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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r 12. 2022

친정엄마가 인연을 끊다


친정엄마는 나이 24살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27살에 아들을 낳았다. 고작 세 살 터울의 아이들을 차별하며 키웠다. 세월이 유수히 흘러가도 그동안 변한 것 하나 없는 엄마의 아들 사랑.

나는 너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니 내 할 도리는 다했다며 내 앞에서 언제나 깐깐하고 칼 같은 엄마는 아들의 일에는 하해와 같은 크고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왔다. 덕분에 남동생은 마흔 살이 넘은 지금도 사고를 친다. 엊그제도 9천8백만 원 빚을 6군데의 금융권에서 져왔다.

"엄마 나 없어도 우리 애들 잘 부탁해" 대뜸 전화가 왔단다. 깜짝 놀란 엄마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주식 빚이다. 올케가 통곡하고 조카들도 운다.

 "엄마, 급한 불을 꺼야 하니, 엄마 집을 잡혀서 나 일억만 해주세요." 이자가 19프로, 29프로 등 각양각색이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내가 지금 가진 돈이 5천밖에 없으니 당장 이것으로 이자 높은 것부터 갚자."


남동생은 그동안 끊임없이 빚을 잘 물어왔다. 20대 초반부터 대출을 빌렸다. 신용불량 직전에 엄마는 빚을 갚아주었다. 차를 두 번 사주었는데, 동생은 차 사라고 준 돈을 중간에 써버렸다. 몇 년 뒤 엄마는 차 할부로 남아있던 빚 천만 원 갚아주었다. 동생이 사람을 때리면 엄마는 합의금을 물어주었다. 동생은 그 밖에도 자잘한 변명과 핑계로 돈을 가져갔다. 결혼 전에 엄마는 올케가 알아온 신용정보에 드러난 5천이 넘게 있던 빚도 갚아주었다. 이제는 9천8백 중 절반의 빚을 갚아준다. 동생은 벌써 퇴직금과 연금에도 손을 대었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아들을 걱정한다. 그 애도 그러고 싶었겠냐고,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올케 심정은 어쩌겠냐고, 엄마 아들 관계는 죽어도 끈이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한없이 넓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품는다. 나는 누나로서 이 일련의 일에 대해 동생에게 따끔한 한마디 해야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네가 무엇인데 그러냐며 너의 돈도 아닌데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고 단박에 내 말을 가로막는다.  


"그럼 엄마 나는 가족이 아니에요?"

이모 남편이었던 작자가 나를 폭행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때려서 내 귀가 반쯤 안 들리게 되었는데도 내 탓을 하며 모른 척하셨잖아요. 내 마음은 썩어 들어가도 그 사람들하고 이십 년 넘게 여행도 다니고 밥도 먹고 하하호호 잘 지냈잖아요. 그러다 이모가 엄마 며느리 흉을 보니 단칼에 연을 끊었지 않았어요?


엄마 나는 불쌍하지 않았요? 내가 초등학교 때 그 흔한 종합장 하나 사달라고 했을 때도 내게 소리 지르며 '네가 공주인 줄 알아? 그냥 갱지나 써'하고 무시했었잖아요. 기생충에 감염되었어도 약 하나 제때 사 먹이지도 않아서 밤마다 배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몰라요. 부모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기 하소연만 하니 나는 그냥 입과 귀를 닫고 사는 게 제일인 줄 알고 살았어요. 착한 딸 병에 결려서 백 원 한 푼도 엄마한테 요구한 적이 없었네요.  용돈도 주지 않아서 친구들과 떡볶이 하나 사 먹을 수가 없었고, 문제집 사달라는 말조차 항상 못 들은 체했었지요. 덕분에 헌책방 아저씨가 내가 불쌍했는지 팔다 남았다고 준 헌 문제집 풀었어요. 돈 아낀다고 치과에 제대로 데려가지 않아서 이가 썩다 못해 턱뼈까지 고름이 차, 결국 이를 빼야 했을 때도 엄마 뭐하셨었어요? 겨우 세 살 아래 동생은 20년도 전인 고등학생 때 한 달에 70만 원씩 용돈과 학원비 주었잖아요. 그 애 공부도 진짜 못했는데 대학도 두 번이나 보내주었죠. 후회 없이 공부하게 하겠다면서 엄마 그렇게 동생만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던 거 왜 기억이 안 나세요?

 

24살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직장 구해서 학교 기숙사에서 혼자 고시원으로 이사했고 자취 시작했었어요. 월급 탄 것으로 월세랑 보증금 내고 그렇게 혼자 시작했어요. 엄마 그때 무얼 하셨어요? 또 기억이 안 나시지요. 아들은 대학생 때 투룸짜리 월세 학교 근처에 해주셨던 것도 기억 안 나요? 그 보증금 아들한테 돌려받지도 못했었을 텐데... 제가 직장 생활에서 번 돈으로 공무원 준비할 때 너는 공무원 사주가 아니니 시험 떨어질 거야, 시험 떨어지고 모은 돈으로 대학원 간다 하니 떨어져도 울지 마라 악담하고, 아들은 사주에 공무원 될 거라고 몇 번이든 시도하게 지원해주시고... 참 이해가 깊고 마음이 넓은 엄마세요.

저는 학교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손 벌리지 않았어요. 제가 바꿔드린 세탁기만 3대, 텔레비전 3대, 냉장고 2대네요. 엄마 명품가방, 신발, 옷 중에 제일 좋은 것들도 제가 사드린 것이고요. 제가 아이 가져서 입덧하니 친정서 입덧하는 것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해서 제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르시지요. 몸조리 때도 아이 보러 딱 두 번 와주고 젖몸살이 심해도 모른 척했었잖아요. 너는 나 때보다 호강하고 사는 거야 하면서요. 그래도 맞벌이로 바쁘고 애 키우고 살림 빠듯해도 저는 5년 동안 엄마 통장에 매달 50만 원씩 드렸던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간 비용을 우리가 낸 여행도 매년 몇 번씩이었어요. 생일 땐 돌 된 어린아이 둘러업고 힘들게 생일상 준비했더니 내가 끓인 미역국 보고 '나는 우리 며느리 미역국도 못 끓여줬는데 며느리 미안해서 못 먹겠다' 했었지요. 기억도 안나는 지나간 일 잘 들춘다고요? 똑같이 해주었다고요? 네, 그러셨지요. 내게 백 원어치 마음 주면 그 애는 몇 백배 더 주고 아주 똑같았어요."


서운한 마음을 반쯤 토해 내었더니, 엄마는 너는 잘 살고 있고 너 애들도 잘 크고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면서 이제 인연을 끊자라고 하셨다. 엄마와 아들 사이는 죽어서도 끊이지 않는다더니 딸과의 사이는 가위로 자른 끈처럼 쉽게 잘라지는 것인가 보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 형용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내 안에서 용해되지가 않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얼굴에 빗물처럼 내렸다. 마흔 살이 넘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기댈 곳도 없는 어린 여자 아이처럼 가만히 울었다.




며칠 동안 응어리가 있는 듯 무겁고 서러운 것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 감정이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엄마에 대한 , 불쌍한 마음인가 혹은 부채의식인가 아니면 다 떠나서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에 대한 연민, 동정일까 아직 모르겠다. 나는 이제 이 감정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친정엄마의 연 끊음. 이것을 통해 나는 내 마음에 필요한 내면의 질서를 찾고자 한다.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해서, 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이해의 여정을 떠나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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