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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Jan 23. 2021

미루기의 천재

모든 것이 되는 법 #2

   작년 초 자주 가던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코너에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책이 꽤 오랜 기간 전시되어 있었다. 제법 잘 나가는 책이었는지, 아예 눈에 잘 보이는 진열대 한 곳을 통째로 차지하고서는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잘 포장된 상품 같은 제목이라 생각하며 몇 번은 지나쳤지만 몇 주 동안 이어진 서점의 마케팅 공세에 밀려 나는 결국 그 책을 집어 들어 보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원제인 영문 제목 'soon'을 고려하면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초월 번역 수준이 아니라 아예 노골적인 포장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도 일단 질병으로 명명하고서, 백신이나 치료제랍시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버는 상품기획자의 교묘한 술책 같았다. 종종 할 일을 미루곤 했던 수많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은 서점 곳곳에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당장 치료를 받으라고 나를 째려보고 있는 그 책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엔 자신의 시간과 돈을 내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았지만 단지 제목만을 바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마케터의 능력에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흔히 일상에서 '미루기'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지만 귀찮아서 미루고, 하기 싫어서 미루고, 더 재밌는 것을 하느라 미루고, 노느라 미룬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미루면 혼이 난다고 자주 말을 들어서일까, 아니면 유독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무의식 때문일까, 답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미룰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갖게 된다. 이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책은 독자들에게 '미뤄도 괜찮다'라고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쯤 그냥 미루어도 괜찮지 않을까? 굳이 이러한 책을 읽지 않아도 말이다. 방학숙제를 미루고 오늘 하기로 한 푸시업 100개를 미루고 다이어트를 미루는 일. 이런 일들은 그냥 할 때까지 가만히 놔두어도 되지 않을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미루기 전에 이미 그 일을 해치워버리기에 미룬다는 선택지 조차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오늘 하기로 했던 방청소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뭐 어떤가. 오히려 해야 할 목표가 계속 남아 있으니 좋은 일이다!


   지나친 정신 승리 같아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미루는 바람에 무언가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도 다음에 올 좋은 일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니체가 얘기한 자유의지, 즉 '내가 원해서' 이 일을 미루었다고 생각한다면 미루기 자체에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없다. 미루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미루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


   나는 스스로를 게으름뱅이라고 여기지만 미루는 일이 부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한 <미루기의 천재들>의 마케팅에는 홀라당 넘어가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해야 할 일을 수없이 미뤄왔지만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미루었던 결정은 또 다른 길의 씨앗이 되었다. 내 삶은 제멋대로 흘러갔지만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미루는 선택도 나름 괜찮았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일주일도 더 된 일이지만 결국 나는 미룬 끝에 오늘에서야 이 글을 쓴다. 나는 이참에 내가 미루었던 굵직한 선택들을 정리하는 과업을 해볼까 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지극히 사적인 일기나 다름없어 보는 이에겐 별반 재미없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떠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미 늦었으니 인생의 버킷리스트였던 자서전 쓰기는 이루지 못하겠지만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극소수의 누군가는 호기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고.



   1998년, 뛰어놀기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였던 나는 제법 공을 잘 찼는데, 교내 축구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축구부 감독에 눈에 들어 정식으로 축구부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전국대회 3위를 차지할 정도의 강팀이었고 그해 열린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국가대표를 배출한 명문이었기에 축구선수의 미래를 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키가 130cm도 채 되지 않아 팀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선수였고 5-6학년 형들과 비교하면 더욱 초라한 피지컬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특출난 재능도 아니어서 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고 따지고 보면 발전 가능성을 본 감독이 나를 뽑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마 나는 애초에 끝장을 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고작 몇 달 만에 나는 축구를 그만두었다.


   이 일에 대해 내가 실패나 포기가 아닌 '미루기'로 생각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때의 내가 축구선수가 되는 일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되면 좋고'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하라고 떠민다면 할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일, 미루기 딱 좋은 일이다.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습관은 진로를 정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반복되는데, 기저에 깔린 생각을 관찰해보니 적당히 관심과 소질이 있는 다른 일들이 있으니 더 나아가지 않고 '일단 보류'를 선택하는 사고방식에 기인함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아들내미가 영재라고 생각하셨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던 1998년의 나는, 한편으로 일곱 살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배운 IT 새싹이태권도장의 기대주였으며, 또한 추리소설 마니아로서 나중에 서점을 차릴 생각도 했던 꿈이 너무 많은 아이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또래에 비해 빨리 컴퓨터를 접한 덕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메모장에 html 태그를 쓰며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마다 필기를 하는 척하며 노트에 홈페이지 디자인을 했고, 집에 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오늘 떠올린 아이디어 구현을 시도했다. 미술에는 완전히 소질이 없었는데 디자인은 재미가 있었고 따로 컬러리스트 책을 공부할 정도였다. 어찌나 그것에 빠져있었던지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다. 한창 커야 할 나이였지만 수면 부족으로 적어도 5cm 정도의 키는 이때 잃어버린 것 같다.


   몇 년이 지나자 나름 업계에서 유명한 삼국지 토론 커뮤니티의 운영자가 되었다. 지금과 같이 다음이나 네이버가 자리잡기 전이었던 그때는 분야마다 순위 사이트가 있었는데 내 홈페이지는 삼국지 분야에서 전국 7위까지 올랐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자 이 일로 밥벌이를 할 재능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기술학교(당시 실업계고)에 들어가지 않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웹디자이너로 진로를 정하고 나면 다른 모든 가능성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면 인문계고에 가는 것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결정이었다. 거기서도 웹디자인은 할 수는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던 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숙제다. 특히나 어느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유망함을 나타낸 적도 없기에 '못 먹어도 Go!'를 쉽게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축구부에서 나는 최고가 아니었고 전국에서 제일 웹디자인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때를 놓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루는 선택 역시도 결국은 내가 고른 하나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번의 선택의 기로에서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 결국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선택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해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수험공부는 어차피 고3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노는데 썼다. 축구와 웹디자인 외에도 가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거나 중독성이 심한 게임에 빠졌다. 하이쿠를 짓거나 중국 역사를 믹스한 무협소설을 인터넷에 몰래 연재해보기도 했다.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리며 실컷 책을 봤다. 만일 미루지 않고 어떤 길을 이미 선택했더라면 나는 이와 똑같은 고등학생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마치 게임북('A라고 생각하면 10페이지로, B라고 생각하면 12페이지로 가시오'와 같은 책)처럼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놀이'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순식간에 중요해졌고, 저자인 진중권이 쓴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를 통해 네덜란드의 화가 에셔(M.C.Escher)를 알게 되면서 이 쓸데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미학이라는 학문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서울대에만 설치되어 있던 미학과를 가겠다고 책상머리에 써붙였지만 단지 허세에 불과했는지 정작 필요한 만큼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수능성적도 한참 모자랐는데, 단순히 성적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필수과목 하나는 아예 시험을 치지도 않았다. 물론 이대로라면 나는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대로여서 수능 이후로 나에게는 2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1) 목표를 위해 재도전(재수)하는 것과 (2) 성적에 맞춰 학교를 정하되 인문학 전공을 선택해 계속 미학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미루기'를 골랐다. 나는 나중에 승부를 보자며 뜬금없이 경영학 전공을 선택했다. 재수를 하는 일은 너무 지난할 것 같았다. 경영학은 학문보다는 실용에 가까웠기에 확장성이 커서 나중으로 진로 선택을 미루기에는 최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유예의 역사에 한 줄을 더 썼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보류했다고 생각했기에 대학에 와서는 그 길을 계속 가기 위해 노력했다. 부전공으로 경제학이나 무역 관련 전공이 대세였지만 나는 미학을 선택했고, 각종 마케팅 학회에 가입해 공모전에 참가하는 대신 도서관에서 공연예술이나 영화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은행을 준비하거나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다큐멘터리PD를 꿈꾸게 되었다. 이 직업은 완벽했다. 사람들 사이를 조율하려는 나의 타고난 성격이나 작가주의 성향과 어울리면서 지나치게 다양한 관심사를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잘만 하면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틀에 박힌 시험공부를 따로 할 필요 없이 풍부한 경험과 잡다한 시사상식을 쌓는 것이 준비과정이라는 것 역시 유예의 달인이자 최소한의 노력으로 적당한 시도만 해왔던 게으름뱅이에게는 그야말로 딱 맞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자는 모토로 다큐멘터리 영화제나 국제영화제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혈혈단신으로 매봉역 앞 찜질방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도 하고 해운대 바닷가에서 영화배우들을 수행하다 얼떨결에 TV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학교 축제 MC를 봤고 행사를 기획했으며, 친구들과 원 없이 놀았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까지 날아가 빈민가에 공원을 짓고 부채춤 공연을 했고,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는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나 밥값을 아껴 반년 동안 실컷 여행만 다니기도 했다. 쉬운 과목들 위주로 골라 들었기에 학점도 괜찮았다. 홈페이지 만들기와 같은 필수 과목은 좋은 성적이 보장되어 있었고 학부생이었지만 대학원 축구 동아리에서 뛰면서 교수들을 알게 된 것 전공과목 수강에 보이지 않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봐왔고, 순조롭게 졸업시즌을 맞았다.


   마지막 방학을 앞두고 평소 존경했던 과 선배가 자기 회사에 인턴을 지원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 네가 싫어하는 대기업이라지만 여기는 무역회사라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고 연봉도 많이 준다, 해외 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냐며 나를 꼬셨다. 스스로를 진보적인 대학생이라 생각했던 나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기수나 다름 없는 그 회사에 지원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한사코 거절했으나, 다신 안 볼 각오 하라며 아예 선배가 정색을 하고 노려보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신청서를 써주었다. 그 선배는 겨우 1년 차 인사팀 직원이었기 때문에 리쿠르팅 신청서를 반드시 몇 장 이상 받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마침 인적성 시험 바로 전날에 방송국 취업 시 가산점을 주는 한국사 자격증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나는 어차피 시험장엔 가야 하니 경험이라 생각하고 SSAT라고 불리는 그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뜻밖에 합격 연락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 해 여름을 서울에서 보냈다.


   쟁쟁한 학벌들이 모인 곳에서 나는 유일한 지방대 출신이었는데, 회사가 그런대로 괜찮게 봐주었는지 2달여 간의 인턴 기간을 정리하는 최종 발표에서 뜻밖에도 1등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끈기 없이 미루기만 해온 삶이라 여겨왔지만, 분명히 다양한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 선배들과 친해지는데 축구가 한몫을 했고 웹디자인 경험은 발표 PPT에 녹아들었으며, PD가 되겠다며 했던 다양한 경험이 면접을 쉽게 통과시켰다. 자격증 공부 대신 교환학생을 갔던 것도 마지막 영어 발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규직 전환은 거의 확실했다. 그러나 보험이 생긴 것보다 더 큰 수확은 PD 시험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라 여겼던 학벌에 대해서 별 것 아니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 해, 내가 지원하려 했던 EBS에서는 채용공고를 내지 않았다. PD라는 직업이 워낙 T.O를 적게 뽑는 줄은 알았지만 아예 지원할 수도 없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공고가 나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 선택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려서 붙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통합 직군을 선발하는 다른 국영방송사에 가기 위해선 시험성적이 필요했고 지역 방송국들은 너무 규모가 작아 고생만 하고 성장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지원을 망설였다. 결과적으로 직업을 목표로 삼고서 직장에 연연하게 된 셈이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EBS 외에는 전심전력을 다 할 자신이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또다시 '일단 보류'를 선택했다. 제일 편한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MBC에 서류를 제출했으나 결국 면접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있었던 인턴을 했던 회사의 공채 면접을 봤다. 혹시나 탈락하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내년에 EBS에 도전하자고 마음먹기도 했으나 이 면접이라는 것도 실상 잘 길러둔 나무의 탐스런 과실을 따는 일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다녀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미련이 남을 것 같으면 그만두고 다시 해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이성과 감정 모두를 만족시키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여전히 다큐멘터리 PD라는 직업이 맞춤옷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뭐, 따지고 보면 유튜브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미루기로 시작된 일은 삶의 궤적을 바꾸어 버렸고 계속해서 미루다 보니 아예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쌓아온 것들은 남들의 눈에 마치 개성 있고 세련된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들이 골라준 것을 그대로 입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변명이나 합리화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나 역시 주체적으로 인생을 고르지 않았다고 가끔 자책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내가 그때 미루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행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원했던 그 모든 것을 이루는 길과 지금의 아내를 만나는 길 가운데 고르라고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할 일을 미룬다. 8년째 퇴사를 미루고 있고 헬스장 월회비는 하염없이 통장에서 흘러 나간다. 수첩엔 지워지지 않은 버킷리스트가 잔뜩 쌓여 있다. 서핑이나 티베트 여행 같이 시작 조차 못한 것들은 셀 수 없을 지경이고, 수영이나 롱보드 같이 시작은 했지만 나아가지 못한 것도 많다그렇지만 완수하지 않았기에 그 일들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죽기 전에 아, 그건 그때 할걸. 하고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급하지 않다. 내가 하고 싶거나 하기로 한 일들은 너무나 많아서 결국 대부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게 될 일이라면 결국 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미루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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