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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자 Sep 20. 2019

사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읽은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2017.11.06  Monday



이 책을 사파에서 하노이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다 읽었다.
단편집이었다.

개인적으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 '반짝반짝 빛나는'이나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처럼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모든 단편들이 한 큰 스토리 속에서 비추어지는 다양한 관점, 즉 여러 인물이나 시간대의 차이 속에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어있는 책들을 선호하는데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그냥 오리지널 단편집이었다.

짧은 스토리들의 모음 구성집.


정이현 작가가 여러 문집이나 따로 쓴 단편들을 나름대로의 큰 주제로 묶어서 발간한 책인 것 같았다.
따라서 각 단편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이 되는 구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히 잘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을 빌려 준 친구는 한 챕터를 읽으면 텀을 조금 두고 쉬었다 읽게 되는 책이라고 했다.
바로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엔 약간 무거웠다는 거겠지.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이 단편집은 어둡다기보다는 삭막한 느낌이 조금 든다.

오가는 말들은 정말 다정한데 그 내면은 소름 끼치도록 삭막하다. 한국의 현대인들, 사람들 사이의 관계, 동시대의 삭막함과 쓸쓸함을 각 챕터 주인공의 시점으로 잘 표현한 것 같다.


이렇게 읽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책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왠지 한 챕터를 읽고 나면 개운한 게 아니라 한숨이 푸욱 나오거나 가끔 마지막 줄을 읽을 때까지 숨을 쉬고 있지 않은 나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쉽게 몰입이 되는 책이었다.


제목부터 참 마음에 든다.

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는 이 책 앞부분 작가의 말에 잘 담겨있는 것 같다.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작가의 말 중 발췌



그래서인지 단편들 속에 많은 감정과 내용과 아픔이 돋보인다.
그것 감정들은 꺼내 놓은 것이 아니라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어서 흘러넘치는 감정들이다.
모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숨기려 한다. 그래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을 활짝 열고 보여줄 수 없는 밑바닥까지 방어적인 관계 속에서 남는 많은 상처와 흉터 자국들을 보여주는 단편집이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인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서랍 속의 집' 중 발췌


모든 단편들이 잔잔하게 좋았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그 자신과 상황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감정들이 따뜻하지만 냉정하며,

고요하지만 이해타산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알지만 타인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면들이 돋보였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안나'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안나'는 의사 남편과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돌보는 전업 주부 '경'의 이야기다. '경'은 뜻밖의 장소, 아들의 영어 유치원에서 8년 전 댄스 동호외에서 알았던 '안나'와 마주쳤다. 예전에 알았던 안나는 경에게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유치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의 보조 교사로서 안나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관계, 그리고 그녀의 팍팍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은 안나를 연민하지만 한 편으로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은 자신의 상황에서 안나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안나'라는 캐릭터도 좋지만 주인공인 '경'과 '안나'를 둘러싸고 사람이 사람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고, 씁쓸한, 그러니 또 여윤과 애착이 남는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 또한 많은 생각과 불편함을 남긴 책이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두 엄마 '지원'과 '미영'의 시점으로 쓰인 이 챕터는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원의 딸 '보미'가 미숙아를 낳게 되며 받은 충격과 그 후 지원의 세계가 영원히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산부인과 의사는 미숙아의 상태가 좋지 않으며 수술이 시급하다고 하지만 지원은 수술 동의서를 놓고 갈등에 휩싸인다. 여기에 나오는 고등학생 두 자녀이자 미숙아의 부모인, '보미'와 '승현'의 이야기도 궁금하지만 결국 나와있지는 않았다. 특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의 마지막은 오픈 엔딩이었는데 단편들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무거운 엔딩이었다.


알듯 모를 듯한 스토리와 엔딩들 속에서 궁금한 것은 산더미지만 그러한 궁금증을 모두 해소할 수 없는, 그래서 매력적이었던 단편집이었다. 물론 정이현 작가의 담담하고 깔끔한 문체들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엄마에겐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도록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 '영영, 여름' 중 발췌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내 주변에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의 가식적인 가면을 조심스레 들춰본 기분이었다.


밝고 화사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떻게 나아가는지에 대해 비추어주는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상 모든 일들을 조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책장 끝에 있었다.

그게 발버둥을 치는 것인지, 방관자로서 지켜본다는 것인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소설 속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느낀 만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

읽다 보면 마음이 쌀쌀하고 공허해질 수 있으니 따뜻한 차나 커피를 옆에 놓고 조금씩 들이키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저자 정이현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6.10.10.



작가의 말_정이현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 안의 천사

영영, 여름

밤의 대관람차

서랍 속의 집

안나


해설_ 공허와 함께 안에서 밀고 가기 백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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