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마네의 아르젠트유의 가든에 있는 모네 가족
아르젠트유의 가든에 있는 모네 가족 The Monet Family in Their Garden at Argenteuil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74
Oil on canvas
61 x 99.7 cm
1874년에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린 후 그림 속 친구인 모네에게 선물로 주었다가 2년 후인 1976년에 다시 돌려받는다. 그 후 2년 후인 1878년, 당시 750프랑에 파리에서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의 거래를 거쳐 1964년 미국의 야구 구단 중에 하나인 뉴욕 메츠 설립자인 조안 휘트니 페이슨 Joan Whitney Payson 이 $605,000(약 8억 5천만 원)에 이 작품을 구매하고 1975년 그녀가 사망 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는 그녀의 많은 인상주의 작품 중 하나에 포함되어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조안 위트니 페이슨 갤러리’에 전시되어 만나볼 수 있다.
마네 vs. 모네
클로드 모네보다 8살 더 많은 형인 에두아르 마네는 추정키로는 1866년 즈음에 예술가들과 글 쓰는 작가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했던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 Café Guerbois 에서 처음 만났던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등으로 온갖 악평을 받은 파리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모네는 그림을 그려 돈을 버는 게 급했던 이제 갓 시작하는 배고픈 예술가였다. 초기에 마네는 모네를 보고 자신의 스타일을 너무 모방적으로 따라 하고 그림에 그려 넣는 서명도 비슷하게 베끼는 ‘비열한 패러디 Despicable astiches’ 놈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아래의 마네, 모네 두 예술가의 작품 속 서명을 보니 비슷하긴 하다. a 와 o 의 차이가 그렇게 구별되어 보여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우리만 헷갈렸던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도 많이 마네와 모네를 헷갈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모네 작품을 보고 마네에게 ‘그림 너무 좋던데요’라고도 하고, 모네 작품을 보고 마네에게 찾아가 찬사를 보내는 경우도 많아서 자신을 신참인 모네와 혼동했다는 것에 마네가 많이 불쾌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랬던 둘이 좀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69년 바티뇰의 한 카페였다. 서로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이 통했고, 마네는 젊은 모네의 재능과 실험정신에 조금씩 끌렸고 모네 또한 대선배 마네로 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어느새 가까워진 둘은 1874년 7,8월 여름에 마네는 아르젠트유 Argenteuil 에 있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옆 센강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모네가 살고 있었다. 둘은 그 해 여름 자주 만나 같이 그림을 많이 그리러 다녔는데 서로가 서로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재밌는데?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이 그림이 마네가 모네의 가든에서 모네의 와이프인 카밀 Camille 과 아들인 장 Jean 이 함께 있는 모네 가족을 그려준 그림이다. 이 날 모네 또한 이젤을 앞에 두고 그림 그리고 있는 마네를 그렸다. 또한 때마침 뒤늦게 도착한 르누아르는 마네에게 캔버스와 물감, 붓등의 도구들을 빌려 옆에 자리를 잡고 모네 가족을 그렸다. 이렇게 당대의 그림 대가 3명이 한 곳에서 같은 곳, 다른 느낌으로 각자의 그림 3점을 남기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든다.
아르젠트유의 가든에 있는 모네 가족 The Monet Family in Their Garden at Argenteuil,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7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아르젠트유의 모네 가든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마네 Manet painting in Monet's Garden in Argenteuil, 1974,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마담 모네와 그녀의 아들 Madame Monet and Her Son,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74, 미국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이 당시 마네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서 모네에게 살짝 속삭인다. ‘재능이 없는 친구야! 르누아르에게 그림을 포기하라고 말해!’ 아마도 마네는 르누아르와 친한 사이였기에 ‘난 르누아르의 지금 스타일보다는 초창기 그림 스타일이 난 더 좋더라’라고 말했던 것이리라. 이 날 마네와 르누아르는 둘 다 현장에서 이 그림을 다 그린 후 그 그림들을 모네에게 건네주었다. 이것도 예술가들만 할 수 있는 스웩 같아서 멋있어 보인다. 그 후 2년 후인 1876년 마네와 모네가 잠깐 말다툼이 있은 후 마네는 모네에게 이 그림을 돌려 달라고 요청해서 다시 받고 2년 후에 팔아 버린다.
세 작품이 각각 자신의 그림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것 같아 너무 재미있다. 먼저 르누아르의 그림은 따뜻한 인간애를 전하려는 그의 마음이 파스텔톤의 붓터치 느낌으로 잘 드러나 있는 것만 같다. 모네의 아들 장 Jean 이 닭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엄마 옆에 편하게 기대어 누워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와 달리 마네의 그림은 비교해서 보니 부드러움 보다는 약간은 거친 터프한 느낌이다. 붓터치가 세밀하지 않고 휙-휙- 거침없이 그려낸 모습이다. 물감 덩어리로 특징들만 잡아서 쓱쓱- 그려내었다. 왼쪽 뒤에서 가든을 손질하며 허리 굽히고 있는 모네의 모습도 상의는 파란 물감 덩어리로 하의는 거무스레한 물감 덩어리로 대충 표현한 듯한데 누가 봐도 남자 사람인 모네이다. 붉은색 덩어리 같은데 닭이요, 흰색 물감 덩어리인데 오리요, 이런 식이다. 이게 마네가 리스펙 했다는 스페인의 대가 벨라스케스가 많이 쓰는 기법인 알라 프리마 Alla Prima 기법 (At First, 한 번에 라는 뜻)이라고 한다. 모네의 기법 또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붓놀림이 대단히 빠르다. 짧게 툭툭~ 끊어서 여러 번 자주 그린 듯한 느낌이다. 사라져 가고 변해져 가는 빛을 빨리 잡아 화폭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모네의 마음은 급하다. 그게 붓터치로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보통 이젤을 여러 개 놓고 변해가는 빛에 따라 각각의 화폭에 그림을 그린 후에 스튜디오에 모두 가져와 완성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작품 중에 연작 시리즈가 많은 이유이다. 이렇게 모네와 마네는 이름만 비슷했지 작품과 그림 그리는 기법은 확연히 달랐다.
마네는 이 시기 1874년에 아르젠티유의 센강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림을 몇 점 더 그리는데, 그중에 하나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보팅 Boating 이다. 참 과감하다. 인물 둘을 확 당기고 보트 위라고 알 수 있을 정도의 보트 앞머리 부분만 살짝 보여주고 강물은 너무나 시원스러운 배경으로 전체를 도배해 버렸다. 이러한 구도는 그 당시 일본의 문호가 개방이 되어 유럽에 처음으로 일본의 인쇄물들이 들어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일본화 우키요에 うきよえ 의 색감과 구도와 닮았다고 보기도 한다. 에잇! 작품 속 남자는 마네의 처남인 루돌프 린호프 Rodolphe Leenhoff 가 포즈를 취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자의 흰색 티셔츠와 흰색 바지, 파란색 띠를 두르고 있는 모자 등은 그 당시 한 보트 클럽(Tony Cercle nautique)의 유니폼이 이랬다고 한다. 왼쪽의 여인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어? 여인이 쓰고 있는 모자가 위 모네 가족의 그림 속 카밀이 쓰고 있는 모자와 같네? 그렇다면 마네의 모자를 카밀에게 빌려준 걸까, 아니면 그 당시 유행했던 모자여서 다들 쓰고 있는 걸까? 모르겠지만 재밌다. 여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 색상도 파란색으로 시원시원하다.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 쪽 앞을 넓게 열어 놓아 그림 밖 우리가 배를 올라타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오른쪽 빈자리에 앉아야 할 것만 같다. 참 시원한 그림이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마네 작품을 좀 더 볼까?
보팅 Boating,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7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벨뷰에서의 마네 아내 수잔 린호프 Madame Manet (Suzanne Leenhoff, 1829–1906) at Bellevue,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8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마네의 아내인 수잔 린호프의 초상화이다. 와이프의 모습이 참 단아하고 따뜻하게 이쁘게 그렸네. 마네 그림의 터프함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다. 툭툭, 툭 툭 툭, 붓이 화폭 위에 어떻게 떨어뜨리며 그렸는지 느껴진다. 마네가 죽기 3년 전에 그린 아내의 마지막 초상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마네, 여자관계가 심상치 않다. 수잔은 처음에 마네의 아버지가 마네와 형제인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온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 아버지인 오거스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에잇! 그런데 마네 보다 3살 연상인 이 수잔 선생님은 마네와 또 사랑에 빠진다. 어이쿠야! 1851년에 마네 집에 들어오는데 그다음 해인 1852년에 아기를 덜컹 낳는다. 이 아이는 마네 아빠의 아이일까? 마네의 아이일까? 당사자들도 헷갈려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아니?
마네의 평범하지 않은 여자관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네의 여인 하면 와이프인 수잔 린호프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여인이 마네의 뮤즈라고 불리는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이다. 그녀 역시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 전시회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나이 27세에 동료 예술가의 소개로 먼저 파리 시내에 유명인이 되어 있었던 마네를 만나 둘은 그림 친구이자 조언자, 마네 그림 속 모델로 더욱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까지 가지 않았을까 하는 가십도 있다. 누가 알아? 둘 사이의 이러한 미묘한 관계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영화가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이다. 그런데 이런 마네와 가까운 관계였던 모리조가 마네의 남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을 한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마네의 제수씨가 된 거니? 혹자는 수잔과 결혼한 마네가 사랑하는 모리조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미련으로 마네 가족으로 평생 가까이 두고 싶어 동생에게 와이프로 모리조를 소개했을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난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팩트는 마네가 53세에 갑자기 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 그 병명이 매독이었다. 으이그, 문란했네! 지금은 매독이 항생제 주사 한방으로 완치되는 가벼운 병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는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이라 걸리면 죽을 정도의 병일만큼 심각한 병이었다고 한다. 마네 역시 매독과 류머티즘의 합병증으로 왼쪽 발목까지 절단했음에도 불구하고 11일 후에 사망한다. 잘 좀 하지…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72,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Paris
검을 든 소년 Boy with a Sword,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6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위 그림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린호프가 낳은 마네의 아이인지 마네 동생(?)인지 모를 아이의 모습을 그린 ‘검을 들고 있는 소년 Boy with a Sword’ 이다. 누구의 아버지인지 명확하지 않았던 그 아이의 출생증명서에는 마네 부자 둘 중의 이름이 아닌 아무 연관성 없는 코엘라 Koëlla 라는 아버지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레옹-에드와르 코엘라 Léon-Edouard Koëlla 이다. 마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거의 10여 년을 아버지 몰래 수잔과 연인으로 지내다가 마네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1년 후인 1863년 10월 결혼을 하게 된다. 마네는 아들인지 동생(?)인지 모를 이 아이 레옹을 참 좋아했나 보다. 그림 그릴 당시 10살 정도였다고 하는데 어휴, 참 잘 생겼네. 마네는 일부러 17세기 의상을 입히고 그가 존경했던 스페인의 화가들, 그중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로 그 시대의 검을 소품으로 들게 하였다고 한다. 마네, 참 스페인 화가들 좋아라 한다. 아버지가 판사인 있는 집 자식 있었던 마네는 어렸을 때 취미가 그 당시에도 있었던 루브르 미술관이 아침에 땡! 문이 열리면 후다닥 들어가서 대가들의 그림 앞에 털썩 앉아 미술관에 걸려있는 대가들의 그림 따라 그리는 거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그림으로 접했던 스페인 대가들인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그림들에 푹 빠지고 그러한 클래식 그림들의 대가인 티치아노 등의 작품들을 따라서 모티브로 하여 마네만의 재해석한 작품들을 많이 그려낸다. 이러한 대가들에 대한 리스펙을 담아 그 대가들의 그림들을 모티브로 따라 그린 그림들을 우리는 오마주라 부른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마네가 좋아라 했던 스페인풍의 그림들을 몇 점 더 볼까?
스페인 가수 The Spanish Singer,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6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마조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 Young Man Dressed as a Majo,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6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투우사 A Matador,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66-6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에스파다 의상을 입고 있는 마드모아젤 V. Mademoiselle V. in the Costume of an Espada,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6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그냥 딱 스페인인데? ‘스페인 가수’는 마네는 그가 그렇게 바라던 살롱전에 1861년 찬사를 받으며 데뷔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왼손으로 기타를 치고 있는 가수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들고 있어 어색함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시기는 마네가 스페인을 직접 가 보기 전으로 스페인 가수의 의상은 마네가 가지고 있던 의상과 소품으로 그의 스튜디오에서 한껏 스페인스럽게 연출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마조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의 작품에서는 일단 마조 Majo 가 뭐지? 용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작품 이해 하기가 쉽지 않은데, 마조란 남자는 마조 Majo, 여자는 마자 Maja 라 부르는 스페인 마드리드 Madrid 에 사는 하층민 사람들의 이름으로 그들이 입는 조금은 과장된 스페인 전통복장을 말하는 거라고 한다. 위의 옷 스타일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투우사’ 작품은 마네가 유일하게 스페인을 한 번 방문했던 1865년 후에 그린 그림으로 그 여행에서 투우 경기를 보았던 투우사 카예타노 산츠 Cayetano Sanz 의 모습이다. 빨간 망토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나 투우사요, 하고 있다. 배경이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그라디에션 색으로 표현된 스타일이 벨라스케스가 많이 쓰던 배경처리 방법이라고 한다. 마지막 작품으로 ‘에스파다 의상을 입고 있는 마드모아젤 V’에서 에스파다 Espada는 스페인어로 검을 뜻하는 용어인데 넓은 의미로는 황소를 죽이는 검을 쓰는 투우사를 뜻한다고 한다. 투우사하면 그전 그림처럼 보통 남성이 많은데 여기서는 여성 투우사이네? 새빨간 색의 망토가 아닌 핑크색의 망토를 들고 있는 게 투우사의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듯하며 마네만의 색깔로 재해석하여 표현한 것 같아 재밌다. 배경이 투우장인데 그림 그린 년도가 1862년으로 실제로 스페인을 가 보기 전 마네의 스튜디오에서 투우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그림이란다. 오른쪽 배경 속 말 타고 소 좇는 모습이나 한쪽에 몰려 있는 사람 모습 등은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정말 실감 나게 그렸네,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눈에 들어온 투우사의 플랫 한 신발에 저 신을 신고 목숨 걸고 뛰고 도망가고 할 수 있나? 저건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게 만든다. 이 그림 속 투우사는 마네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였던 모델 빅토르 뫼랑 Victorine Meurent 이라고 한다. 앗! 빅토르 뫼랑? 마네를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속 누드의 여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같은 결의 마네의 ‘올랭피아’의 모델도 빅토르 뫼랑이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Luncheon on the Grass, 1863, Édouard Manet,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여인 둘, 남자 둘이다. 한 여인은 완전히 옷을 벗고 있고, 다른 여인은 저 뒤에 속옷 차림이다. 남자 둘은 모두 정장을 잘 차려입고 손까지 올려가며 열정적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앞에 과일, 여인의 옷가지, 빵조각 등 소풍 소품들은 널브러져 있다. 심상치가 않다. 보통의 소풍, 점심식사의 모습이 아니다. 앞에 두 남자는 부르주아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모델은 오른쪽은 마네의 두 형제인 외젠 마네와 구스타프 마네의 조합이라고 하고, 왼쪽의 남자는 처남인 페르디난드 린호프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니 지나가자. 그냥 그 시대에 흔하게 만나는 귀족 또는 부르주아 남성들의 모습이다. 앞에 누드의 여인이 위에 언급했던 마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로 빅토르 뫼랑 Victorine Meurent 이다. 그림 속 두 여인의 직업은 성을 파는 여인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아, 얘기를 듣자 하니 이거 19금이구나! 그냥 보통의 소풍이 아닌 게 맞는구나. 그 당시 돈 많은 부르주아들이 소풍 가자고 하면 그 짓(?)하러 가는 거였다고 한다. 숲 속에서 널브러진 소품을 보아하니 점심도 먹고 일도 치른 후에 쉬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구나. 겉으로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모습처럼 점잖고 도덕적인 사람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이렇게 노는구나, 하는 걸 꼬집는 듯 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1863년 살롱전에서 입선하지 못한 그림들만 따로 전시했던 낙선전 Salon des Refusés 에 전시되었는데, 그 당시 미술관에 주로 오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이 그림 앞에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들에게 맥이는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그림 속 누드의 여인은 그림 속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림 밖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어? 너 여기 왔네? 너 이렇게 놀잖아, 어서 들어와, 우리와 함께 놀자!’ 그림 밖에 있는 관람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내게 만든다. 감히 몸 파는 여인 주제에 살짝 나를 보고 비웃고 있는 표정이기까지 한데? 대단히 도발적인 눈빛이다. 그 당시 부르주아들에게 엄청난 모멸감을 주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내가 비록 이렇게 놀기는 하지만, 이런 나의 치부를 이 품격 있는 미술관에서 왜 낯 뜨겁게 까발려져야 하지? 마네 그놈도 결코 문란하지 않은 놈이 아닌데, 우리에게 왜 이런 그림을?!’ 그 당시 파리에 세명이상 모이면 마네 욕만 했다고 할 정도이다.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마네 멘탈도 보통이 아닌 듯싶다. 이 작품으로 충분히 욕을 먹을 만큼 먹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약 6개월 후에 이 보다 더 한 작품을 그리는데 그 그림 속 모델도 빅토르 뫼랑이다.
올랭피아 Olympia, 1863, Édouard Manet,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이 작품은 그리기는 1863년에 그렸는데, 대중에게는 1865년 살롱전에서 전시된다. 작품명이 올랭피아, 누드로 누워 있는 여인의 이름이 올랭피아 Olympia 인데 그 당시 성을 파는 여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 중에 하나가 올랭피아였다고 한다. 그 당시 딱 작품명을 보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녀의 직업을. 머리의 빨간 꽃, 끈 목걸이, 팔찌, 깔려있는 아시안풍의 숄, 누드지만 신고 있는 신발 등이 그 당시 성을 파는 여인들이 자주 하던 장식품이었다고 한다. 오른쪽의 곧추서 있는 블랙 고양이 또한 성을 상징하는 요소라고 하니 마네의 디테일에 놀란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 많이 데리고 왔던 흑인 여성들이 파리 시내에 하녀라는 직업으로 많이 있었는데, 한 명의 흑인 하녀가 꽃을 들고 있다. 분명 누군가 선물로 그녀에게 보내 준 것으로 보인다. 누가 보낸 꽃일까? 그때, 그녀의 눈빛이 다시 그림 밖의 관람자와 눈을 맞추고 있다. ‘부르주아, 너 또 왔구나! 어서 그림 안으로 들어와. 니가 자주 오던 샵이지? 너도 왔으니, 나도 이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네’ 이런 성을 파는 곳에 올 때는, 그냥 돈만 툭 건네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엄청 젠틀한 사람이야, 꽃 하나 들고 오는 게 예의고 감수성도 있고 배려심 많은 남자이지. 꽃 하나 선물하고 ‘나 왔소!’ 하는 거지. 이 그림 또한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다. ‘마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그놈도 깨끗하지 못한 놈이면서, 왜 우리에게 이런 맥이는 그림을 그리는 거야?’ 사람들이 너무나 비난을 많이 해 대니, 혹시나 그림에 해코지 할 까봐 이 그림 앞에 경비원을 따로 세웠다고 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마네는 과거의 클래식한 그림을 자신의 해석을 담아 현대적인 모습으로 그림 그리길 좋아했다고 했는데 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 또한 기존에 존재했던 클래식한 그림을 자신의 의도대로 새롭게 재해석하여 다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정도면 표절 아냐? 우리는 이것을 ‘영감 Inspirations을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왼쪽: 파리의 심판 The Judgment of Paris, 1515/16, 라파엘 Raphael , 독일 슈투트가르트 슈타트 미술관
왼쪽: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 1538, 티치아노 Tiziano , 우피치 미술관 Uffizi Gallery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박해 보이는 이러한 작품들을 그렸던 마네를 지금 우리는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예술가, 마네’ 라 부른다. 왜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 보다 그 위의 대가라며 ‘예술가의 예술가’라 부른다. 왜 우리는 마네를 이렇게 높게 평가하는 걸까?
바로 ‘주제의 확장성’ 때문이다. 마네 전까지만 해도 예술이란 아름답고, 고귀하고, 숭고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만 내는 게 예술이라고 보았다. 역사화, 종교화, 신화화 등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마네는 지금 우리 현실의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까지도 예술로 담아낼 수 있어야 예술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드도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클래식한 그림 등에서 보아왔던 비현실적인 풍만하고 유려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누드만 그려졌었는데 마네는 ‘올랭피아’의 누드처럼 ‘삐툴 빼툴 이러한 누드가 더 현실적이지’라는 마음으로 현실의 누드 모습으로 표현한다. 많은 대중과 기존 예술가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아,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왜 여기까지 주제를 넓힐 생각을 못 했을까?’ 라며 이러한 마네의 생각에 공감하며 마네를 추앙하는 예술가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아, 우리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저런 그림이야!’ 라며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기존 클래식한 미술에 대한 도전가로 그를 보며 그를 따랐고, 그래서 인상주의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 하여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왼쪽: 빅토르 뫼랑의 22살일 때의 실제 사진 모습. 오른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빅토르 뫼랑을 모델로 한 작품 1866년의 젊은 여인 Young Lady in 1866, 1866, Edouard Manet, The Met
이렇게 마네를 이야기하고 나니 마네가 엄청 대단한 예술가라고만 찬양(?)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한 예술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얼마나 허술한 예술가였는지 그가 그린 작품 하나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나와 똑같은 실수투성이 인간으로도 느껴지기까지 한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바로 이 작품이다. 어디 한 번 볼까?
천사와 함께 죽은 예수 The Dead Christ with Angels, 1864, Édouard Mane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
예수님이다. 엉? 마네는 기존 고귀하고 숭고한 이야기만 다루던 예술에 리얼한 현대의 주제를 담아내 유명해진 화가 아닌가? 그런데 종교화인 예수님 그림을 그렸네? 이 그림을 그린 년도가 1864년이다. 파리 예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작품이 바로 전 해인 1863년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린 이유를 부정적인 평가로 도배가 되었던 마네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타협으로 클래식한 주제를 선택하여 살롱전에 다시 데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그림을 그린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버릇 개 못준다고 했나? 이 예수님의 그림에서도 그의 기질은 여실히 드러난다
왼쪽: 마네의 ‘천사와 함께 죽은 예수’의 아래 돌 위의 성경구절 표시. 오른쪽: 성 토마스의 의심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circa 1601-1602, 카라바조 Caravaggio, Sanssouci Picture Gallery, Germany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한복음 20:12
이 작품의 아래 돌 위에는 이 그림의 이야기 있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20:12 이 쓰여 있다. 그런데 천사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냥 날개 달린 사람인데? 천사의 날개가 시원시원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성경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빨강과 주황의 옷을 입고 있다. 스페인스러운 의상을 생각한 걸까? 예수님을 보니 위대하고 신성한 느낌은 뺀 보통의 사람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던 것 같다. 손과 발에 난 못자국 정도가 내가 예수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창에 찔려 생긴 예수님 몸의 옆구리 상처의 위치가 위 그림의 반대쪽인 오른쪽 아니었던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토마스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셨음을 믿지 않겠다고 하여 손을 넣어보게 하였던 그 옆구리가 오른쪽 아니었던가? 마네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알려진 바로는, 마네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샤를 보들레르가 이 작품이 막 전시되기 직전에 마네에게 ‘창이 오른쪽으로 향한 것 같은데 상처의 위치를 바꿔야 할 것 같다. 성경을 찾아보고 악의적인 사람들이 당신을 놀리지 않도록 해라’라고 했다는데 마네는 결국 수정하지 않았다. 스웩인가? 아님 중2병인가? 난 달라! 난 예수님을 그려도 남들과 같이 그리지 않아! 아니면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었던 걸까? 여러분의 생각은?
나는 다른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그린다.
I paint what I see and not what others like to see.
- Edouard Ma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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