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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한 Apr 02. 2023

쟤가 ADHD가 아닐리 없어

당신이 자신의 ADHD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내가 ADHD를 처음 인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못되게 굴던 사람 덕분이었다. 방송 작가로 8년을 일하다가 처음으로 이직을 했다. 그 자리에 날 부른 건 내 친구였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하는 일마다 지적하기 바빴다. 처음 입사하고 나서 일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듣고, 잠시 둘이 담배를 피우러 나왔는데 나보고 사람들의 말을 끊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때 새롭게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고, 궁금하거나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많았다. 별생각 없이 메모를 하며 중간중간 궁금한 걸 물어봤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같이 설명을 해주던 당시 나의 상사인 친구와 친구의 여자친구 둘에게 열심히 사과했다. 일에 너무 집중해서 내가 말을 끊는 실례를 하는 줄 몰랐다고.


그 이후로도 과거의 그 친구는 일 하는 중간중간 나에 대한 지적을 서슴지 않았다. 의견을 분위기 보며 내라던가, 말이 너무 많아서 싫다던가… 그러니까, 보통의 현대인이라면 쉽게 해 줄 수 없는 원색적인 비난을 아끼지 않고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맙게도 친구는 한 방에 카운터를 날려주었다. ‘쟤가 ADHD가 아닐 리가 없어.’ 하고. 그의 여자친구도 내게 말했다. ‘저는 이렇게 모든 것에 빨리 질리는 사람을 처음 봤어요.’ 지금 다시 곱씹어봐도 짜증스럽고 화나는 말이다. 내가 그 회사에 근무하는 기간 동안 그들은 은근하게 나를 걱정하거나 쿨한 척 하며 나를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말을 툭하면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내 질병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취하게 해준 은인임에도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난다.


그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분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쿨하게 ‘그렇긴 해.’ 하고 넘기는 게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말을 좀 조심 해주면 안 될까. 나로 인해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내가 고칠게.’라고 말해야 했다. 그럼 내 마음에 상처가 조금 작게 남았을 텐데… (그들은 훌륭한 스타트업의 상사답게 날 산만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하길 망설이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한 지적이 아닌 것들은 하나도 넘기지 못하고 날 쥐어뜯었다… 암튼 이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아무튼, 나는 INTP에,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꽤 무딘 편이라 대체로 어떤 비난을 들으면 ‘그렇긴 하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적을 2년 가까이 쌓아두며 듣자  내 마음은 상처가 나다 못해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고, 지옥에서 온 T 100%의 인간답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업무가 산발적으로 오는 방송계와 달리 회사에는 내가 안 어울리는 모양이다. 약 먹고 해결합시다.’ 그렇게 나는 처음 ADHD를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당시 회사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았는데, 나름 신경정신과 유경험자였던 나는 의사 앞에 앉은 뒤 아주 간단하고 노련하게 설명했다.


“저에게 ADHD가 있는 것 같은데요, 간단한 검사와 함께 약을 처방받고 싶습니다.”

“환자 분, 검사는 전문가인 저와 내담 후, 여부를 판단해서 할 거고요. 우선 무엇이 가장 불편한지 말해주시겠어요?”

“직장 상사가 제가 ADHD가 아닐 리가 없대요. 해결하고자 합니다.”


인스타로 치면 기도하는 손 이모지가 붙을만한 깔끔한 대답을 했는데, 전문가는 달랐다. 내 대답을 그냥 넘기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을 때 참 속상하셨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의 벽 중 무언가가 개박살이 나며 공중으로 분해된 것 같았다. 마음이 무척 아팠고, 눈물이 펑펑 터질 것 같았다. 그러게, 왜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속상하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바보인가? 하지만 나는 노련한 INTP였기에 자괴감에 빠지는 대신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 말했다.


“아뇨, 그다지… 선생님께서 오늘 제가 ADHD라고 판단되면 바로 처방이 가능한가요?”

“…… 음, 그럼 우선 ADHD 문진을 해볼까요?”

“네.”

“어떤 점 때문에 가장 많이 지적을 받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그냥 저를 전반적으로 혐오하는 것 같아요.”

“날 지적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어요. 우선 확인해 봅시다.”


의사와 간단히 문진을 해본 결과 ADHD에 대해 묻는 모든 문항에서 거의 한 두 개만 빼고 ‘매우 그렇다’를 기록했고.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짜 이렇게 ADHD가 아닐 리가 없네요.”


하도 나에 관한 원색적인 비난을 들으며 마음을 다쳐놓은 덕일까? 날 배려해 주는 의사의 말과 객관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검사지의 공격적이지 않은 말은 내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래, 예상대로 ADHD구나. 그럼 대충 콘서타나 스트라테라를 처방받은 뒤에는 이 지옥이 끝나겠지. 이 보기 괴로운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지금 무언가 마음에 내가 혹시 이 사람처럼 ADHD, 혹은 ADD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나처럼 나쁜 사람을 만나서 원색적인 지적이나 비난을 듣기 전에 빨리 전문가를 만나라. 운이 좋다면 별 타격 없이 좀 더 손쉽고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아무튼.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 전문가답게 의사는 나의 정신과적 이력을 알고 싶어 했고, 날 자극하지 않는 은은한 상담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아래의 5줄로 그와의 상담을 거부했다.


“제가 인생에 굴곡이 현대인 답지 않게 많습니다. 이미 정신과에 내원한 경험이 많고요, 마음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제 점심시간이 현재 20분 남았습니다. 정말 죄송한데 빠른 처방과 진료를 도와주실 순 없으실까요?”


의사가 공감해 준 순간부터 이미 내 눈에 눈물이 반쯤 고여있었기 때문일까? 의사는 고맙게도 상담을 이어가는 대신 며칠 후 보자는 말과 함께 내게 콘서타를 처방해 주었다. 그게 바로 내가 콘서타와 처음 만난 날의 일이다. 나는 그 병원에서 의사의 조심스러운 접근을 받으며, 얼마간 약을 타먹었다. 하지만 먹으면 뉴런이 터지는 기분이라는 다른 환자들의 말과 달리 나는 콘서타에게서 그다지 큰 효력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훌륭한 ADHD 답게 약 먹는 것 자체를 까먹기도 해서 오락 가락 하는 몸상태에 괴롭기까지 했다. 대충 진료비와 약값으로 직장인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던 나는 큰 실망과 도탄에 빠졌다. 왜! 왜 나는 이것조차 쉽지가 않은 건데? 내 인생은 왜 블로그 후기처럼 한 번에 좋아지질 않는 거냐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는 동안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흘렀고, 내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답이 떠올랐다. 그랬다. 이제는 미루지 말고 나의 정신병과 마주 볼 시간이다. 내 마음속에는 대체 뭐가 있길래 나는 손쉽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는 걸까? 그게 뭔지 몰라도 멱살을 잡고 뿌리째 뽑아내고 말겠다. 그리고 그 강인한 의지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들었다.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자면 어떻게 하지? 이 쪽이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데? 그리고 이상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내가 상처받으면 어떻게 하지? 정말이지 더 이상은 코딱지만큼도 상처받기 싫은데. 그럼 진짜로 못 견디고 콱 죽어버리는 게 빠를 거 같은데, 나는 심지어 죽을 용기도 마음도 없잖아. 진짜 개판 났다. 어떻게 해야 해? 이런 고민 따위를 하던 때, 머릿속에 불현듯 몇 년 전에 썼던 일기가 떠올랐다.



“내가 리한씨의 과거를 묻지 않는 게 과연 상담에 필요 없어서 일까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나 할 법한 까리한 멘트가 내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었다. 상담을 거부하는 나를 마치 신내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꿰뚫어 보는 듯했던 의사가 했던 말이었다. 게다가 이 병원은 집에서 10분 거리. 아무리 귀찮아도 집에서 대충 앞 구르기 3번 하면 갈 수 있을 법한 거리다. 그럼 천하의 게으름뱅이인 나도 치료를 미룰 수 없겠지. 좋아. 어쩐지 용할 것만 같은 저 의사를 만나보자. 그리고 그때 나는 결심했다. 만약 의사가 최고의 의사가 아니더라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의사가 최고의 의사가 아니라면 내가 최고의 환자가 되어 보겠다. 멋진 학교를 나온 석박사를 이용해서, 이번에야말로 잘 살아보고야 말겠다. 돈과 시간이 얼마가 들든,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왜냐하면 이대로는 죽어도 못 살겠으니까. 근데 내 손으로 날 죽이는 것만은 하기 싫으니까. 마지막으로 무슨 짓이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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