는 이도 장례의 예절(喪葬之節)과 혼례의 예법(婚姻之禮)이 이렇듯 망측하니 이 땅이 비록 서울서 천 리가 넘은들 예와 의의 나라에 교화가 미치지 않은 데가 없건마는 이 땅이 어찌 이렇듯 무무(瞀瞀)하고 측연하기가 심하더라. 다름이 아니라 이 고을 원은 이전부터 무관이 오기에 정치 혹 잘한다고 하여도 예의의 교화(예의지교)와 효열의 도리(효열지도)를 일컫는 이가 없기에 풍속이 아둔하고 미련하여 한 해 그러하고 두 해 그러하여 백성들이 오륜이 무엇인지 예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성질이 모질게만 길러지고 중간에 문신을 사이사이 보내게 변통하였으되 문관 원이 한 번 다녀간 후 무관 원이 늘 연하여 오기에 배움을 권장하는 일 없고 예법붙이 전혀(바히) 없어 쓸어낸 듯하니 섬 가운데 늙은이들이 혹 애달파 하는 이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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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풍속이 그리 교양이 없고 무식(瞀瞀)한데도 효자 하나가 있으니 성명이 이성삼이라. 제 아비 종실 후예로 집안 족보가 있고 전주에서 옮아와 사는지라. 성삼이 타고난 성품으로 지극히 효도(천성지효)하더니 아비의 상을 만나 초상 염습부터 남김없이 모조리(一竝) 다 상례비요(喪禮備要: 신의경이 찬술한 상례 지침서)대로 하고 장사의 굿과 풍류를 아니하고 장사 지낸 후 산중에 초막을 짓고 시묘하니 사람들이 호환 있다고 말리되 성삼이 손수 죽을 쑤어 먹고 삼 년을 지내고 내려올 때 그 집의 사람을 얻어 들이고 논을 사주어 지어 먹게 하고 묘를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달라 하고 내려와 기제사와 명절제사를 극진하게 하고 하룻길이라도 갈 적과 올 적에 사당에 아뢰어(焚香告祀)하여 모든 집안일을 다 예대로 하고 그 노모가 갑술생 금년이 칠십팔 세라 근력이 강건하되 성삼이 주야 곁에서 간절한 정성(精誠之切)과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甘旨之養)을 지극히 하고,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혹 전답을 사더라도 반드시 제 형의 이름으로 사서 문서를 하니 이웃 사람들이 말려 말하기를, 지금(시방)은 자네 형제 우애 극진하지만 자네 자식들은 종형제니 저희 장래 다툼의 꼬투리(爭端)가 되기 쉬우니라. 성삼이 말하기를 내 비록 전토를 사나 형이 가장이니 형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장래 종형제 사이의 전토로 다툴 지경에 이르면 전토 있은들 무엇에 쓰겠는가 하니 성삼의 효우 언행이 실로 기이하여 바다 섬(海島) 인물 같지 아니하되 마을 이웃 사람들이 비웃고 귀히 여길 줄 모르니 풍속이 교양 없고 무식(瞀瞀)하기 끝이 없더라. 성삼이 이따금 나와 왕래하여 상례 제례에 의심되는 곳을 묻고 <상례비요> 책이 없어 걱정하기에 내 제 행실을 귀히 여겨 백지를 얻으러 보내어 베껴다가 주며 생각하니 서울 경기 사대부 가운데 예서를 많이 쌓아 두고 행하지 못하는 이가 몇 집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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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촌 여인들이 음풍이 성하여 정절 지킬 이가 적은데 열녀 한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연대라. 상한 김자평의 딸이요 사노 임분선의 처가 되었더니 연대 나이 겨우 십칠 세에 홀로 되어 삼 년 동안 애통하여 몸이 쇠하여지더니(哀毁) 그 아비가 청상이 된 딸을 가엽게(참잉이) 여겨 개가시키려 하니 연대 산골짜기 나무에 가 스스로 목을 달아 죽으니(自縊死) 관찰사(道臣)가 장문을 올려 지금 임금님(당저) 기유년에 정려문이 내려오니 성군의 포상 은혜가 이런 바다 골짜기에도 미친 일이 누가 아니 감동하리오. 관장 된 이가 효열지행을 각별히 숭상하면 풍속이 거의 나을 듯싶고 효열지행을 가르친 후에야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 섬길 줄을 알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