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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r 14. 2022

편애, 그 기울어진 운동장


편애: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


흔히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희생과 애정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것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공통되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부모의 자식 사랑은 공정하고 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부모의 편애에 서운함을 느끼며 자란 사람들은 그처럼 공평하고 공정한 사랑 왜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반지 끼워 애지중지하는 손가락과 주로 일하는 손가락이 다르듯이 말이다.

 

친정엄마가 나와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받고 자란 자식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좌절감에 대해 토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통의 기혼 여자에게 친정엄마는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그립고 애틋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친정엄마는 항상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든든한 아군이자 세상 끝에서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인들과 이야기해본 후 나는 친정 엄마가 나와 연을 끊었다는 이 상황을 이해받거나 공감받지 못하며 내 심정을 비추는 것조차 얼굴에 침 뱉기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증거를 내보일 수도 없고, 내 인생에 알알이 박힌 것과 같은 경험을 함께 공유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장 소중해하는 것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나의 발언은 상당히 불쾌한 것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찾아보았다.


 Daum의 검색창에 '친정과'라는 단어만 쳐봐도 연관 검색어에 '친정과 연 끊은', '친정과 인연 끊기'라는 말이 생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중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글을 찾을 수 있었다.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274629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에게 자식이 A, B, C가 있다고 가정해본다. 부모 자신을 닮았다던가, 자신의 행동과 비슷하다던가, 왠지 모르게 정이 간다 등의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유로 A를 너무도 사랑한다. 그리고 B, C A에 비해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A의 몫을 빼앗아가는 미운 도둑으로 인식한다. B, C가 있기 때문에 A에게 더 좋은 것들을 해줄 수 없다는 박탈감을 느끼면서 내면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속이나 증여와 같은 재산 분배의 상황이 발생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부모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가끔은 B, C에게도 다정했다. B, C는 부모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편애하는 부모를 향한 자신의 원망에 죄책감을 느낀다. B, C는 채워지지 않는 부모의 사랑을 늘 갈구하고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한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무언가를 해주면 보상으로 부모가 사랑을 줄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자식에게는 계속 퍼주면서 다른 자식에게 받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는 심리가 여기서 기인한다.


이 글에 대해 달린 수백 개의 댓글 중 대다수는 이 내용에 호응하고 수긍한다. 왜 부모가 자기를 그토록 미워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면 속을 후련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댓글은 다음과 같은 일침이었다. 


"수십 년 동안 빨아도 안 나오는 젖을 얼마나 더 빨고 있을 참이냐!"




기자이자 작가인 제프리 클루거(Jeffrey Kluger)는 그의 저서 'The Sibling Effect'(2011)에서 대다수의 부모에게는 편애하는 자녀가 있다고 주장했다. 2011년 UC 데이비스(the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연구진이 768명의 형제와 자매, 그리고 그들의 부모를 조사한 결과 아버지의 70%와 어머니의 65%가 한 자녀를 편애한다는 과학적 근거가 나왔다. 또한 미국 코넬대 칼 필레머(Karl Pillemer)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엄마의 70%는 어느 특정 자녀에게 감정적인 친근감을 더욱 느꼈으며 자녀들의 15%만이 엄마가 모든 자녀를 공평하게 사랑했다고 응답했다. 분명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는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끼는 자녀는 평생 동안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편애의 해로움을 명시한다.  


마음이 쓰이는 곳에 사람의 시선이 더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사랑하는 것에 더욱 좋은 것을 해주고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보고만 있어도 애처롭고 가엾은 것에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것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편애는 분명 차별로 이어진다. 그리고 편애로 인해 소외된 자식에게 부모의 차별은 자신을 향한 자책과 부모에 대한 깊은 응어리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부모가 편애한 사실을 부정할 때 더욱 그러하다. 자식은 생각한다. '내가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이렇게 불공평하구나.'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늘 말로는 모든 것을 같게 해 주었다고 하지만, 필요한 것을 요구조차 할 수 없었던 나와 항상 요구하며 당연한 듯 받아가는 동생이 같을 수는 없었다.

 

20대의 동생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둘 것이라고 했었다. 엄마는 말썽을 피울 바에는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보내자는 의견에 따라 동생을 캐나다로 어학연수 보냈다. 같은 시기에 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돈을 모아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서 동생은 노느라 어학연수 기간 동안 미리 선불로 지급한 어학원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온갖 명목으로 엄마에게 돈을 타다 썼다. 나는 동생이 이해되질 않았다. 예전에 내가 이러한 바를 알고 있었느냐 넌지시 물어보자 엄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욕구가 없었잖니. 너는 뭘 하고 싶은 욕구가 없으니까 요구를 안 한 거지. 네 동생은 다르지."


"그리고 너는 동생이 캐나다로 갔으니까 너도 어학연수라는 걸 가볼 생각한 거 아니야? 고마운 줄 알아야지!"


편애한 기억조차 부정하는 엄마와 평생을 차별당했다고 느끼는 나와의 인식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듯이 나는 그저 그 손가락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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