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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Jan 24. 2021

좋아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영원히 즐기는 방법

모든 것이 되는 법 #3

   지금은 스스로를 무던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이십 대 중반까지 나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강박적이었다. 이를 테면, 책을 볼 땐 반드시 90도 이내로 펼쳐봐야 했다. 구겨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도 당연히 안될 일이었다. 또 새로 수첩을 사면 우선 상단면에 나만의 기호를 그려 넣고 하단면에는 몇 번째 수첩인지를 나타내는 숫자를 적어야 메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반드시 수첩 첫 장은 공백으로 두고 두 번째 페이지부터 노트를 사용해야만 했다. 수첩의 뒷부분에는 일종의 정해진 것들을 적어두었는데, 만일 이 단계까지 글자를 틀렸거나 내용을 잘못 적었다면 수첩을 아예 새로 사야 할 정도였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스무 살 무렵까지 나는 수첩 맨 뒷부분을 대개 친구들의 연락처를 적는 칸으로 썼다. 내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연락처 첫 장에 적혀 있어야 했다. 혹시나 잘못 쓰게 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나는 수첩에 연락처를 쓰기 전에 꼭 다른 노트에 친구들의 이름을 친밀한 순서대로 써보는 연습을 했다. 순서를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매일 붙어 다니던 친구도 있었지만 멀리서 응원을 해주는 사이도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도 있는 반면에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잘 맞는 친구도 있었다. 가까움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정서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수첩 맨 뒷 장을 채우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쏟았다.


   나에게 수첩은 다이어리나 플래너라기보다는 놀이의 공간이었다.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아무 말이나 쓰기 위해 수첩을 썼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까만 가죽 수첩은 제자리에서 즉시 다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신비한 차원의 문 같았다. 수업시간이든 혹은 업무시간이든 수첩을 쓰는 일이라면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켜서 무언가를 쓰면 눈치가 보였지만 수첩을 꺼내어 쓰는 것은 왠지 모르게 당당했다. 나는 마치 수업이나 강의에 대단히 몰입한 사람처럼 표정연기를 하면서, 티 나지 않게 차원의 문을 넘나 들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즉흥적인 춤을 추는 종이 위의 무용수가 될 수 있었다.


  순서를 정해 목록을 만드는 행위는 꽤나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종이 위에서 뛰어놀고 싶을 때마다 어떤 리스트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주로 축구선수나 팀에 관한 것이었다. 4-3-3 포지션을 정해 좋아하는 축구선수 Best 11을 정했다. 인기도나 활약도에 따라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잡지나 기관들이 많이 있었지만, 내 기준은 그와 달랐다. 내가 여행했거나 하고 싶은 나라의 선수에게는 가산점이 붙었다. 이름이 멋있거나 인성이 좋은 선수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실축에서 즐겨 사용하는 플레이를 자주 구사하는 선수들은 쉽게 예선을 통과했다. 자연히 내가 뛰는 포지션의 선수가 많아져 몇몇 선수들은 아쉽게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선정된 선수들에게는 잘 어울리는 등번호를 붙여주었다. 리더십이 뛰어난 선수에게 주장직을 맡겼고 감독은 내가 좋아하는 리버풀의 레전드를 선임했다.


   다음은 음악이었다. 장르에 관계없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 열 명을 선정하는 한편, 가장 좋아하는 노래 스무 곡을 뽑는 코너도 마련되었다.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노래부터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노래, 특히 가사에 공감했던 노래 등 사연 있는 음악들이 자웅을 겨루었다. 콘서트를 찾아다녔던 박정현이나 브라운 아이드 소울 같은 실력파 R&B 가수, 7집 이후의 박지윤이나 가을방학처럼 잔잔한 음악 속에 진솔한 가사를 담는 뮤지션, 그리고 추억의 게임 대항해시대의 음악을 작곡한 Yoko Kanno와 디즈니의 음악감독인 Alan Menken이 리스트에 들기 위해 개성을 뽐냈다. 리스트에 선정된 스무 곡의 음악들은 훗날 내 결혼식에서도 입장곡*과 배경음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언제든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이 재밌는 놀이의 영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소설가, 화가, 테니스 선수와 같은 인물 리스트에서 국가, 도시, 장소, 색깔, 숫자와 같은 주제들로 이어졌다. 르 카레, 보르헤스, 마그리트, 칸딘스키, 로저 페더러와 같은 이름들이 '이춤의 전당'에 헌액 되었고, 그린란드의 도시 Ilulissat와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Samarkand, 머틀 그린, 4와 같은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어떤 것으로 수첩에 기록되었다.


   어느새 내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가장' 혹은 '제일'과 같은 순서 만들기용 낱말이 되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그 작품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열 개의 책이나 영화 리스트에 들어갈만한 것인지 따져보게 되었고, 리스트에 없는 것들을 마주하면 리스트를 만들어야 하는지 먼저 자문하게 되었다. 어느 날엔가 문득 삼각형이 완벽한 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만 보면 사각형의 안정감이 더 좋은 것도 같고 육각형은 왠지 우주적이며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형이 되기 위해 한동안 각축을 벌였다.


   리스트가 만들어진 이후에 새로 알게 된 것들은 기존의 것들과 계속해서 순위를 다투었다. 록 음악을 즐겨들을 때면 최애 음악 리스트에 록 음악이 몇 개나 있는지 따져보고 기존의 것을 밀어내고 들어갈 만한 곡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세상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듣지 못한 음악이 있는 데다 새로운 노래도 계속해서 발표되기에, 가장 좋아하는 음악 20곡을 뽑는 작업에는 무시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리스트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수첩과 종이만 있으면 절대 지루할 일이 없다. 수첩을 두고 다닐 때나 지하철로 출퇴근을 할 때는 휴대폰의 노트를 일단 이용하고 나중에 수첩에 넘기면 된다. 꼭 수첩에 쓰지 않아도 기록을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다.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회의에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오늘은 어떤 리스트를 만들어 볼까 생각하느라 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를 만드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좋아하게 만드는 자기 세뇌의 작업이 된다. 일단 즐거움으로 이루어진 어떤 서랍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서랍 속에 있는 개별적인 즐거움 가운데 약간이라도 시들어 생명력이 다한 것은 단지 서랍 밖으로 내보내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다시 서랍에 넣게 되면 나는 여전히 그 서랍을 신선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좋아하는 것들을 영원히 즐길 수 있게 된다.


   공식적인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나는 항상 축구나 테니스를 써왔지만, 남에게 꺼내지 않는 나만의 내밀한 취미는 이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그리고 영원히 즐기는 일이. 나는 좋아하는 것이 무척이나 많지만 아마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어디에서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삶은 흥미로운 것들로 넘쳐난다. 나는 앞으로도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끊임없이 만들고 마침내 죽기 직전에 그 리스트 가운데 최고의 리스트를 꼽음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의 정수를 가슴에 품고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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