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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Dec 27. 2020

양가적 종교 인식과 불완전한 인간 -<친절한금자씨>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하와, 아담)이 죄를 짓자 인간이 거주하던 낙원의 에덴동산은 저주의 땅으로 바뀐다. 사람이 지은 죄가 땅과 사물 전체로 전가되었고, 이는 인간의 근원에 죄가 있다는 원죄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원죄론이 바로 속죄론의 전제인데, 속죄론은 예수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세상의 죄를 속죄하였다는 내용이다. 속죄는 신이 하는 일이기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쓸모없으며, 인간은 속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친절한 금자씨>는 철저히 종교적이며, 철저히 비종교적인 영화이다. 한 때 카톨릭 교회의 사제이기도 했던 비발디의 음악과 함께 악마와 결탁해 천재적인 연주를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교회에게 외면당한 파가니니의 음악을 사용하여 양가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명장면이라 불리는 오프닝 시퀀스의 ‘너나 잘하세요’는 기독교적 속죄론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내포한다. 전도사는 과거의 죄를 청산하고 속죄하여 새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두부를 건네지만 금자씨는 그 두부를 떨어뜨린다. 이로써 금자씨가 기독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속죄를 진행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금자씨는 속죄와 함께 복수를 계획하는데, 복수는 기독교에서 금지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수는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복수는 두 가지로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하나님의 복수와 인간의 복수이다. 하나님의 복수는 감정적인 앙갚음이 아니라 주권자의 심판 개념으로서의 복수이다. 반면에 인간의 복수는 분노로 가득 찬 앙갚음이 대부분이다. 성경은 시종일관 이러한 복수는 비신앙적일 뿐만 아니라 죄임을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는 복수를 계획하는 금자씨의 모습은 교도소 내에서 열정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연설을 펼치던 행동과 반대되는 양상이다. 이미 출소한 금자씨에게 기독교는 불필요한 것이며, 그를 스토킹 하듯 집 앞까지 찾아오는 전도사에게 불쾌감을 표한다. 이에 전도사는 백선생에게 금자씨의 근황 사진을 넘긴다. 이는 기독교의 부패를 드러냄과 동시에 서사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금자씨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죄를 시작한다. 자신이 가해자로 검거된 살인사건 피해자의 부모님을 찾아가 그들 앞에서 손가락을 자른다. 그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도와줬던 사람들을 찾아가 복수를 시작하는데, 그에게 속죄는 복수이기도 하다. 진범을 처벌받지 못하게 한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아이를 빌미로 협박하여 자신을 감옥에 넣은 백선생에 대한 복수이다. 영화에서 속죄와 복수에 대한 양상은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속죄와 복수를 동시에 진행하는자, 속죄를 하는 자, 복수를 하는 자이다. 첫 번째는 금자씨, 두 번째는 최 반장, 세 번째는 피해자의 가족이다. 앞서 언급했듯 금자씨의 속죄는 복수이기도 하며, 최 반장은 금자씨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옥에 넣어 백선생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은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백선생을 죽이는 계획에 동참한다.

 영화의 색채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점점 옅어지며 유가족들이 백선생을 죽일 때 완전히 흑백으로 변하는데, 흑백 효과는 블랙코미디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선 흑백의 화면은 잔인함을 약화한다. 또한 유가족들이 서로에게 백선생에게 고통을 줄 무기를 빌려주려 하고, 만화에서나 볼 법한 도끼를 가져오는 모습은 일종의 환상성을 부여한다. 복수가 끝난 후 빵집에서 유가족들은 백선생이 가져간 돈을 달라며 계좌번호를 금자씨에게 건넨다. 단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복수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복수를 끝내자 금전을 원하는 모습은 인간이 양면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며 아이러니함을 유발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기독교적 세계관에 편입된다. 금자씨는 원모의 환영에게 용서를 빌려 하지만, 원모는 금자씨가 백선생에게 했던 것처럼 입에 재갈을 물 결국 금자씨가 속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원모의 환영을 본 뒤 금자씨는 두부 케이크를 들고 나와 딸 제니 앞에 선다. 제니 앞에서 두부 케이크를 먹다 케이크에 얼굴을 박는데, 이는 출소할 때 거부했던 기독교적 속죄를 하는 듯하다. 금자씨가 속죄하듯 케이크에 얼굴을 박을 때 나레이션이 나온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안녕, 금자씨.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라는 대사를 통해  나레이션의 발화 주체가 중년의 제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금자씨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구원을 부정했지만, 동시에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레이션의 발화 주체가 제니라는 점, 그리고 제니가 금자씨를 위로하듯 안아주는 점에서 결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제니는 죄의식의 살아있는 표상이다. 금자씨는 극 중 제니에게 너는 죄가 없고, 너의 고통은 모두 나의 죄라며 원죄론을 부정한 바가 있다. 원죄론에서 자유로운 존재이자 죄의식이 표상이 금자씨를 안아주는 모습은 금자씨가 제니에게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구원의 주체가 오직 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인간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교와 밀접한 삶을 살아간다. 종교는 긴 역사를 가진 만큼 많은 부패로 비판을 받아왔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의 삶과 함께했다. 금자씨에게 기독교 연설은 모범수로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적 세계관에 흡수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속죄, 구원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속죄와 복수를 행했으나 결국은 구원받지 못함에 절망한다. 앞서 언급했듯 결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금자씨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파멸의 길로 향한 것인지, 혹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구원을 받은 것인지에 대한 여지를 남기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참고

김지호, 「이슬람과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한 비교연구」, 『칼빈논단』 37, 칼빈대학, 2017

홍광일, 「속죄론에 대한 기적수업 예수의 교정」, 『한국정신과학회 학술대회논문집』 10, 한국정신과학회, 2019

「복수(復讐)의 치유와 회복(1)」, 『크리스천 투데이』, 2004.06.16,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26833 (접속일 20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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