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은 Dec 27. 2020

완전함에 대한 갈망-<미드소마>

 궁지에 몰린 인간이 선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스스로 상황을 견뎌내거나, 특정 대상에게 의지하거나. 그 대상은 주로 친구, 가족, 연인 등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벽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최종 도착지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영화 <밀양>의 이신애처럼, 드라마 <구해줘>의 마을 사람들처럼 언제나 자신을 품어줄 수 있을 듯한 존재에게 귀의하게 된다. 초월적인 존재는 비단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집단적 믿음을 통해 초월적인 존재를 숭배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이지만, 신화 또한 집단적 믿음의 산물이다. 민족과 집단마다 독자적인 신화를 갖고 있어 신화는 민족, 집단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미드소마>는 북유럽 신화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영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북유럽 신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태초의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고 오직 추위와 더위만이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있었는데, 더위와 추위가 만나는 지점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해 그 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 그 생명이 바로 태초의 거인 이미르이다. 뒤이어 서리 녹은 물방울에서 태초암소 아우둠라가 탄생한다. 이미르는 끊임없이 거인을 생산했으며, 아움둠라가 소금돌을 핥자 신들의 조상이라 불리는 부리가 생겨난다. 부리는 뵈르라는 아들을 낳고, 뵈르는 거인과 짝을 지어 오딘, 베, 빌리라는 세 아들을 얻었다. 3형제는 이미르가 끊임없이 거인을 생산해 거인이 많아지는 것에 불만을 느껴 이미르를 죽인다. 죽은 이미르의 뼈는 산이 되고, 뼛조각과 이빨은 돌덩이가 되고, 머리카락과 털은 나무와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개골의 뇌수를 하늘에 흩뿌리자 이는 구름이 되었다. 즉, 죽은 이미르의 몸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3형제 중 오딘은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최고신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구성요소는 북유럽 신화에서 기인한다. 우선 영화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이미르에 대한 숭배는 세계 창조의 근간이 된 이미르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며, 후반부에 언급되는 아버지는 오딘을 상징한다.

 ‘호르가 인생주기’는 이그드라실, 오딘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그드라실은 세계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나무이며 아홉 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오딘은 룬 문자와 죽음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이그드라실에 죽은 채 매달린다. 나무에서 떨어진 후 오딘은 다시 살아나 원하던 지식을 얻는다. 이를 통해 최고신 오딘의 지혜는 세상을 밝게만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과 죽음까지도 모두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옛 게르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빛과 낮과 생명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어둠과 밤과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호르가 인생주기’도 같은 맥락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인생주기에 따른 죽음은 온전한 끝이 아니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순환의 일부라는 신화적 요소가 차용된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대니의 정서를 따라간다. 대니는 모든 것이 불안한 상태이다. 부모님을 잃은 상황에 남자친구조차 온전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초반부에 대니가 마약을 한 후 겪는 환각은 기댈 곳이 없는 대니의 정서적 불안함을 상징한다. 대니는 호르가 마을의 풍습에 역겨움을 느끼지만, 점차 그들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조차 잊은 생일을 챙겨준 사람도 펠레이며, 부모님을 잃은 대니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사람도 펠레이다. 펠레는 대니에게 자신도 부모님을 잃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너 또한 나처럼 새로운 가족을 가져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이 너에게 안식처가 되고 있냐는 물음에 대니는 대답하지 못한다. 후에 크리스티안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로써 대니에게 기댈 공간은 완전히 사라진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낀 대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가족’이라는 안정을 얻기 위해 마을에 남는다.  

 가족도 인간이지만, 대니가 택한 가족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호르가 마을은 철저하게 전통(신화)에 따라 구성되며, 소규모 공동체로 외부적 요소가 모두 배제된 채 숭배하는 대상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 18-36살을 순례의 시기로 정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외부로 나갔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마을의 풍습이 공개된 적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다. 즉, 호르가 마을은 오직 전통을 위한 공간이며, 이에 따라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대니에게 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전통을 위해 살아가기에 ‘가족’을 버릴 가능성이 전무하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을 집단에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의 양상과 유사하다.

 영화는 많은 요소를 신화에서 차용해 호르가 마을을 신화적 공간으로 만든 후, 궁지에 몰린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은 감정적이기에 불완전하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결국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는 행동을 반복할 뿐이고, 의지의 종착지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유한하기에 불완전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무한하기에 완전하다. 인간이 완전함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초월적 존재에 귀의하지 않는 인간조차 완전함에 대한 갈망을 모두 버렸다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전함을 갈망하는 것이 삶일 수도 있다. 갈망의 방식의 차이에서 귀의하는 자, 귀의하지 않는 자로 나뉘게 된다. 어느 쪽이 옳다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고통 속에서 귀의하는 자들이 수없이 존재해왔기에 종교와 신화가 현재까지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

안인희,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1」, 『웅진지식하우스』, 2007

매거진의 이전글 양가적 종교 인식과 불완전한 인간 -<친절한금자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