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벨라스케스의 한 남자의 초상
한 남자의 초상, 아마도 자화상 Portrait of a Man, Possibly a Self-Portrait
디에고 벨라스케스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ca. 1635
Oil on canvas
68.6 x 55.2 cm
작품명이 흥미롭다. ‘한 남자의 초상’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뒤에 ‘아마도 자화상’이라고 붙여져 있다. 아마도 자화상? 작품명에 이런 애매한 표현을 붙여도 되는 거야? 아마도?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자화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작품명이 왜 이렇게 애매하지? 이래도 되는 거야? 그럼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는 거야?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벨라스케스가 아니라는 얘기야, 아니면 그림 속 인물이 벨라스케스가 아니라는 얘기야? 작가 이름에는 ‘아마도’가 안 붙여 있으니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은 맞다고 보는 거겠지. 그럼 이 작품 속 인물이 아직도 벨라스케스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는 건가? 이 작품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너무 흥미로운데?
1800년 이전까지 이 작품은 영국 왕 조지 2세의 사생아인 요한 루드비히 Johann Ludwig에게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이 아닌 그 당시 네덜란드의 또 다른 바로크 화가인 안소니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의 작품으로 인수되었다. 그러다가 1854년 영국의 수집가이자 감정사인 휴 흄 캠벨 경 Hugh Hume Campbell 이 처음으로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1857년 이 그림은 하노버의 왕인 조지 5세 George V, King of Hannover 에게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으로 팔린다. 그러다가 1917년 그 당시 최고의 벨라스케스 학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트 마이어 August Mayer 는 처음에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작품인 ‘브레다의 항복’ 의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예술가가 벨라스케스라고 여겨 그와 닮은 이 작품을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으로 출판했으나 다시 정정하여 벨라스케스의 제자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조의 작품일 거라고 말한다. 그 후 1925년 영국의 영향력 있는 미술상이었던 듀벤 브라더스 Duveen Brothers 가 이 작품을 인수하여 청소하고 복원한 후 마이어는 다시 벨라스케스가 그린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라고 선언한다. 1년 후인 1926년 미국의 은행가이자 미술 컬렉터였던 줄스 바체 Jules Bache 가 112만 5천 달러(약 15억 원)에 이 작품을 구입하고 1944년 바체의 사망 후 194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바체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기증한다.
브레다의 항복 The Surrender of Breda, Ca. 1635,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Museo 프라도 미술관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스페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넘겨진 이후에도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화상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1955년 그림에 보호층을 입혀주고 색상과 광택을 향상시키기 위해 바니쉬 varnish 를 발라 주는데 당시 두껍고 노랗게 변한 바니쉬로 벨라스케스 대가의 그림 일리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1963년 벨라스케스 전문가인 호세 로페스-레이 José López-Rey 는 이 작품을 ‘벨라스케스 방식에 가깝게 그린 학교 작품 School piece ’으로 분류했다. 다시 한번 197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작품을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벨라스케스의 작업장 Workshop 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강등시킨다. 2009년에야 비로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동안 변색된 바니쉬와 1925년부터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왔던 리터칭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야 거장 벨라스케스 그림이 드러났다고 발표한다. 또 다른 벨라스케스 학자인 조나단 브라운 또한 이 그림을 벨라스케스가 그린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 맞다고 컨펌한다. 그 이후 작품명은 지금의 ‘아마도 그의 자화상 Possibly a Self-Portrait’ 이라고 수정되어 붙여진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화상이 맞을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벨라스케스 하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왼쪽 큰 이젤 앞에 한 손엔 팔레트를 들고 다른 손엔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 인물, 위의 ‘아마도 자화상’ 얼굴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나? 누가 봐도 직업이 그림 그리는 화가이면서 벨라스케스 아닌가? 그냥 콧수염 하나로 벨라스케스인걸? 이렇게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작품 속에 주인공이 아닌 카메오 느낌으로 자신을 자주 그려 넣었던 화가이다.
왼쪽: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 작품 속 화가의 모습, 오른쪽: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한 남자의 초상, 아마도 자화상 Portrait of a Man, Possibly a Self-Portrait’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Ca. 1656-57,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스페인
아, 벨라스케스 하면 딱! 이 작품 아니던가? 그냥 이 작품 하나로 왜 벨라스케스가 거장이라는 이야기를 듣는지 설명 끝이다. 그가 어느 정도의 거장으로 불리워지는지 그를 리스펙 했던 대가들의 말을 한 번 들어 볼까? 첫 번째로 에두아르 마네가 살았을 때 1865년 스페인을 딱 한 번 방문했는데 그게 바로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 ‘시녀들 Las Meninas’ 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프라도를 방문한 후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 화가의 화가 Painter of painters’라 불렀다. 이 그림이 그 정도야? 또한 콧수염으로 유명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벨라스케스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그의 콧수염을 따라 하고, 벨라스케스를 가리켜 ‘화가들 중의 최고 Aristocrat among painter’ 라고 말하며 ‘그의 스튜디오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면 팔다리도 자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정도라고? 또 다른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는 ‘나는 세 위대한 스승을 가졌는데 그건 바로 대자연, 벨라스케스, 그리고 렘브란트이다 I have had three masters, Nature, Velasquez, and Rembrandt’ 라고 말한다. 대자연과 벨라스케스를 동급으로 놓다니,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한 거야?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위 그림인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를 보고 감탄하며 ‘천재의 작품 A work of genius’ 이라 말하고 그의 기법과 그림의 깊이에 대해 감탄했다고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 번 언급한다. 이 정도면 그냥 거장들도 인정하는 거장의 거장, 벨라스케스 아닐까? 하나 더, 파블로 피카소는 위 작품 ‘시녀들 Las Meninas’ 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총 58개의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그의 영감의 원천으로 벨라스케스에게 깊은 존경을 표현한다. 피카소도 이 정도면 진심 아냐? 도대체 벨라스케스가 뭐길래? ‘시녀들 Las Meninas’ 이 뭐길래?
피카소의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Ca. 1957,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피카소 미술관 Museu Picasso, Barcelona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 작품이 뭐길래 다들 극찬을 하는 걸까? 그냥 언뜻 보기에는 벨라스케스 작가의 화실에서 한 공주를 그리고 있는 모습일 뿐인데 말이다. 그럼 이 그림 속으로 천천히 한 번 들어가 볼까? 일단 힘 빼고 가볍게 보이는 것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천장이 엄청 높은 화실이구나. 저렇게 높은 천장 끝까지 닿는 왼쪽의 이젤이 실제로 있나 싶을 만큼 커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아래쪽으로 몰려 있어 위쪽 빈 공간을 많이 확보하여 더 높은 천장 효과를 내고 있다. 사실 저 높은 벽면에 두 액자가 걸려 있는데 왼쪽 작품은 루벤스의 ‘아라크네를 벌주는 팔라스 아테네’이고 오른쪽은 요르단스의 ‘아폴로와 판’이라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주제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 앞에 서 있는 화가 자신, 즉 벨라스케스도 예술로 신의 경지까지 가 보리라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너무 과한 해석 아닐까? 아무튼, 실제로 이 작품은 사이즈가 세로가 3미터가 넘는 318 cm × 276 cm 으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어머어마하네? 저 작품 속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이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시녀들 Las Meninas’ 작품 사이즈와 비슷할 듯싶은데? 그럼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 속 그림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인가? 벨라스케스는 그걸 노린 거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재미있는데? 이 그림이 이런 식이다. 우리에게 많은 해석의 영역을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 놓고, 이 그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지난 350여 년 넘게 우리가 나누게 만든 것이다. 정답은 없다. 여러분도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해석하는 게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새로운 해석을 써 내려간다! 라는 자부심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의 한가운데 서 있는 공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 공주가 그림 속 주인공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를 궁정 화가로 발탁한 그 당시 왕인 펠리페 4세와 왕비인 마리아나 사이에 태어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Margaret Theresa 로 이 당시 나이가 5살이었다고 한다. 너무나 귀엽다.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점점 턱이 나오게 되어가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다.
17살일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모습 From Infanta Margaret Theresa (1651-1673), Empress, in theater dress by Jan Thomas van Yperen
그럼 그림 속 화가는 이 공주를 그리고 있는 게 맞을까? 보통 모델을 그릴 때 서로 마주 보면서 직접 얼굴을 보며 그림을 그리지 않나? 이 그럼 처럼 오른쪽에서? 살짝 뒤에서 모델을 그린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여기 또 여러 가지 상상적 해석이 나온다. 첫 번째는 아마도 공주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 쪽에 큰 거울이 있어서 그 공주를 비추고 있는 거울을 보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듯싶은데 직접 마주 보고 그리면 되는데 왜 한 번 비추고 있는 거울을 보고 초상화를 그릴까 라는 의문이 든다. 혹시, 마르가리타 공주를 포함한 지금 화가의 스튜디오 안의 전체 모습을 그림 속에 담으려고 일부러 큰 거울을 우리 쪽에 놓고 ‘화실 안에 있는 공주의 모습’을 그리려고 이렇게 그린 거 아닐까? 그럴 수 있겠는데?
그럼 여기서 또 드는 의문이 화가가 공주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공주의 맞은편, 다시 말해서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 쪽에 누군가 있고 그 사람을 그리고 있다면? 그 그림 그리고 있는 사람을 공주가 보러 온 거라면? 그 사람이 누군데? 이 쯤되자 뒤쪽 액자 속에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바로 왕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인 것으로 보인다. 아, 엄마 아빠 초상화 그리고 있는데 아기인 딸 마르가리타 공주가 구경 왔구나! 여기까지 상상력이 미친다. 그럼 저 액자는 그림이 아니라 거울인가 보다. 마르가리타 공주 맞은편인 우리 쪽에 앉아 있는 왕과 왕비가 거울이 비친 모습으로 표현했구나, 대단한데? 여기까지 상상력이 미친다. 이렇게 작품의 중앙에 거울을 놓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이게 하는 기법은 벨라스케스 이전 화가인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 의 ‘아르놀피니의 초상 The Arnolfini Portrait, 1434’ 을 연상케 한다. 지금은 이 작품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데 그 당시는 펠리페 4세의 방에 걸려 있었던 작품으로 벨라스케스가 이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얀 반 아이크도 대단한 인물인 것이 1400년대에 볼록한 거울을 비추어 방 안 전체 장면을 보이게 한 아이디어가 대단히 놀랍고, 유화를 저렇게 디테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랍다. 잠깐, 거울을 둘러싸고 있는 10개의 작은 원형의 메달에 예수의 수난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을 보았는가? 하, 감탄만 나올 뿐이다.
그런데 저 작은 거울이 앞에 있는 국왕 부부를 비추는 게 아니라 화가의 이젤 속 그림을 비추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아니, 그런데 저 액자가 누가 거울이라고 그랬나? 혹 유리창이라면?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의 스튜디오를 구경하기 위해 창문을 통해 살짝 보고 있는 국왕 부부의 모습이라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국왕 부부를 그린 초상화의 그림 액자라면 위 이야기가 모두 의미 없겠는걸? 여기서 또 잠깐,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모든 이야기가 저 이젤과 화가가 빠져 있다면 이렇게 까지 이야기될 수 있을까? 공주, 화가, 거울이라는 세 요소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원형으로 돌리고 있는 격이다. 여기까지 왔을 때 비로소 이 그림을 왜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와닿는다. 그림 하나로 이렇게 여러 가지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벨라스케스가 의도했든 아니든 3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를 비롯한 정말 많은 철학자와 평론가, 화가들이 아니 나까지도, 당신까지도 우리는 이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다. 벨라스케스, 이 정도면 정말 인정이다.
왼쪽 위: 붉은 십자가 문양의 기사 작위 문양을 그려 넣은 벨라스케스, 왼쪽 아래: 왼팔의 살짝 벌어진 절개 표현과 공주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살아있게 표현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 오른쪽: 뒤의 열린 문에서 나오는 빛과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의 두 가지 빛으로 인물의 강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습.
그림 속 인물들 한번 엿보고 이 그림은 마무리할까? 궁중에 있는 실존 인물들이라 모두들 실제 이름들이 있는데 굳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가운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고, 양 옆에 두 시녀들이 있는데 왼쪽 시녀는 살짝 키를 낮춰 공주에게 마실 음료를 건네고 있다. 이렇게 시녀가 살짝 무릎을 굽힘으로써 뒤의 왕의 부부 액자 또는 거울이 온전히 보이게 처리한 것이 절묘하다. 오른쪽 시녀는 드레스를 살짝 잡고 공주님을 살피고 있다. 그녀의 바로 오른쪽에는 두 난쟁이가 있는데 이 난쟁이들은 공주와 놀아주기도 하고 공주가 뭔가 잘못한 일을 했을 때 대신 매를 맞아 주기도 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재밌네. 한 난쟁이는 졸린 개를 발로 살짝 장난치고 있다. 모두들 공주를 바로 보고 있어 더욱더 공주에게 우리의 시선 또한 머물게 된다. 오른쪽 뒤로 수녀와 경호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바로 왼쪽 뒤로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이 여왕 책임자이자 테피스트리였던 돈 호세 벨라스케스이다. 저 뒷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만 표현되어 앞 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동일하게 나열식으로 보이게 했을 터인데 뒤의 열린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하나 더 더해져서 중앙의 공주를 한 번 더 강조하며 보이게 만든다. 이 절묘한 빛처리를 모두 감탄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왼쪽 이젤 앞에 서 있는 화가인 벨라스케스의 가슴에는 붉은 십자가 문장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으로 벨라스케스가 이 기사 작위를 받은 해는 죽기 1년 전인 1659년인데 이 작품은 1657년에 그렸으니 이 그림 그릴 당시에는 기사가 아니었는데 이 십자가 문장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것 또한 여러 해석이 있는데 아마도 이 그림 그릴 당시에 너무나 받고 싶어서 미리 그려 넣었다는 설도 있고 또는 기사 작위를 받고 벨라스케스가 이후에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 또는 벨라스케스가 죽고 난 후 펠리페 4세의 지시로 그려 넣게 하고 그가 마지막 붓터치를 왕이 직접 그렸다는 설 등이 있다. 공주의 머리카락과 팔의 절개 옷 표현 등은 가까이서 보면 물감 덩어리인데 멀리서 보면 세밀한 옷의 절개 느낌과 한 올 한 올 살아 있는 머리카락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게 대가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기법으로 물감이 젖어 있을 때 한 번에 휙~ 표현해야 한다는 알라 프리마 Alla Prima 로 이것을 에두아르 마네가 그렇게 따라 해 보고 싶어 하고 또 실제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 작품명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의 처음 이름은 ‘펠리페 4세와 가족들’ 또는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난쟁이의 초상화’로 불렸는데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가면서 미술관이 간단하게 ‘시녀들’ 스페인어로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로 정하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에 영감을 받아 존 싱어 서전트가 오마주 하여 그렸다는 ‘에드워드 D.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 1882, 존 싱어 서전트 John Singer Sargent, Museum of Fine Arts, Boston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íguez 1599 - 1660
스페인의 천재 화가로 바로크 미술의 최고 화가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한 명으로 늘 손꼽힌다. 스페인의 남서부인 세비아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어렸을 때부터 실력이 뛰어났으며 그래서일까? 자신의 그림 선생님인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그의 재능을 익히 알아봐서인지 몰라도 그의 딸인 후아나 파체코와 벨라스케스는 20살에 결혼한다. 그 당시 왕이었던 펠리페 4세가 가장 좋아했던 궁정 화가가 죽자 벨라스케스가 왕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를 얻게 되고 왕은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기뻐하며 1924년 벨라스케스의 나이 25살 때 궁정화가로 임명한다. 62세까지 남은 인생을 모두 궁정화가로 지냈으며 죽기 1년 전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는다. 1628년 약 6개월 동안 외교 사절로 마드리드에 온 피터 폴 루벤스와 함께 티치아노를 보기 위해 동행하면서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때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자극을 받는다. 1629년 드디어 왕실 후원을 받아 약 1년 반 동안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고 1649년-1651년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미술까지 접수하게 된다.
1649년 벨라스케스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날 때 조수로 함께 동행하였던 노예임에도 벨라스케스로부터 그림 훈련을 받은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이다. 참고로 1650년 11월, 후안 데 파레하는 벨라스케스에 의해 노예에서 풀려난다. 정말 초상화 하나는 끝나게 그리는구나. 캐릭터의 감정, 성격이 어떠했을지 표정에서 눈에서 모두 읽힐 정도이다. 눈동자가 움직이고 입이 살짝살짝 움직이며 나와 대화할 것만 같다. 이마에 내려앉은 빛은 어쩌고? 1950년 로마를 머무는 동안 이미 유명해진 벨라스케스는 그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10세와 접견을 가진다. 이때를 놓칠세라 벨라스케스는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제안하지만, 교황은 벨라스케스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당신 능력을 먼저 보여 달라고 한다. 이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가 바로 이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화이다. 교황은 위 작품을 보고 실력을 인정한 듯 벨라스케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맡긴다. 그렇게 해서 그린 작품이 많은 예술과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이 세상 모든 초상화 중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이다. 프랑스 역사가 히폴리트 테인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교황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È troppo vero! 너무 사실적이야!’ 라고 말한다.
우와, 저 광택 나는 린넨을 어떻게 저렇게 표현했지? 정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말이 맞네. 빨강의 강렬함이 이렇게 위용 있게 보이다니 정말 대단하다. 입 다물고 있는 교황님의 표정 보았는가? 꼬장꼬장한 카리스마가 눈의 힘과 입의 힘이 다 말해 주고 있다. 의상도 적색인데 얼굴색도 적색이다. 이탈리아 레드 와인의 강렬함을 흠뻑 마시고 있는 느낌이다. 벨라스케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1638–1683), Infanta of Spain, 1651–54, 디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íguez, The Me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필립 4세 왕은 두 번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첫 번째 왕비가 엘리자베스이고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위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이고, 두 번째가 마리아나 왕비이고 그 사이에 낳은 딸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 작품 속에 등장한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et Theresa 공주이다. 나비 리본이 달린 가발을 쓰고 있는 마리아 모습도 너무나 이쁜데 이 작품은 원래 가슴까지 보이는 흉상 길이의 작품이었는데 나중에 잘려 지금 사이즈가 되었다. 강한 혈통주의였던 합스부르크 왕족의 근친혼 규정상 마리아 또한 첫 번째 사촌인 루이 1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여왕이 된다.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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