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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Jan 01. 2021

새해맞이 의식

남편과 남동생의 차이

새해가 오면 꼭 치른 의식이 있다. 2020년 1월 1일에 남편이 응급실에 가지 않았으면 자그마치 25년을 이어온 셈이다. 송구영신예배 후, 새로운 한 해를 맞은 벅찬 감동을 품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시가 넘었다. 평소에는 기를 쓰고 잠을 청 시간이지만 새해니까, 새해라서 저만치 달아난 잠은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건 따뜻한 이불과 먹거리.


소화가 안될까 염려한 아빠는 안 드신단다. 엄마는 '시간이 몇 신데 자야지'라며 딱 한 젓가락만 드시겠단다. 동생이 소리친다. '그럼 2개 끓인다.' 그렇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항상 라면을 먹었다. 말이 우리지 동생과 나의 새해맞이 의식이다.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는 엄마도 이날만큼은 눈감아 주셨다. 엄마가 끓이던 라면을 내가 이어받다가 라면 종류에 따라 다른 냄비를 사용하는 동생에게 자연스레 바통이 넘어갔다.


엄마의 라면은 항상 부재료가 추가된다. 콩나물, 대파, 새우 등 냉장고에 있는 재료마다 맛이 달라진다. 내가 끓인 라면은 항상 면이 퍼진다. 딴에는 영양을 생각해서 달걀을 넣는데, 타이밍을 놓치는지 그릇에 담기만 하면 죽이 되어버린다. 동생의 라면은 면이 살아 움직인다. CF의 한 장면처럼 보글보글 국물이 연신 끓어오르고 면과 국물의 환상적인 비율. 흉내 낼 수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신의 경지다.



결혼하고 새해가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새해맞이 의식을 주입시켰다. 11월 말에 결혼하고 곧장 신혼여행을 다녀온 터라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물론 신혼여행에서도 우리는 이틀에 한번 꼴로 라면을 먹었다.) 한참을 듣던 남편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여보, 당신한테 솔직하게 말을 못 했는데 사실 나는 면 안 좋아해.' 날벼락. 날벼락. 이런 날벼락이 없다.   


씩씩대며 남편을 몰아세웠다. '연애할 때도 라면, 칼국수, 짬뽕 다 잘 먹었잖아!' 아니란다.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맞춰 준거란다. 사실은 이다. 남편은 대학시절 조교를 했다. 점심시간이 있었지만 완벽주의 성향 탓에 교수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 항상 자리를 지켰고, 그러다 컵라면을 박스채 사놓고 한 끼 때우자는 마음으로 지겹게 라면을 먹은 것이다. 배신감이 들었다. 새해를 맞이하고 남편과 함께 먹을 라면을 꿈에 그리고 있었건만...


어느덧 새해가 왔고 남편은 '짜잔! 하며 라면을 꺼내 들었다.'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컵라면이었다. 나는 컵라면파가 아니다. 그래도 지겹도록 먹은 컵라면을 기꺼이 나를 위해 먹겠다는 남편이 고마웠고 우리는 그렇게 컵라면으로 새해를 맞았다. 설거지도 없고 뒤처리도 깔끔한 컵라면이었지만 뭔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았다. 예년과는 사뭇 달랐다.



코로나로 정신없던 2020년이었지만 나는 습진과 전쟁을 치른 2020년이었다. 병원을 세 군데나 갔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다리까지 퍼진 습진을 보고 놀란 엄마의 호통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갔다. 모든 스테로이드 연고를 중단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괜찮았지만 작은 행복인 카페인과 인스턴트 금지는 가혹했다.


암울한 마음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일단 엄마한테는 내일 말하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동생의 손에는 과자와 음료수가 한아름 들려 있었다. 물론 라면도 함께. 유리 냄비에 정성스레 끓인 라면이 상에 올려졌다.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국물에 싸인 면발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파김치와 식은 밥도 거드니 이와 같이 완벽한 한 상이 어디 있으랴!


이젠 코로나로 오갈 수 없는 상황이라 영상통화로 아빠, 엄마, 동생의 얼굴을 본다. 내가 빠진 가족이다. '삼촌 삼촌'을 외쳐대는 아이의 소리에 동생과 추억이 따라온다. 설거지를 해도 좋고 라면 국물이 흐른 상을 닦아도 좋으니, 내년에는 함께 새해맞이 의식을 하길 바라본다. 새해를 맞이한 오늘, 동생이 좋아하는 사진을 보며 목까지 차오른 그리운 마음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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