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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Mar 22. 2021

M Kim님께

"아빠! 어떤 분이 아빠가 응모했던 공모전 글을 보고 싶어 하세요. 저작권 침해하면 안 되니까 여쭤보는 거예요. 글 올려도 괜찮겠어요?"

"그래? 나는 아무 상관없다."


아버지께 공모전을 제안할 때,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퇴직해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과 이왕이면 입상까지 해서 기를 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시간들이지 말고 간단하게 손 봐줄래?'라는 아버지의 말에 제가 한 일은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고친 일입니다. 글이 달라지는 것은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으셨고, 제가 손을 대아버지만의 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공모전에 응모하지 않으셨고, 입상도 못하셨지만 저에게 아버지의 공모전은 큰 의미였습니다. 퇴직하고 단 한 번도 가족에게 털어놓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제 글에 라이킷을 누르신 M Kim님! 저희 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이거나 이런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시는 분일 거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이 글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기회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M Kim님 덕분에 아버지와 저만의 추억이 또 하나 쌓인 것 같아 감사드리며, 아버지의 글을 올려봅니다.




 < 나의 황금빛 은퇴 이야기, '나는야 장애인 활동 보조사' >



  나는 흔히 말하는 베이비부머로 1958년생이다. 85년 공직에 첫발을 디딘 나는 시골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3년간 영덕군에서 근무하다, 88년에는 현재 거주하는 부산으로 옮겨 동사무소와 구청을 오가며 근무했다. 농촌 행정과 도시 행정을 두루 접해보았기에 행복한 공직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공직 후배들을 위해 몇 년 앞서 명예퇴직을 하는 것이 그들과 조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뜻과 달리 주위의 반대가 심해 일 년을 앞둔 시점에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일 년을 앞둔 시점에서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백세 시대, 고령화 사회가 되어 가는데 60의 청년(?)이 집에서 마냥 밥만 먹고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퇴직일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간 농촌교회 봉사활동 때, 도배한 경험이 꼼꼼한 내 성격과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퇴직 후 도배사가 되어 우리 구 내 봉사활동 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017년 6월 말, 그렇게 나는 은퇴를 했다. 근무하던 구청에서 직장상사와 후배 직원들이 베풀어준 뜻깊은 퇴직 모임과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이제 매일 출근하여 업무를 마주쳐도 되지 않겠구나.’하는 안도감과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 은퇴를 해야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야속함과 밀려난 세대로서의 자각이 만들어 낸 상실감도 조금씩 찾아왔다.    


도배학원을 찾아가 원장과 상담을 했다. ‘몇 살이세요?’ ‘이제 60입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벌써 이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걸까? 나는 쓸모없는 고령자일 뿐인가? 제2의 인생이라 생각하며 의욕적으로 출발하려 했는데 실망이 컸다.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을 읽고 등산을 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집에 있다 보니 게으름과 안일함에 빠지기 시작했다. 훌쩍 몇 개월이 지나버렸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무능한 것 같은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이 부러워지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는데 이젠 집에만 있구나.’하며 자괴감도 들었다.    

 

하루는 답답함에 창문을 열어 아래를 봤는데 여성 요양보호사가 어르신을 돌보는 것을 보았다. 문득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돈을 번다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다면 그 사람과 이 사회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8가정당 1가정에 장애우 1명이 있다고 하니 그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장 우리 구 노인·장애인 복지관을 찾아갔다. 제2의 인생을 사는 내가 이 사회에 보답하며 살 수 있는 일이 있겠냐며 여쭤보았다. 상담 중 장애우를 돌보는 일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40시간의 교육과 10시간의 실습이 있으면 이수증을 받고 장애우를 돌볼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장애우 돌봄 기관 교육센터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았다.

    


  다행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연락이 왔다. 그 아이는 지금껏 두 명의 선생님이 포기한 영훈(가명)이라는 아이였다. 동행한 센터 선생님이 영훈이 보고 “이 선생님이 어때?”하니 냉큼 “좋아요”라고 답한다. 장애 활동 보조사 첫 취직이 영훈이 손에 달린 셈이다. 합격이었다. 퇴직 6개월 만에 재취업에 성공(?)한 셈이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순간, 무척이나 기뻤다. 내가 맡은 일은 영훈이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 복지관에서 돌아온 영훈이의 저녁식사를 챙겨주고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27살에 몸무게가 80킬로인 다운증후군이 있는 영훈이는 늘 싱글벙글 웃고 누구를 만나도 “안녕하세요”하고 꼭 인사를 한다. 한 번씩 보는 주민들에게는 인기가 좋고 동네 스타인 셈이다. 이런 영훈이의 모습을 예쁘게 본 주민들은 간혹 간식을 주기도 한다. 저녁 식사 때는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같이 지낸 시간이 많았는지 국이 꼭 있어야 밥을 먹는다. 맛있는 반찬은 같이 먹자며 나눠주는 덕분에 빼빼 마른 나도 살이 6킬로나 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집 주위를 1시간 정도 산책하는데 예외가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은 해야 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늘 속이 더부룩했는데 어느덧 다 나았다. 영훈이 덕분이다.


영훈이는 만 원 한 장보다 천 원 열 장이 있으면 더 행복해한다. 지갑을 보여주며 “돈 많다”라고 자랑을 한 후 고이 넣는다. 돈을 아끼는 영훈이는 간식을 사 먹을 때 “내가 사줄게”라고 하지만 천 원짜리 한 장 이상은 잘 내지 않는다. “한 장 더 내야 된다”하면 “됐네요”하기에 나머지 돈은 늘 내가 내준다. 또래처럼 동전 노래방 가는 것도 좋아한다. 춤을 추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데 그 곡이 아파트에서 갑자기 산토끼로 바뀌기에 나를 웃게 만든다.     


영훈이는 혼자 있으면 불안한지 하루에도 수십 번 내게 전화를 건다. 내가 가지 않는 날은 119나 경찰을 불러 아프다고 꾀병을 부린다. 밤 중에 걸려온 전화가 경찰이나 119 대원이라 당혹스러운 적도 많았다. 남의 가게에 불쑥 들어가 말을 거는 영훈이 때문에 항의를 받은 적도 많았다. 아무리 가르쳐도 잊어버리고 똑같은 장소에서 장난을 반복하는 영훈이를 보며 때론 화도 났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영훈이를 돌본 지 벌써 1년 9개월이 되었다.     



  요즈음 영훈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혹 초심은 잃지는 않았는지, 영훈이에게 조금 더 잘해 줄 수는 없는지 말이다. 또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 일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도 된다. 그럴 때마다 영훈이를 돌봐주어서 감사하다는 영훈이 어머니의 인사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영훈이를 보며 마음을 굳게 먹는다.     


영훈이의 하루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아무 가게나 불쑥 들어가는 영훈이 대신 사과하는 수고도, 아무 곳에서나 화장실을 찾는 영훈이의 소변을 챙기는 일도, 과자 부스러기를 일부러 쏟아 청소하게 만드는 것도, 여러 가지 귀찮게 하는 일들도 감당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야 하는 장애인 활동 보조사이고 또 영훈이가 말하는 선생님(스승)이니까. 그리고 영훈이가 나를 무척 좋아하니까.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후에도 복지관에서 돌아온 영훈이에게서 어김없이 전화가 오겠지. “선생님 빨리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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