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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파스 Y Jun 22. 2024

나의 아저씨

인생이라는 담금주

허름하지만 온갖 동네 남자들이 다 모이는 오래된 술집.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구조기술사이자 대기업 부장인 중년의 남자는 고민에 빠진다.

유학 중인 아들이 준 미션. 아빠의 특기를 동영상으로 담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 특기라 봤자 그냥 보통 아저씨들이 할만한 뭔가면 되는 거 아냐?

양 옆에 형과 동생이 있으니 물으면 좀 나으려나..?

묻는다.


형 왈; "제기차기!"

- 해 본지가 언젠데... 그냥 확 막춤이나 춰버릴까?


형의 푸념이 이어진다.

"어려서는 돈이 없어서.. 취미, 특기 배우는 학원에 다녀보질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돈 안 되는 거에 돈 써본 적이 없고."

...

"할 줄 아는 게 없네, 술 말고"

"칫...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 특기는 개뿔"


푸념을 들은 남자는 지긋이 웃으며 답한다.

"있네... 술."


듣던 막냇동생이 이어 말한다.

"술을 특기로 쳐준다면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은 국비 유학생감이지."


받아서 형이 말한다.

"마누라가 애를 낳아도 술, 이혼하재도 술, 옆에서 잔소리를 해도 머릿속에는 온통 술생각..."

"슬픈 얘기야..."

"술..술푼 얘기..! 크하하하핳핳하!"




드라마에서 꼭 하루의 일과를 마친 동네 남자들은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신다. 삼삼오오 모이든, 단체로 모이든, 혼자 있든 꼭 술을 마신다.

그것도 배우들이 정말 맛깔나게 마셔서 보는 사람도 술 당기게 할 정도다.


직업병이 발동한 나는 또 생각해 본다. 왜 그랬을까..? 왜 꼭 술을 마시는 장면을 매번 넣을까?

작가에게 아저씨는 마누라가 애를 낳아도 술만 마시는 존재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극 중 주인공인 박동훈의 인생은 억울함의 연속이다.

집안에선 백수인 형과 동생에게 용돈 찔러 주며 홀로 남은 어머니의 기대를 받으며 가장노릇 하고 있고

가정에선 중년이 되어 그런지 아내와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 하나 있는 자식은 유학 중이고

회사에선 고까워하는 후배를 상사로 두고 있으며 심지어 그의 아내는 그와 바람까지 난 상황이다.

게다가 사내 암투 중 '운'과 '훈'이 헷갈린 배달원의 실수로 휘말리게 되었고 파견직으로 나온 이지안은 이를 빌미로 밥을 사달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빠지지 않고 동네 친구 정희가 운영하는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신다.


술로 잊으려, 씻어내려 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힘듦, 슬픔. 기쁨, 분노, 즐거움 모든 감정을 가슴에 남겨둔 채 그 위에 술을 붓는 것이다.

마치 인삼주를 담그듯 정리되지 않은 모든 감정을 꾸역꾸역 있는 그대로 가슴에 두고서 그 안에 술을 부어 담금주로 빚어내고 있는 중이다.

 



답답한 마음에 속세를 떠난 친구에게 문자를 한다.

"산사는 평화로운가? 난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가기 싫은 회사로 간다..."


답이 오길

"니 몸은 기껏해야 백이십 근. 천근만근인 것은 네 마음..."


마음의 무게, 비우고 싶어도 비울 수 없다.

다 그러고 살아.. 그 말을 백번을 되새기며 버텨왔다.

그 마음의 무게를 꾹꾹 누르고 담아 깊숙한 곳 어딘가에 묻어둔다.

그리곤 붓는다. 술을.


어쩜 사람은 각자의 마음마다, 그 무게마다 재료가 다르고 환경이 달라 저마다 고운 빛깔의 술을 만들어 내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 위에 술을 부을 필요는 없다. 누구는 운동을 붓기도 하고 누구는 여행을 붓기도 한다. 또 누구는 기도를 붓는다.

삶 위에 덧입혀지는 저마다의 고운 빛깔의 그 무언가가 오늘의 우리를, 나를 만들어 낸다.


어쩜 진정한 어른은 그 무거운 마음이 눌리고 눌려 진한 담금주를 만들어 그 무거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치 무겁고 무서운 현실 가운데 짓눌린 마음을 감당할 수 없던 어린 지안(至安)을 만나 그 마음에 공감해 주고 경험에서 쌓인 지식과 지혜를 전하는, 그리하여 결국엔 편안함에 이르게 하는 그런 어른 말이다.


삶이 무채색이던 지안이 첫 웃음을 지으며 색감을 찾던 순간은 박동훈과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다.

피곤함을 잊고자 한 번에 커피를 세 잔씩 부어마시던 때보다 박동훈이라는 좋은 담금주를 만나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박동훈도 자신의 삶은 그저 쓰디쓴 술이라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좋다고 응원해 주는 이지안 덕분에 그동안 자신이 꾸역꾸역 담아왔던 삶도 마음도 좋은 술을 빚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게 됐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마음에 담긴 향긋한 술기운이 누군가를 편안함에 이르게 해 준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삶 아닐까?


당신은 오늘 편안함에 이르셨습니까?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출처: tvN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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