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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Apr 05. 2022

RM's Pick @ 이우환

Lee Ufan


이우환 Lee Ufan 1936-

영문 이름이 Lee Ufan 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한국인 화가로 알기보다는 유팬? 우퐌? 등으로 발음하여 외국의 유명한 화가인가보다, 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모마 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네덜란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등의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먼저 접한 경우 나중에 한국 화가임을 알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뉴욕 현대미술관 MoMA 4층에 전시되어 있는 이우환의 작품(왼쪽). ‘선으로부터 From Line, Lee Ufan, 1974’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2011년 6월 24일-9월 28일 열린 이우환 개인전. ‘이우환, 무한의 제시 Lee Ufan, Marking Infinity’


이우환 공간 in 부산시립미술관,

2015년 4월 10일 부산시립미술관 앞뜰에 ‘이우환 공간 Space Lee Ufan’이 오픈하였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작가 이우환이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서 부산 경남중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별도의 개인 미술관 오픈을 부담스러워하며 고사하였던 이우환은 시립미술관 내에 ‘이우환 공간’ 오픈으로 타협점을 찾고 그의 작품 20점을 기증한다. 총 사업비 47억 원의 지하 1층과 전시공간 1, 2층으로 구성된 이우환 공간은 건립 기간 동안 이우환이 세 차례 현장을 방문하여 마감재, 조명, 집기까지 직접 확인하고 그의 작품 한 점 한 점의 설치에 많은 열정을 담아내었다고 한다. 현재는 회화 14점, 내부 전시 조각 7점, 외부 조작 3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백의 공간 자체가 이우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 from myoustudio.com
부산 ‘이우환 공간’. from hankyung.com
2013년 2월 4일 부산 시립미술관 야외 공간에 조각 작품('관계항' 시리즈 중 '회의 Discussion')을 설치하고 있는 이우환. from kookje.co.kr




2019년 6월 13일 오후 매니저 한 명과 함께 조용히 이우환 공간을 찾는다. 미술관측에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한 그를 알게 된 수석 큐레이터 정종요 학예실장은 뒤늦게 나가 그의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필요하면 작품 설명을 드리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간단한 인사 후 그가 던진 한 마디, ‘저는 바람을 좋아합니다.’ 


부산시립미술관 Instagram


부산시립미술관 방명록. From twitter bma_curatorial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바람과 함께, 1990(왼쪽). 바람과 함께, 1988(오른쪽) ⓒ부산시립미술관.  cultura.co.kr




사실 2015년 부산의 ‘이우환 공간’이 오픈하기 전인 2010년에 일본의 가가와현의 나오시마 섬에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이우환의 오랜 친구로 알려져 있는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이우환 미술관’이 먼저 오픈하였다. 두 거장의 예술과 건축이 주변의 바다와 산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상의 공간으로 탄생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첫 이우환 미술관이 왜 일본일까?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학과에 입학한 이우환은 3개월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61년 니혼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도쿄의 사토 화랑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평론가, 화가로 활동하며 일본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로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화가인 이우환의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미술관을 소개하고, 찾아봐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던 차에 부산의 ‘이우환 공간’은 우리에게 너무나 반갑다.


일본 나오시마섬의 이우환 미술관. from iwan.com/portfolio/lee-ufan-museum-tadao-ando-naoshima/
이우환 미술관, 베네세-아트사이트 나오시마. from benesse-artsite.jp/en/art/lee-ufan.html


최근에는 세 번째 이우환 미술관으로 2022년 4월에 프랑스의 아를에 ‘이우환 아를’ 상설 전시관이 오픈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온다. 아를 Arles? 아를이 어떤 곳인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가 파리 생활을 접고 내려가 노란 집을 꾸미고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등의 작품을 그린 곳이 아닌가? 폴 고갱과 짧은 2개월간 함께 지내던 곳이기도 하고 반 고흐가 귀를 자른 슬픈 이야기까지 있는 그곳, 아를 아닌가? 그곳에서 이젠 이우환의 작품까지 만날 수 있다고? 우리의 미술이 세계적인 예술의 본토로 입성하는 것 같아 내심 흥분된다. 그 옛날 19세기에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 うきよえ가 처음 유럽에 소개되면서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매료시키고 푹 빠지게 만들었을 때, 내심 우리의 미술이 먼저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서운함을 여기에서 위로받고자 하는 걸까? 혹, 우리의 미술을 접한 반 고흐는 어떤 작품을 선 보였을지 궁금해하는 건 나만의 오버인가? ‘이우환 아를’은 2016년 이우환 재단이 16세기에서 18세기에 지어진 개인 저택인 베르농 호텔 Vernon Hotel을 인수하여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통해 3개 층을 전시공간, 명상과 리셉션 공간, 레스토랑, 서점 등으로 개조한 공간이라고 한다. ‘아를’이라는 도시의 한 공간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이우환은 어떻게 어우러질지 궁금하다.


프랑스 남부 아를의 카페 반 고흐 Cafe Van Gogh. from evazio.com/provence/
2022년 4월 아를 오픈 소식을 전하며. Lee Ufan aux Alyscamps, 2021 Copyright StudioLeeUfan / Photo by Claire Dorn
호텔 베르농, 아를. L’Hôtel Vernon, à Arles.  © Lee Ufan Foundation



모노하 Mono-ha,

이우환을 얘기할 때, ‘모노하’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온다. 그만큼, ‘모노하’라는 개념을 빼고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모노하 Mono-ha의 모노‘Mono もの’는 ‘사물, 물건’을 뜻하는 말이고, ‘ha 派’는 우리나라 말로는 인상파, 추상파 할 때의 ‘파’로 ‘그룹,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노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으로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우환의 작품에서 돌은 돌 그 자체로 예술이라 말한다. 철판은? 철판이라는 사물 그대로가 예술이다. ‘그게 무슨 예술이야?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자, 이러한 이론이 나오기까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하! 하는 지점이 나올 것이다.


예술, 당신은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예술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큰 흐름으로 봤을 때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작가의 생각과 의도로 뭔가 인위적인 행위가 더해진 결과물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자연에 있는 벽에 그림을 그린 벽화, 흙으로 빚어낸 도기의 시작부터 캔버스에 안료, 유화 등으로 그리는 그림들까지 모두 자연에 있는 뭔가에 작가의 생각으로 점이라도 하나 찍어야 우리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 큰 흐름 속에서 1960년대 전후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 본질이라던지, 초현실이라던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 생각의 추상 개념을 예술로 표현하는 흐름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쯤 되면 하나의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자연에 있는 모든 사물에 뭔가를 더하는 것만 예술인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해야만 예술인가? 자연이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존재는 예술이 될 수 없는 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술 아닌가?’ 이러한 개념을 예술로 정리한 대표적인 작가가 이우환이다. ‘모노하는 만드는 것에 제동을 걸고, 만들지 않은 것을 끌어들이는 시도이다. 즉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을 관계시키는 운동이다.’라고 이우환은 말한다. 이러한 생각까지 오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싶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또 이러한 ‘존재 자체의 예술’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알고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술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술은 ‘창조’가 아니라 ‘재제시 再提示’ 에 불과하다

- 이우환 Lee Ufan -


사물에 인위적인 강요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예술이라고 하다 보니, 이우환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는 그 사물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무 돌이나 가져다 놓고 이게 예술이다가 아니라, 그 시공간에 맞는 돌이 놓여져 있어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우환의 작품은 그 전시물만이 아니라, 그 전시물이 놓여있는 공간까지 하나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자, 이제 그의 작품을 한 번 보자.


이우환, 관계항-침묵B, 2015, 자연석&철판, 철판 270.5×220×1.5cm 자연석 80×80×90(h)cm 이내, 부산시립미술관


돌은 몇 백 년, 몇 억년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연물 덩어리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돌을 찾기 위해 몇 달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어떤 돌이 어울릴지는 만나기 전까지, 놓아보기 전까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철판은 인간이 빚어낸 가장 대표적인 인공물 덩어리이다. 포스코에 다니는 한 지인이 ‘우리는 아직도 철기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기억난다. 이우환은 알맞은 철판을 찾기 위해 제철소에도 가서 직접 용광로부터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덩어리가 만났다. 우리의 지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자연물과 인공물이 만났다. 작품명이 관계항 Relatum이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연물이 인공물 위에 놓여져 있다. 자연물이 인공물을 짓누르고 상위 개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인공물이 자연물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둘이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몇 백억년 동안 이어온 그들의 관계 속에서 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잠깐, 철판도 결국은 자연에서 뽑아낸 철 아닌가? 둘은 결국 같은 것 아닌가? 같은 둘을 나눈 건 결국 인간 아닌가? 이 공간 안에 함께 있는 나, 인간은 또 어떤 의미인가? 나는 자연물인가, 인공물인가?


이우환, 대화, 2015, 캔버스 & 자연석, 캔버스 218.5x291x5cm 자연석 100x100x100cm 이내, 부산시립미술관



나는 60년대 말부터 자연석과 철판을 연관 짓는 짓거리를 해 왔다.
자연석은 주먹만한 크기라도 몇십만 년이 넘거나 어떤 것은 지구가 되기 전에 굳어진, 인류의 시간을 훨씬 넘어선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다.
철판은 자연석에서 추출한 성분을 잠깐 만에 추상 형태로 재구성한 산업사회의 물질이며 아직 구체적인 물건이 되기 이전의 엉거주춤한 그러나 뉴트럴(neutral)하고 명백한 그것이다.
돌과 철판은 부자(父子) 관계에 있다.
이 관계를 만들어낸 자가 인간이니 돌과 철을 마주하면 자연과 산업사회가 이어진다.
그래서 돌과 철을 어우르면 인간은 그 앞에서 자연이나 우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자연석과 철판 사이에 서면 어느덧 먼 과거와 아득한 미래가 함께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듯이 새로운 제시물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우환, 2009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카탈로그-


이우환, 대화, 2014, 캔버스에 혼합 안료, 218.5x291x6cm, 부산시립미술관


처음 보았을 때 점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점은 그냥 동그란 원모양의 점 아니었나? 학교 수학에서 배웠던 점, 선, 면의 점은 원형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서양 교육의 산물인가? 이우환의 점은 점이라기보다는 면에 가까운 것 아닌가? 점과 면은 결을 같이한다는 것을 전하고자 한 걸까? 콕 찍은 점을 얼마나 확대해야 저렇게 보이는 거야? 저 점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린 거지? 한쪽은 짙고 서서히 희미해지는 점,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우환의 작업하는 모습. from londonkoreanlinks.net


아, 이렇게 넓은 붓으로 칠한 거였구나! 여기서 다시, 점이라는 것은 한 번 콕! 찍는 것이다라는 나의 선입견에 미안할 따름이다. 너무나 쉬워 보이는 작업이라, ‘나도 그리겠는데?’ 라고 많이 들 말한다. 이우환의 작업을 찾아보니,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닌 듯하다. 작품에 사용되는 캔버스, 물감, 붓은 모두 작품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된 것이라 한다. 캔버스는 일반 캔버스보다 더 두껍고 미리 잿소 또는 화이트 물감을 4~5번 더 칠한 것으로 특별 주문한다. 물감은 돌을 갈아 물감과 미듐으로 함께 섞어 만든 석채로 실제 작품을 보면 광택을 내게 된다. 붓 역시 작품의 표현에 맞게 여러 번 시도 후에 크기와 모까지 맞춰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점 하나에 진심 아닐까?




“ 막상 캔버스 앞에 서면 그날의 날씨와 공기, 나의 생리와 기분, 붓과 물과 기름, 물감… 이런 상태와 관계가 모두 늘 똑같지 않다.
내가 드로잉 해놓은 대로 이쪽 몇 센치 저쪽 몇 센치 정해서 그날 콤포지션에서 그리자고 하는데 막상 그리려고 하면 마음이 달라진다.
좀 더 비켜나야겠는 거다.
그리고 한꺼번에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수 없이 칠한 거다.
그날 몇 번이고 칠하고, 일주일 내지 열흘 말려서 또 칠하고 그걸 3~4번 반복하면 그림 하나 완성하는 데 40일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이것보다 작다가 점점 커진다.
그릴 때마다 조금씩 어떤 차별성이랄까 어긋남이 나오는 거다.
그런 어긋남의 느낌이 없으면 그리는 재미가 없어진다.
생각대로 그리는 게 아니다.
생각한 그대로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
생각이 꼬투리가 돼서, 생각이 어떤 뭔가를 물고 오는 부분이 돼서 다른 게 거기 첨가된다거나 빠진다거나 해야 그림이 재미가 있지.


이우환, 2012년 9월 W코리아 인터뷰 중-


그럼, 이우환은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모티브 중에서 왜 점일까?

이우환에게 점은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점 하나 찍어놓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그의 말을 한 번 들어 보자.



네댓 살 때 내게 글씨와 그림을 가르쳐 준 분이 있다. 그는 ‘우주만물은 점에서 시작해 점에서 끝난다’고 했다. 그림은 점에서 시작되며,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된다. 선은 시간을 뜻한다.

점이 모이면 그림이 되고, 사람이나 바위가 될 때도 있으며 흩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동양의 고대 사상을 주입해 주셨는데, 그것이 남아 훗날 내 그림의 모티브가 됐다.

-이우환, 2011년 알렉산드라 먼로 큐레이터와의 대화 중-

중국 상하이 파워롱미술관, ‘한국의 추상미술:김환기와 단색화’전시에 선보인 이우환의 설치작품과 ‘대화’ from sedaily.com


그림의 크기가 가로 약 3m, 세로 약 2m의 거대한 작품이다. 그 넓은 공간에 흰 여백이 대부분이다. 벽면도 흰색이라 흰 여백은 공간의 실제 작품보다 더 커 보인다. 한 마디로 여백의 압도감이 어마어마하다.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점 없이 여백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작품이 됨직하다. ‘여백의 예술가’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이우환 작품 중에 유독 많은 여백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한국화의 ‘여백의 미’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일까? 이우환은 여백을 남겨 놓는 게 아니라, ‘여백을 그린다’라고 말한다. 놀라운 관점이다. 그는 말한다. ‘텅 빈 공간에 점 하나를 찍어야 하는데 점 하나와 텅 빈 공간이 맞물려야 하고 상호작용으로 어떤 뻗치는 힘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연습과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여러 점보다 한 점일 때가 대단히 어렵다. 한가운데 점을 찍으면 안정감은 있는 반면 전혀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는다. 중심이라는 게 그런 거다. 그래서 회화는 대부분 중심에는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다. 보통 중심을 비켜 있다. 한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오른쪽으로 비키든, 밑으로, 위로든 그러면 눈이라는 게 재미있는 게 가운데로 가져 갈려는 작용이 생긴다. 그렇게 가운데로 가져다 놓으려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곳을 찾아 찍어야 한다. 그것이 점 크기라든지 위치뿐만 아니라 물감의 종류, 붓 자국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단히 어렵다. 모든 것이 흰 캔버스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긴장감과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인가, 이것이 그림을 그린 후에도 끝나지 않은 작가의 고뇌이다. 그것은 10년, 20년 해도 답이 있는 건 아니다. 조금만 더, 조금 더, 조금 더가 계속 …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자~ 극히 일부만 터치하고 그 많은 캔버스를 그냥 두고 간신히 어떤 부분만 ‘실례합니다’ 하고 조금 터치한다는 얘기이다. 그리지 않은 부분과 그리는 부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모티브이다. 내 그림은 그려진 것만 그림인 일반 미술과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여백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우환 작가 from 플라톤아카데미TV)’ 이게 쉬운 작업이 아니구나. 이러한 이우환의 작품을 예술로 인정한 대중 또한 놀랍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From Line, 1974, 캔버스에 유채, 194x259x4cm, 부산시립미술관


이젠 그의 작품을 보면 마냥 쉽게 그린 작품이라고 보긴 어려워진다.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 절제된 작품이겠지, 싶다. 저 선 하나하나를 그리기 위해 또 얼마나 고뇌했을까? 이제는 시간적 흐름까지 눈에 보인다. 처음 선을 찍어서 아래로 주욱~ 그려 내린 시간의 흐름, 선의 탄생과 소멸을 전달하고자 한 듯하다. 절정의 파란 청춘에서 나이 들어가는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만 같기도 하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만물의 원리가 이러하리라. 이우환은 블루를 생과 죽음을 품은 무의 색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 선들을 긋는데 얼마나 많은 생각과 절제로 긴 호흡을 조절하며 그었을까? 이제는 이런 선 하나를 보는데도 쉽게 보여지지 않는다.    



왼쪽: 이우환, 바람과 함께, 1990, 캔버스에 혼합 안료, 227x181.5x4.5cm, 부산시립미술관       오른쪽: 이우환, 바람과 함께, 1988, 캔버스에 혼합 안료, 227x182x4cm, 부산시립미술관



저는 바람을 좋아합니다,

아, 작품명이 절묘하다! 바람과 함께. 이건 이우환이 그린 게 아니다, 붓으로 그린 게 아니라 바람이 그린 그림이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돌아 지나간 흔적이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있고, 바람이 남긴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도 느낄 수 있다. 짙고 옅은 색의 강약으로 충분히 바람의 세기를 느낄 수 있다. 바람의 힘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자연 속에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뭔가의 나부낌 정도로만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왔던 그 바람을 이우환은 이렇게 담아냈다. 저도 바람을 좋아합니다.  



늘 느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못다 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거다.

- 이우환-

RM이 소장하고 있는 이우환 작가의 사인







The greatest friend of truth is Time, her greatest enemy is Prejudice, and her constant companion is Humility -Charles Caleb Colton-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shaan@daum.net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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