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웹사이트에 가입하거나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 때면 아이디를 짓느라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당시 내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상이나 가치를 자연스레 드러내면서 읽었을 때 발음이 세련되고 그 뜻에 위트가 있으며 허세로 느껴지지는 않을 어떤 단어를 제한된 글자 수로 만드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애를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 전 세계의 어느 누구도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내가 어디서든 고유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어찌나 관심사가 자주 바뀌었던지 20여 년 전 처음 다음에 개설한 이메일의 아이디부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까지 모든 인터넷 사이트와 게임에서 사용하는 아이디가 제각기 달라 겹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쓰는 아이디는 10년 전이나 20년 전에도 다르지 않고 오직 지금 사용하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게 유난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라인에서 쓸 아이디를 계속 다르게 만들어 쓰는 것뿐만 아니었다. 꽤 오래전부터 자식을 낳으면 어떤 이름을 지어줄 지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독특하게 외자가 좋을 것 같고, 순우리말이면 금상첨화, 글자에 풍경이 있으면서 동양 예술의 미(美)가 느껴지게 끔, 영어 발음이 어렵지 않고, 놀림받지 않는 이름일 것 등 까다로운 조건들이 계속해서 추가되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내 성씨가 이 씨이니 어울리는 이름으로 산, 솜, 슬, 봄이 좋겠군. 바늘구멍을 통과한 이름들이다.
이십 대에는 성격이나 태도와 같이 나를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을 끊임없이 교정하며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삼십 대에 접어들자 지금 내 모습은 결국 무의식이 주도하던 유년기의 기질이 거의 그대로 이어져온 것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책가방을 처음 가져본 때부터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즐겨 읽었다. 사회과부도라는 교과서를 받은 이후로는 지리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책을 달달 외우고 어디에나 들고 다녔다. 세상의 모든 단어와 지식들을 모조리 알고 싶은 키 작은 소년에게 사전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였을 것이다. 아예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할 땐 과목마다 한 권의 마스터북(Master Book)을 만들어 그것만 달달 외웠고 이를 만들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견 관련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이름을 써야 할 때마다 매번 다른 이름을 지어 사용하는 일명 프로 네이머(Pro Namer)가 되어버린 근원을 추적해보자면,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한 권의 책을 늘 끼고 살던 바로 그 기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 나(혹은 나로부터 확장된 것)의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곧 나 자신의 총체이자 정수를 담은 한 권의 사전의 제목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시기의 나는 문학에 빠져있고 어떤 때는 미술이나 스포츠에 또 다른 어떤 시점에는 북극의 신비나 양자역학 같은 것에 빠져 있기에 그때마다 나는 자신을 문학 사전(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프라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거나 지질학 사전(그린란드의 도시 "일룰리사트", 스발바르제도의 도시 "롱이어 뷔엔")을 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권의 사전이 만들어질 때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꼭 새로 짓게 될 이 이름에 정착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개별성을 배제하고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관념과 물리적 구성요소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표현해줄 가장 적확한 단어를 찾음으로써 중독될 정도로 재미있지만 사실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간낭비 놀이를 기필코 끝장내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상상을 해본다. 그동안 만들어 낸 아이디의 개수를 고려해보면 실패의 역사로 점철된 세월이 짧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배수의 진을 쳐볼까 한다.
보르헤스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알레프(El Aleph)>에는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장소로 현실과 초현실, 과거와 미래, 모든 시대의 장소와 사건을 한데 모은 집적체"로 묘사되는 2~3cm 크기의 작은 구체 '알레프'가 등장한다. 알레프는 곧 전체이지만 작중 현재라는 부분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물체다. 이름 짓기의 도돌이표는 이 알레프를 손에 넣어야 비로소 끝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숙원사업에 돌입하면서 우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 -사상적 취향이나 취미, 학문, 예술가, 장르 또는 사조, 운동, 지명, 색깔 등-을 노트에 마인드맵 형식으로 적었다. 그다음엔 우리말뿐만 아니라 독일어나 스페인어, 태국어와 같이 비교적 익숙한 언어들부터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고어까지 뒤져서 앞서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 우주적인 단어를 탐색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관념과 실체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하면서 어느 공간에나 존재하는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나와 연결되어 있는 개인적인 무언가. 너무 현학적이거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날리지 않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종류의 것. 며칠을 고심해서 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 대충 지은 것 같기도 한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보통의 단어. 그러나 중2병 소년의 설익은 생각이나 홍대병 혹은 힙스터의 겉멋으로 만들어낸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가짜가 아닌 진짜. 그리고 언어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니고 있는 말.
그렇게 해서 남들은 도저히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쓸데없이 요란하고 비생산적인 과정을 거쳐 나는 글을 쓰는 나에게 '춤'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누구나 춤을 춘다. 잘 출 수도 있고 못 출 수도 있지만 춤을 추는 사람은 어린아이의 박수를 받는다. 춤은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몸짓 없이 때로는 마음도 춤을 춘다. 일렁이는 파도가 칠 때마다 어제와 내일이 떴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한다.
현실의 나 역시 매일 몸을 움직여 춤을 춘다. 그것은 누군가의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다. 점잖게 출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출 수도 있고 절제하며 출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춤을 추는 동안 나는 자유를 느낀다. 마치 겨울밤의 오로라가 된 듯 부드럽게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시간이 추는 춤을 깊이 느낀다. 춤은 찰나다. 애쓰지 않아도 좋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