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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Feb 16. 2021

글의 마지막이 아쉽네요.

"언니, 무조건 <진달래꽃> 선택하세요. 그러면 A+받아요!"


세월의 흔적이 피어난 가방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교수님은 시를 가르치셨다. 수업은 독특했다. 발제할 시 한 편을 분석해서 과제를 제출하되 반드시 원문을 복사해서 첨부하기, 발제 전에 시 암송하기, 발제 후에 학우들과 교수님의 질문에 답하기. 질문자는 보너스 점수를 받지만 교수님이 인정하는 질문 수준일 때만 가능.


늦깎이 편입생을 보듬어준 세 명의 천사들은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을 택하라고 입을 모았다. 작년에 자신들이 겪은 치욕과 숱한 질문에 맞선 무용담을 들려주며 말이다. (족보처럼 내려온 선배들의 자료도 보여줬다.) 하지만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택했고 발제가 끝나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딱 B+정도네."  

학기가 마치고 성적표엔 B+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글이 좋았다. 시는 더 좋았다. 보장된 안락함을 스스로 등질 정도로. 3년을 일하며 모은 돈이 등록금으로 사라져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학문으로 다가온 시는 낯설기만 했다. 철저히 지켜지는 운율, 연과 행이 한눈에 그림처럼 들어오는 규칙적인 시,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시를 아름답다 일컫는 수업이 힘에 부쳤다.


하지만 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시를 분석해야 했다. 이리저리 시를 해체하며 내 안에 요동치는 감정을 도려내 연습 했다. 늘 감정이 앞섰던 나는 그때부터 시가 어려웠고 글이 무서웠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른 행세를 하는 아이처럼 글을 아는 척, 시를 배운 척 연기했다.


글이 두려웠던 내가 브런치에서는 글의 중압감을 벗기 시작했다. 형식에 맞춰 욱여넣던 생각이 터지기도 했고, 서론-본론-결론보다 순간에 휩싸여 핸드폰으로 30분 만에 쓴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전 글은 새벽 1시가 넘도록 마지막 문단을 고민하다가 뜬금없는 유머로 갑작스레 마무리했다.  

  

오래도록 내 글을 보신 분이 "글의 마지막이 항상 아쉽네요."라는 댓글을 남겼다. 지금까지 쓴 글을 다시 살폈다. 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19편의 글 모두 다 수정을 거친 글이다. 적게는 조사부터 많게는 몇 문단을 바꾸기도 했고 더하면 제목까지 바꿨다.


내가 나인지 모르는 이 공간에서도 남을 의식한 것일까? 나를 위한 글쓰기와 남을 위한 글쓰기에서 머뭇거리는 내가 보였다. 글 속엔 나인지 아내인지 엄마인지 모를 이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혼돈 속에 자리한 내가 꾸역꾸역 글을 쓰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내 글의 마지막이 아쉬운 것을. 내 글을 B+로 평한 교수님의 질문에 "제가 다니는 교회는 첨탑에 종이 없어서 언제 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유머로 받아쳤었다. 지나서 돌아보니 고집과 아집으로 덮인 자존심이었다.

 



눈을 감고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되뇐다. 마침표로 끝난 글에서 느낌표가 떠오른다.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을 암송해본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지만 눈물 흘리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누군가 내 글의 마지막을 본다면 무엇이 떠오를까.


내 글변명과 변호 덧입히기보다 오롯이 나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 아내, 엄마, 딸의 경계선 사이에서 머뭇거 또한 나로 받아들이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글을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힘들었던 교수님의 수업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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