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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r 12. 2022

당신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8살 무렵이다. 나는 엄마가 잠들면 엄마의 자는 모습을 보며 엄마의 코 끝에 작은 손을 살그머니 대어보곤 했다. 엄마의 소리를 확인해야 안심이 됐던 것이다. 엄마는 나를 야단칠 때마다 "내가 너 때문에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덧붙였다. 나는 엄마의 부재 혹은 죽음을 늘 떠올렸고 엄마가 사라질까 봐 자는 동안에도 불안해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의 어린 내 모습 드라마 속의 장면처럼 타인화되어 어제의 기억처럼 남다.


엄마는 30대 초반의 젊고 건강한 여성이었다. 새벽이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옷을 입고 깜깜한 하늘을 머리에 얹고 별빛에 혹은 달빛에 길을 달렸다. 나는 그녀의 뒤를 몰래 쫓는 그림자였다. 혹여 걸음 소리를 들킬세라 몰래 그녀의 조깅을 뒤따라 다녔다. 칠흑 같은 거리와 쏟아지는 별빛이 무서웠고, 안개가 자욱했던 그 동네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냉랭하게 피부를 감싸 안았다. 나는 새벽마다 달리는 엄마를 따라잡기에는 무력하고 깡마른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엄마의 뒷모습을 쫒다가 너무 무섭고 서러워서 '엄마'하고 소리쳐 부르고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게 하면 한 번을 뒤돌아 보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영영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깜빡깜빡한 가로등 불빛이 어둑어둑한 찻길을 흐릿하게 비출 때마다 차에 변을 당한 개구리 사체가 언뜻 보이던 그 길에서 한 번씩 주저앉. 그리고 다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일어 엄마가 지나간 길을 뒤쫓다. 시 후 엄마 멀리서 흐린 형상으로 멈추 뒤돌아서서 내게 소리치곤 했다.


 "따라오지 마."


엄마의 메아리가 서러웠던 것일까, 개구리의 형체들이 무서웠던 것일까 엄마를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어두운 찻길을 다시 뒤돌아 뛰던 어린 소녀는 이제 엄마가 되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불안이야말로 실존이라고도 정의한다.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는 불안과 불안전성을 느끼는 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자 증거라고 말이다. 불안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면 젊은 시절의 엄마는 불안으로 점철된 내 어린 시절에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일 것이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모든 기억 속에서도 오로지 불안이 주는 두려움, 흔들림 그리고 서러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당시 엄마의 존재는 그렇게 내 삶에 실존으로 남았다. 그러나 젊은 엄마의 눈에 비친 어린 나는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사라질까 봐 밀려오는 잠을 억지로 깨고 엄마의 숨을 확인하던 나는 무엇이었을까? 짐덩어리, 어린애, 무능력자, 귀찮은 존재... 뭐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너로 인해 내가 살았고 네가 내 인생의 태양이었어.'라는 식의 드라마에서 나올 듯한 멋들어진 말은 나와는 동떨어진, 멀리서 들리는 환청과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혼자 연필을 깎다 깊이 베인 6살 아이의 손가락 상처에 걱정보단 짜증을 앞세우던 나의 엄마, 내 오른발 뒤꿈치가 친구의 자전거 바큇살에 갈려서 찢겨도 병원을 데려가지 않고 그냥 두었던 엄마. 그 덕분에 나의 왼손가락 검지와 오른발 뒤꿈치는 아직도 그때의 흉터가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다. 생리대를 처음 사용해야 했던 때, 신체의 첫 변화에 대한 자각도 없던 그때 '넌 이런 것도 혼자서 처리 못해서...' 라며 한숨을 쉬고 거칠게 나를 밀치던 엄마의 손길은 어른이 된 지금도 낯설기만 하다. 당신의 무신경함 속에 다쳐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흉터는 내게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당신은 애써 회피하려 하지만, 지나온 세월에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고 더욱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달고서 말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도 차마 물을 수 없던 이 이야기를 엄마 일방적인 연 끊음 직전에 물어보았다. 내가 받았던 힐난과 비난 그리고 책임에 대한 말들이 물음표를 지닌 채 엄마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힘들어도 자식을 버리지 않고 굶기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나는 내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며 나의 희생으로 애써 이어왔던 관계가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창가에 앉아 어린 시절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의 앙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빛을 들여다본다. 어린 나의 눈 속에 아픔, 수치심, 연민이 고여있다. 나는 나를 두 팔로 안아본다. 그리고 엄마의 두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어린 나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가식 하나 걸치지 못한 채 그저 부모가 뱉어낸 수많은 비아냥과 가시 돋친 비난을 감당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당신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태어난 작은 묘목입니다. 나의 토양과 당신의 토양은 다릅니다. 우리는 뿌리마저 다르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지금의 나는 젊었던 시절의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당신이 나를 양육했던 방식은 옳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제 나는 압니다."


다른 토양과 다른 공기로 숨 쉬는 내가 어린 나를 바라본다. 나의 들숨과 날숨이 비 맞은 비둘기의 날개처럼 떨린다. 나는 밀쳐지기보다는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고 위로가 필요했으며 애정과 사랑이 깃든 말에 목말랐었다. 눈물은 공기방울이 되어 날아간다. 나의 애달프고 서러운 기억들은 세월 속에 덧칠해진다. 지나간 것은 추억할 수는 있지만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새로운 계절은 속삭인다.

 




내 아이가 묻는다.

"엄마, 나 학교에서 필요한데 종합장 하나만 사줄 수 있어요?"

"물론이지, 이따 같이 문구점에 가서 직접 골라볼래?"  

아이의 웃음이 편안하다.

나와 아이는 두 손을 잡고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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