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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빛 아침별 Dec 08. 2021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로 균형 잡기

 


위기의 시작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세계 경제가 덜컹거리며 위기의 시간으로 불안하고 무거웠듯  역시도 그러했다. 대구 대확산 이후에는 인류멸망의 좀비 영화 "나는 전설이다."부터 "부산행" 등등을 떠올리게도 했던 텅 빈 거리는 마음속 아비규환의 상태로 저장이 되었다. 특히 근무지가 병원이었기에 확진자를 민감하게 셈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선별 진료실에 끝없이 늘어선 줄이며 계속 바뀌어지는 지침들, 이태원 클럽 확산으로 직접적으로 코로나 영향권에 들어오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무엇보다 5학년 딸아이를 7살 아들의 보호자처럼 집에 두고 출근해야 하는 아침이 참으로 무거웠다. 


조직의 위기관리를 위해 내부적으로 외부 선발은 자꾸 미루고 내부 인력을 이동시키며 애를 썼기에 환경의 변화에 비교적 유연하지 못한 나의 마음은 한없이 불안하고 부산했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출근하기 시작한 지 그렇게 3-4개월이 지났을  때쯤, 여느 때처럼 아이들 점심 도시락을 싸놓고 서둘려 출근을 했다. 내가 부서 이동을 하기 전부터 사직서를 냈다던 그녀가 진짜 그만 두신 다고 한다.



폼 잡다가 망했네 망했어


두 아이를 다섯 살 터울로 출산하고 10여 년 그 이상의 시간을 출근하는 엄마로 살았는데 여전히 직장에서는 아이들 걱정, 집에서는 직장 걱정으로 혼란했고 심약했던 아주미였다. 몸과 마음이 온전치 않은 의욕 저하 생계형 직장맘, 소심쟁이 쫄보인데 아닌척하느냐고 비겁 주의자  또는 여리 여리 심약 쟁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딴에는 크게 '위기는 기회다'를  외치며 행동하고 싶었던가보다.


그렇게 드디어 17년을 지속했던  간호사를 그만두었다. 아이 둘 육아휴직 기간을 빼고는 쉬어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의 시간에 맞추자는 핑계 김에 반쪽자리 쉼을 선택하고 1년이 지났다. 딱히 이직이나 사직을 고려했던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상상만 가득했던 사직을 해버렸다.


 그 이후 내 생의 최고 오랜 시간을 엄마 껌딱지의 최고봉 1학년, 6학년 권 남매와 함께 집에서 보내고 있다. 아이들을 온전히 챙겨보려는 반쪽짜리 쉼이었다. 나에게서 나를 분리시켜 조금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의 나는 엄마로 아내로 딸로 그리고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뒤죽박죽 엉켜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며 살고 있었다. 잘만 버티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제자리걸음을 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만들어 살았던 시간들이 꽉 맞는 옷을 입은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



현실 허당파 + 맥시멀 투머치파 마음 부자

 완벽주의자도 여러 유형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엄마 뱃속부터 가지고 태어난 현실 허당 파였다.  결과에 대한 자책이 심한 편이고 자존감이 참 낮아졌다. 완벽 못 할 생각에 시도도 못하는 맹꽁이였고  따라갈 수 없다고 단정 지어버리니 하고 싶어도 아예 시작을 못 하거나 시작을 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강박적인 면이 있었다.  또 마무리를 못하고 시작만 하는 반복적인 과정 중에 살기도 했더라는, 계속 속 빈 강정으로 더하기만 하는 삶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몸과 마음에서 빼기가 더 중요하다는 신호를  적절한 때에 보내주었다.



더하기와 빼기의 균형 잡힌 삶,
껍데기뿐인 폼 잡는 엄마 말고
폼 나는 내가 먼저 되어야겠다



" 딸이 자기 닮았네, 자기 일할 때 이를 악물고 해내잖아." 지난 근무 때 동료와 딸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던 말. 그래서 그런 이유로 연령보다 치아 마모가  많이 된 건가  하며 웃어넘긴 적있다. 건치를 주장하며 치아건강을 자신했는데 80살 호호 할머니 치아를 가지고 있다는 치명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오징어를 씹거나 할 때 삑삑 소리가 나고 턱이 자주 아프고 두통도 생긴다.  잘 때도 이를 앙 물고 자거나 이갈이를 하거나 긴장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마음과 몸에 계속적인 치료와 관리필요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기 싫고 미루고 싶은 일은 특히 나 그렇지 않은가? 결국 꾹 참고 해내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꾹 꾹 꾹 몇 번을 참아냈는데도 스트레스가 없어지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 오답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삶의 행복찾기

 꾸역꾸역 지속하는 삶을 멈추라고 누군답해주기를 기다렸다. 분명 스스로가 정하고 답해야 할 문제임을 알면서도 계속 회피만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저 땅 끝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감당이 안 되면 내려놓자. 지속하기만 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일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투머치파 위대한 마음을 발견하며 삶의 전반적인 진정한 행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행. 복... 항복과 한 끗 차이
 진정한 삶의 행복



욕심내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배워 와서인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오해하며 살아왔기 때문 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위를 정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 범위가 점점 커지기만 했고 '나의 행복은 여기까지야'라고 정해두기로 했는데  참 힘들었다. 그래서 애쓰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항복했더니 드디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듯하다. 삶은 어찌할 거나 더하기보다 빼기가 정답이었다.


행복은 범위를 정하는 것도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닌 의미라고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은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라고도 정의하고 싶다.  진정한 삶의 행복이  지극히 주관적인 주제이기에 그리 정의하는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난 행복하다'라는 마음보다 '내일 더 행복할 거야'라는 마음으로 살았기에 행복에 항복하며 살았음은 분명하다.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는
행복에 항복하지 않는
 본연의 내가 된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속에서 타협으로 뭉뚱 그려지는 삶을 강요받고 타인이 만든 허상에 의존하는 나보다는 본연의 나를 먼저 찾아봐야겠다. 더 이상 내가 빠진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겠다. 그동안은 무채색이 잘 어울리고 좋아해야 하는 줄만 알았는데 찬란한 오색빛과 무지갯빛을 참 좋아하고 있었다. 무채색이 어울려야 하는 삶 사이에서 더하기와 빼기로 균형을 잡아본다. 오색빛과 무지갯빛을 좋아하는 나를 모른척하며 무엇이 될 거라는 섣부른 추측이나 판단은 금물, 단단하고 지속 가능한 하루하루가 더해진 삶의 연속선 상에서  걸어가 본다. 그 어딘가에서 그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분명 은은하게 빛나는 나를 발견할 거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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