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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Jul 16. 2024

메트로폴리탄,베르메르의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Johannes Vermeer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vermeer.org



Johannes Vermeer 요하네스 베르메르 (1632 - 1675)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1662

Oil on canvas

45.7× 40.6 cm


미국에서 부동산, 은행, 철도등으로 돈을 많이 번 마르퀀드 Henry G. Marquand 는 1887년 파리에서 샤를 필레 Charles Pillet 에게 $800 에 이 그림을 구매한 후 미국에 가지고 오는데, 이것이 미국 최초의 베르메르 작품이 된다. 1889-1902년 동안 메트로폴리탄 두 번째 관장을 역임한 마르퀀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존 싱어 서전트, 반 다이크, 렘브란트, 터너 등 총 37점의 컬렉션 작품들과 함께 이 작품을 1889년 메트로폴리탄에 기증한다.

From metmuseum.org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 - 1675)

이름부터 어렵다. ‘Scarlett Johansson 스칼렛 요한슨’의 이름처럼, J 가 Y 로 발음 난다는 정도는 알겠다. Vermeer 는 영어 발음으로는 베르메르, 베르미어- 라고도 하는데 네덜란드 태생이라 네덜란드어로는 페르미어- 에 가깝게 발음이 난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한글 표기로 베르메르라고 부르자.

베르메르는 진정한 얼굴 없는 예술가이다. 알려진게 거의 없다. 그가 그린 작품수도 너무나 적다. 지금까지 알려진 게 총 37점인데, 그중의 3 작품 정도는 아직도 그가 그린 거네, 아니네 논란이 많다. 그 흔한 자화상조차도 하나 남아 있는 게 없다. 그래서 그를 소개할 때, 그가 그렸던 그림 안에서 같은 옷을 입은 화가가 몇 번 나오는데 그 사람이 화가인 베르메르가 아닐까 예상하며 그 얼굴을 따서 넣을 정도이다.

그림의 예술 The Art of Painting, 1666-1668, 베르나르 베르메르, 쿤스텐 빈 역사 미술관, 오스트리아
뚜쟁이 The Procuress, 1656, 베르나르 베르메르, 드레스덴 주립 미술 컬렉션, 독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1시간 정도 바닷가 쪽으로 떨어져 있는 델프트 delft라는 곳에서 그림도 직접 그리고, 또한 그림을 사고팔았던 딜러였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화가들을 위한 미술 거래 협회인 길드 Guild 의 회장직을 4번 역임했다는 정도이다. 아,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43세의 너무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 후 11명의 자녀와 함께 남은 베르메르의 와이프는 채권자들에게 빚을 탕감해 달라고 파산신청을 할 정도였다. 이 정도만 봤을 땐 별거 없는 그냥 평범한 화가인 듯한데, 그가 그린 그림 하나면 그에 대한 설명 다 필요 없다. 그림 하나는 끝나게 그린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 베르나르 베르메르,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Mauritshuis, 헤이그, 네덜란드

아, 이 그림! 이 그림 그린 화가구나. 대단한 예술가이구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우리는 이 그림을 ‘북유럽의 모나리자’ 라고도 부를 만큼 모나리자급으로 인정한다. 광택 나는 진주 귀걸이 표현이 압도적이다. 귀걸이의 왼쪽 광택과 아래 옷깃이 비치는 하얀 부분까지 어쩜 이렇게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그녀의 눈빛, 저 눈빛을 보고 어찌 그녀에게 안 빠질 수가 있을까? 살짝 벌어진 입모양은 말 걸면 말해 줄 듯하다. 터키인들이 많이 하는 파란 오리엔탈 터번은 그녀의 신비로움을 더 한다. 살짝 뒤돌아 보며 쳐다보는 저 포즈는 지금 인스타 사진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어떻게 17세기에 저런 포즈를 한 소녀를 그릴 수 있었을까? 진주 귀걸이는 실제로 저렇게 클 수가 없고, 저렇게 크다고 할지라도 꽉 찬 진주 귀걸이는 무거워서 귀걸이로 쓰기 힘들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빛 반사된 광택 등으로 보아서 아마도 안에는 텅 빈 주석으로 만들어진 액세서리가 아닐까 라고 보기도 하지만, 너무 다큐-로 받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냥 이쁘다. 어떻게 하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그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1662, 베르나르 베르메르, The Met, 뉴욕

우와, 이 여인 또한 너무나 매력적이다. 진주 귀걸이- 소녀와 같은 얼굴인 듯하기도 하고? 안녕? 얼굴 표정이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 설렘도 느껴진다.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분명 베르메르는 이뻐 보이는 각도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요즘 태어났어도 스냅작가로 이름 날릴 사람이다. 파란 드레스에 황금색 상의, 그리고 머리와 어깨에 쓴 하얀 천은 그녀를 더 순수하고 고귀하게 느끼게 해 준다. 이 하얀 천은 그 시기 그림의 여성들에게서 많이 보여지는데, 유행이었기도 하고 보호, 보온의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한 손은 창문을 살짝 열고 다른 손은 주전자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아래에 넓은 주둥이의 그릇을 보건대, 아하! 이 시기에 다른 그림들에서 많이 보여지던 세숫대야에 손 씻으려고 준비하는 모습이구나. 작품 제목이 ‘손 씻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여인’ 이 더 낫지 않을까? 물주전자라고 하니 먹는 물 주전자인 줄 알았네. 이 물주전자 도구는 실제로 베르메르의 장모인 마리아 틴스의 소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침에 창밖에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맞으며, 조금은 분주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일상의 모습이구나. 이 그림 안에는 베르메르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요소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왼쪽: 손 씻는 여인 A Woman Washing Her Hands, 1655, Gerard ter Borch,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Germany

오른쪽: 손 씻는 여인이 있는 실내 Interior with a Woman Washing her Hands, 1675, Eglon van der Neer, Mauritshuis, Hague, Netherlands


라피즈 라즐리 Lapis Lazuli 청금석. From spinnaker-watches.com

울트라마린 블루 Ultramarine Blue,

베르메르 그림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색, 블루이다. 베르메르 색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 주요색으로 정말 많이 쓰이는데, 진주 귀걸이- 소녀에도 이 파란 터번이 우리의 눈을 확 사로잡았다. 이 블루라는 게 그 당시 색 중에 제일 비싼 안료 Pigment 였다고 한다. 그 당시 그림은 지금의 화학물감처럼 따로 만들어져 나온 물감을 쓴 게 아니라 자연에서 채취할 수 있는 꽃, 식물, 암석 등을 갈아서 만든 안료로 색을 만들어서 썼는데 빨강꽃, 하얀 꽃, 노란 암석 등 다른 색은 쉽게 얻을 수 있는데 이 파랑은 얻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파란 하늘, 파란 바다 등 쓸 일은 많은데 말이다. 그래서 이 파랑은 14-15세기에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의 광산에서 많이 나는 라피즈 라즐리 lapis lazuli(청금석)라는 암석을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들여와 갈아서 썼는데, 이 돌을 ‘Beyond the sea 바다 너머’라는 의미의 울트라마린이라 부르고 가격 또한 비쌀 때는 금 이상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하필 베르메르는 이렇게 비싼 색에 꽂혀서 그렇게 많이 써 됐으니, 안 그래도 가난한데 더 가난해진 게 아닐까? 물주전자- 그림에서 옷으로도 엄청 쓴 것 같은데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의자 위에 걸쳐진 천 뭉치도 이 블루를 썼다. 왼쪽의 창문 밖 구름 낀 하늘에도 블루가? 자기가 쓰고 싶은 곳은 아낌없이 썼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너무 비싸고 귀한 색이다 보니 아주 중요한 포인트 색으로만 썼는데 그중 하나가 성모 마리아의 색이다. 그래서 베르메르의 그림 속 파란 옷을 입고 있는 여인들이 성모 마리아처럼 고귀하고 숭고한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이렇게 같이 놓고 보니, 딱 성모 마리아 님이네.

 왼쪽: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The Virgin in Prayer, 1640-1650, Giovanni Battista Salvi da Sassoferrato, National Gallery, UK


진주 귀걸이 Pearl Earrings,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처럼 베르메르의 작품 속 많은 소녀, 여인들은 진주 귀걸이 또는 진주 목걸이 모양의 장식을 많이들 하고 있다. 베르메르 여인의 시그니처 같은 요소이다. 그 둥근 진주가 빛에 반짝이고 머금고 있는 광택을 표현하는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품 속 여인이 진주 액세서리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럼 그 주위 어딘가에 있지 않은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탁자 위에 무심코 널브러져 있을 수도 있고, 박스에 살짝 나와 있을 수도 있다. 물주전자- 그림에는 어디에 있지? 오른쪽 아래 탁자 위에 보석함 박스에 살짝 비집고 나와 있는 진주 목걸이? 찾았는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작품의 귀걸이 확대 부분.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부분의 아래 보석함 확대 부분.


왼쪽에서 비치는 창가의 빛,

왼쪽의 창가, 그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빛, 그 실내 방안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 베르메르의 시그니처 구도이다. 많지도 않은 베르메르의 작품 약 37점 중에 12점 정도가 이러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왼쪽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의 표현이 압권이다. 벽에 비쳐 그려진 빛을 주목해 보자. 물주전자- 그림에서도 옆 창문에서 들어오는 벽에 비친 빛의 표현이 아, 대단하다. 누군가는 정말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작품 옆쪽을 확인했다고 할 정도이다.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 Woman with a Pearl Necklace, 1662-1664, 베르나르 베르메르, Gemäldegalerie, Berlin

열린 창문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 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 1657, 베르나르 베르메르,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벽면의 지도,

이 시기가 네덜란드의 해상력으로 전 세계를 항해하면서 무역으로 가장 부흥했던 네덜란드 골든 에이지 Dutch Golden Age 시대 이다보니, 세계 지도가 각 집집마다 장식품으로 벽에 많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새롭게 업데이트된 지도들이 속속 나오면서 더 크고 더 최신의 지도가 그 가문의 번영, 부의 상징처럼 유행하듯이 많이 걸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행의 흔적이 베르메르의 작품에서도 많이 보인다. 테이블을 덮고 있는 양탄자 덮개의 문양 또한 아시아에서 가져온 듯한 패턴이다.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작품의 벽에 걸려 있는 세계 지도.
장교와 웃는 소녀 Officer with a Laughing Girl, 1657, 베르나르 베르메르, Frick Collection, New York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

베르메르의 너무나 사실적인 빛과 이미지의 묘사 때문에 이건 그냥 단순히 손으로만 그림을 그린게 아니라,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보조 장치를 사용하여 그린게 아닐까 라는 설이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란, 16세기 후반에 개발된 발명품으로 작은 핀홀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를 반사하게 하여 그 위에 거꾸로 보여진 그림을 그대로 따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어진 보조장치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Ellsworth Foster and James L. Hughes  Publisher: Ralph Durham Co. Chicago (IL) 1919

이 설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베르메르의 작품 사이즈는 보통의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들보다 훨씬 작은 작품들이 많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의 사이즈가 46.5 × 40 cm 이다.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 또한 사이즈가 45.7cm × 40.6cm 이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 옵스큐라 박스 안에 그림을 비추어 그리다 보니 표현할 수 있는 사이즈가 크지 않은 이 정도 아니겠느냐라고 얘기한다.

PHOTO SYLVIA LEDERER/XINHUA NEWS AGENCY VIA GETTY IMAGES

 둘째, 그림의 이미지를 보는 각도이다. 물주전자- 소녀의 그림을 예로 들면, 여인을 바라보는 각도가 살짝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이다. 이 각도는 앉아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들어온 이미지를 따야 하는 그 각도라는 것이다. 많은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이 각도에서 여인을 바라보는 그림들이 많다.

셋째,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가 살짝 보인다는 설이다.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의 그림에서 물주전자를 좀 더 자세히 보자. 광택이 나서 앞모습이 비쳐 보이는데, 까만 바탕에 하얀 점이 하나 보인다. 이게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이 아니겠느냐라고 한다. 이걸 그렇게까지 찾아내서 본다고? 대단하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에 나온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예고편






17세기(1588 - 1672) 네덜란드는 골든 에이지 Golden Age 시대라고 불린다. 보통 황금기라고 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를 말하는데 네덜란드가 딱 이 시기이다. 프랑스는 같은 의미로 19세기말-20세기 초(1871-1914)를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 The Beautiful Era) 라고 부른다. 그럼 우리나라는 언제일까? K-Culture 로 전 세계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는 지금 아닐까? 아니면 더 큰 시기가 오고 있는 중? 흥해라, 대한민국! 아무튼, 이 시기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오랜 ‘80년 전쟁’과 유럽 강대국 간에 가톡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색채가 강한 ‘30년 전쟁’을 끝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면서 세계 최고의 해양 정복과 경제 강국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A Fleet at Sea,1614, Hendrick Cornelis Vroom, Private collection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VOC) 를 설립하여 동쪽의 아시아로부터 후추 등 향신료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얻고, 1621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Dutch West India Company를 설립하여 서쪽의 대서양을 통해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또한 엄청난 부를 쌓는다. 이 동인도 회사는 단지 회사가 아니라  그 지역, 식민지에서 전쟁을 벌이고, 사람도 처형하고 가두는 사법권과 외교권을 모두 가지고 행사하는 거의 막강한 준정부 성격이었다. 이 동인도 회사의 규모를 지금 현재의 시가총액으로 보면 얼마 정도일까 비교해 놓은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약 8조 달러로 지금 애플의 3배 정도라고 하니 어머어마한 규모의 회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네덜란드가 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고 유럽과 일본의 독점 무역을 했던 것도 이 시기이고, 우리가 많이 들었던 ‘하멜 표류기’의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또한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 직원으로 태풍을 만나 표류한 후 1653-1666년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당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적은 기록으로, 일본으로 탈출한 후 억류기간 동안 못 받았던 급여를 동인도 회사에게 받기 위해 기록한 일지이다. 또한 1609년 동인도 회사의 선장이었던 헨리 허드슨 Henry Hudson 은 북극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고 항해를 하다가 뉴욕의 맨해튼 서쪽을 끼고 흐르는 강을 지나는데 이것이 그의 이름을 딴 지금의 뉴욕 허드슨 강 Hudson River 이다. 이후 이 신대륙은 아시아의 동인도 회사처럼 서인도 회사에게 독점을 주어 식민지 개척에 나서며 아메리카에서 많이 잡혔던 값비싼 비버 모피 수집을 위해 이 지역에 거래소를 세우고,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주해 와 정착하는데 이것이 1624년 지금 뉴욕의 이전 이름인 새로운 암스테르담,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이다.


Manhattan, 1660, a contemporary rendering of what New Amsterdam looked like in 1660. Painting by L. F. Tantillo.  From nyhistory.org


이곳의 네덜란드인들은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넓은 도로 Broad 는 그대로 브로드웨이 Broadway 로 사용하고, 영국과 원주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허드슨강에서부터 이스트 쪽까지 나무벽을 세워 울타리 방어막을 만드는데 여기를 따라 흐르는 거리를 ‘월스트리트 Wall Street’ 라고 부르게 된다. 1664년 영국의 통치로 이곳을 네덜란드가 넘겨주면서 그 당시 영국왕이었던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작에게 이 지역 소유권을 주면서 이름을 ‘새로운 요크 공작의 땅’ 뉴욕 New York 으로 바꾸게 된다.


From behance.net

우리가 요즘도 자주 많이 쓰는 말 중에 더치 페이 Dutch Pay 란 것도 이 시기에 나온 말이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영국과 식민지 경쟁을 하면서 네덜란드-영국 전쟁을 3차례나 치르는데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비하하기 위해 ‘같이 식사했지만, 음식값을 각자 내는 이기적인 네덜란드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 더치 트릿 Dutch Treat, 고 더치 Go Dutch, 더치 페이 Dutch Pay 이다. 더치 Dutch 라는 말은 독일을 부르는 도이치 Deutsch 와 비슷한데 원래 같은 독일계 게르만족이었는데 서로 나눠지면서 변형된 이름으로 본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네덜란드의 영향을 안 미친 곳이 없었으니 대항해 시대에 네덜란드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놀랍다. 그럼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다시 그림 이야기로 가 볼까?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예술도 발달하는 걸까? 네덜란드의 황금기 시대에 미술도 엄청나게 발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 Rembrandt (1606-1669) 도 이 시기이고, 지금 얘기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 (1632-1675) 도, 초상화와 풍속화의 대가 프란스 할스 Frans Hals (1582-1666) 도 이 시기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 도 지금은 벨기에 땅이지만 그 당시는 네덜란드 남부였던 앤트워프에서 주로 지내고 말년을 그곳에서 보냈기에 넓게는 네덜란드의 골든 에이지 시대의 거장으로 살짝 걸쳐 넣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네덜란드에 미술 거장들이 많이 있었구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1853-1890)도, 현대 미술에서의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1872-1944) 도 모두 네덜란드 화가이다.

From artlex.com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

17세기 전의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15세기-16세기는 르네상스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 파엘로 등 천재 화가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었니 미술은 이젠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주의였다. 완벽한 인체 묘사, 완벽한 비율과 대칭, 완벽한 원근법과 소실점 등 이 이상 완벽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르네상스의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약간의 기교와 변형만 주는 미술이 나타난다. 기존 그림보다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틀어진 포즈, 늘어진 형태, 잔재주의 효과,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타일을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 라고 하는 ‘매너, 양식 Manner’의 매너리즘 Mannerism 이다. 이러한 매너리즘을 크게는 르네상스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은 사조로 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사에 중요한 하나의 중간 사조로 보자는 목소리도 함께 있다. 여하튼, 아래의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면,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1495-1498,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매너리즘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1592-1594, 야코포 틴토레토 Jacopo Tintoretto, San Giorgio Maggiore, Venice, Italy



세상의 모든 사조는 그 이전의 사조에 반하는 트렌드로 전개된다. 르네상스라는 큰 흐름의 정형화되고 고전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 그림을 그리고, 주제 또한 다양한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는 것들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색도 좀 더 과감하게 쓰고, 빛과 어둠의 명암 대비도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의 장르가 나타난다. 한 마디로,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을 클래식한 고전으로 밀어 놓고, 좀 더 트렌디한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찌그러진 진주’ 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인 ‘바로크 Baroque’ 이다. 이렇게 긴 설명보다는 그냥 그림 하나 보고 느끼는 게 낫지 않을까? 바로크의 가장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거장인 카라바조 Caravaggio (1571-1610) 의 그림 하나면 구구절절한 설명 끝이다.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1599, 카라바조 Caravaggio,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


아, 이런 그림이구나. 이전의 르네상스 그림에서는 보기 힘든 너무나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렸구나. 확연히 바로크가 어떤 그림인지 와닿지 않나?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이 다 읽히는 듯하고, 빛과 어둠의 명암도 더 확연히 드러나 극적인 효과가 절정이다. 피를 토하며 으악! 하는 목소리가 그림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칼을 잡고 목을 베는 여인의 표정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어 얼마나 힘을 주고 이 일을 행하고 있는지 보인다. 오른쪽 하녀 할머니의 얼굴 주름살 표현이며 표정 또한 얼마나 단호하게 이 일을 치르고 있는지 보이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천이 얼마나 힘껏 힘을 주고 있는지 읽힌다. 이것이 바로 바로크이다!

참고로 이 장면은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의 도시인 베툴리아를 함락할 위기의 순간에 부유한 과부였던 유디트가 도시를 귀하기 위해 아름답게 꾸미고 홀로페르네스의 마음을 산 뒤 연회 후에 그의 검을 가지고 술에 잔뜩 취한 그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이러한 유럽의 전체적인 바로크 사조의 흐름 속에 북유럽인 네덜란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네덜란드의 바로크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1517년 마틴 루터의 기존 가톨릭에 대한 ‘95개 조 반박문’이 발표되면서 종교개혁의 물결이 시작되는데 네덜란드 북부는 지리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이라 칼뱅파의 개신교가 널리 퍼진다. 그로 인해 기존의 종교화보다는 좀 더 다양한 주제들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세계 무역으로 신흥 상인들의 부가 크게 늘어나면서 기존의 왕정이나 가톨릭, 귀족들이 그림의 구매자이기보다는 돈 많은 중산층의 상인, 부르주아들이 새로운 그림의 구매자로 떠오르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입맛의 그림들이 많이 그려지고 팔려 나간다. 그러한 그림들이 뭐가 있을까?

신딕스로 알려진 암스테르담 드레퍼스 길드의 샘플링 관계자 The Sampling Officials of the Amsterdam Drapers’ Guild, known as The Syndics,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62, Rijks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첫째,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담은 장르화 Genre painting, 즉 풍속화가 주를 이른다. 농부의 일상, 하녀의 일상, 상인의 일상, 골목의 일상 등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스냅샷 같은 그림들을 말한다. 그림의 주제가 성경 이야기, 신화 이야기, 왕족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로 꾸며진다. 베르메르의 그림 중에 이런 풍속화들이 많이 있는데, 그의 그림 한 번 볼까?

밀크메이드 The Milkmaid, 1600,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Rijksmuseum, Amsterdam

어? 이건 물주전자의 여인과 구도가 거의 비슷한데? 왼쪽에 창이 있고, 거기서 들어오는 빛과 그 창가 바로 앞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인, 베르메르는 이런 구도의 그림을 몇 점 더 그린다. 12점을 이런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담은 구도로 그렸다고 하니 이런 비슷한 모습의 그림은 다 베르메르 작품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빛에 대한 표현력은 정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림 가운데의 위쪽 벽에 꽂혀 있는 못을 보았는가? 그 못의 그림자 표현이 압권이다. 하녀의 오른쪽에 있는 못이 빠진 자국은 어쩜 이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 아래에는 숯을 넣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워머가 놓여 있다. 냉기가 있는 일하는 방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 뒤의 타일에는 활을 들고 있는 큐피드가 그려져 있다. 사랑의 큐피드, 여성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워머, 우유 등의 상징으로 성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글쎄? 다. 한 방울의 우유도 흘리지 않고 따르려고 온 신경을 우유 따르는 일에 몰입해 있는 하녀의 모습에 일에 대한 숭고함을 느낀다. 주위의 빵조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빵을 찍어먹는 푸딩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탁자 위에 정물화처럼 놓여 있는 노란 빵, 파란 천, 하얀 우유의 색을 하녀의 노란 상의, 파란 앞치마, 하얀 터번과 일치하게 그린 건 그의 치밀한 의도였을까?

둘째, 풍경화가 별도의 그림 주제로 떠오른다. 그전에는 그림의 뒷배경 정도로 취급되었던 풍경화인데 이제는 당당히 하나의 주요한 주제로 풍경화를 바라보게 된다. 베르메르가 그린 풍경화 한번 볼까? 입이 쩍 벌어진다. 그냥 내가 델프트 항구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나도 배를 타기 위해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기분이다. 하늘을 반 이상 비율로 그려 넣어 그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쉽게 느껴질 정도이다. 물에 반사된 표현이며 건물의 작은 시계탑까지, 사람들의 옷착장 모습 하나하나까지 그 디테일이 어마어마하다. 다시 한 번 조용히 내뱉게 된다. 베르메르, 정말 그림 하나는 끝나게 그렸구나.


델프트의 뷰 View of Delft, 1660 - 1661,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Mauritshuis, The Hague


셋째, 정물화가 하나의 주요 그림 장르로 나타난다. 이 또한 그전에는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는 소품 정도로 취급되었지만 이젠 당당히 하나의 작품 주제로 떠오른다. 아마도 삶이 풍요로워지다 보니 풍요한 일상의 세세한 물건들을 흔적으로 남겨 놓고 싶은 마음과 해양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도자기, 식기등의 새로운 물건들을 그림으로 소개하고 남겨놓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 인스타에 맛있는 음식들 올리고, 새로 산 백, 럭셔리 차 키 올리는 그런 마음과 같은 건 아닐까? 더불어 디테일한 표현력의 발달로 사실적인 표현이 엄청나다. 아니 유리잔을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 있지? 유리잔의 빛나는 광택과 그 빛에 비춰지는 이미지들, 이건 그냥 사진인데?


Still Life with Glasses and Tobacco, 1633, Willem Claesz. Heda, The Rose-Marie and Eijk van Otterloo Collection


넷째, 트로니 Tronie 라는 초상화의 발달이다. 트로니란 한 마디로 ‘이름 없는 초상화’ 를 말한다. 사실 이 시기에도 초상화는 많이 그려진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 40세부터 생을 마감하는 63세까지 약 4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긴다. 이처럼 초상화는 대체로 누구를 그렸는지 알 수 있는 인물화였다. 사진이 없던 시기에 자신 또는 사랑하는 사람 등 의뢰 대상을 그리거나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특정 인물을 그렸기에 초상화의 실존 인물이 누군지가 대체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돈 많은 상인들에게 잘 팔릴 만한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팔다 보니 팔리기에 좋은 이쁜 인물화를 먼저 그려 놓았다. 그러다 보니 실제의 인물을 그리기보다는 팔릴 만한, 누가 봐도 이쁜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게 바로 트로니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트로니를 화가의 제자들이 주로 그리는 얼굴에 대한 연습용 초상화라 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 인물의 묘사보다는 그 인물의 감정이나 과장된 표정 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그린 인물화로 보기도 한다. 이 트로니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이 매혹적인 소녀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직 모른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까? 베르메르의 첫째 딸이 아닐까 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트로니로 구분된다. 누군지 모르기에 이 그림을 가지고 상상력을 펼쳐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이 여인을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베르메르가 사랑에 빠진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같은 이야기를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주연한 영화까지 나오게 된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베르메르의 트로니 작품 하나 더 보고 갈까?

‘진주 귀걸이’의 소녀와 같은 포즈인데 느낌은 다르다. 좀 더 어린 친구인 듯하다. 더 앳된 끼가  있다. 광택이 살짝 도는 이마가 어린아이의 느낌을 더해준다. 앙-다물고 있는 입이 귀엽다. 어? 여기도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네? 베르메르가 진주 귀걸이를 좋아 헸구나. 이젠 베르메르의 그림 속 여인들을 보면 귀부터 보게 된다. 검은 배경이 이 소녀를 더 집중하게 만드는구나.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 눈빛은 여전히 나와 마주치고 있다. 안녕?


젊은 여인의 대한 연구 Study of a young woman, 1665-1667,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The Met, New York




베르메르 위작 사건, 끝나지 않은...

먼 옛날의 사건이 아니다. 1930-40년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 본다. 고전풍의 그림을 주로 그리던 네덜란드 화가인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 은 옛날 그림 베끼는 수준이라는 비평가의 혹평에 자신이 비평가들도 속일 만큼 완벽한 위작 작품을 그려 그것도 가려내지 못하는 평론가 수준이라고 한 방 먹일 구상을 한다. 위작의 타깃은 작품의 수도 적고 알려진 게 거의 없어 새롭게 발견된 작품이라고 속이기 쉬운 네덜란드의 대가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한다. 1932년 이러한 계획에 따라 작업을 시작할 새로운 저택을 빌려 이사를 하고, 베르메르가 작업했던 방식을 똑같이 따라 한다. 17세기의 캔버스를 사고, 베르메르가 썼던 안료들인 라피스 라줄리, 백색 납, 인디고 등으로 물감을 쓰고, 베르메르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오소리 머리 붓 등을 만들어 사용한다. 포름알데히드를 사용하여 300여 년 된 작품처럼 보이게 하고 100 °C 정도의 온도에서 작품을 구워 색에 균열이 생기게 하고 그 균열 사이를 검은 잉크를 채워 자연스러운 17세기 그림 느낌을 준다. 드디어 1936년 메이헤런의 첫 위작 작품이 나오는데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속인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이다. 얼마나 잘 그렸는지 어디 한 번 볼까?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1936, Han van Meegeren,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알고 봐서 그런가? 그렇게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은데? 선입견인가? 표현된 얼굴들도 조금 엉성하고, 이전의 베르메르 작품 속의 감탄이 나올 정도의 얼굴 표정이 아닌데? 아무튼, 이 그림을 들고 베르메르의 전문가라고 알려진 아브라함 브리데우스 Abraham Bredius에게 보여주는데 브리데우스는 베르메르가 주로 쓰던 백색 납을 분석하고, 엑스레이도 찍어보며, 착색 물질의 미세분광법까지 쓰며 조사한 끝에, ‘델프트 베르메르의 걸작 the masterpiece of Johannes Vermeer of Delft’ 발표한다. 그때부터 메이헤런은 날개를 단다. 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그림은 램브란드 소사이어티에 지금으로 계산하면 €4,640,000 (약 70억 원)에 팔린다. 그 이후 메이헤런은 베르메르의 많은 작품들을 그려낸다. 그가 그리고 베르메르 작품이라고 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팔려 나갔다. 메이헤런은 그림을 판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뜻하지 않은 일로 꼬리가 잡힌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던 시기에 나치의 헤르만 괴링이 메이헤런이 그린 또 다른 베르메르의 위작 ‘간음과 여인과 함께한 그리스도 Christ with the Adulteress’을 포함한 약 6,750여 개의 작품을 오스트리아 소금광산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네덜란드는 이 그림을 발견하고 메이헤런이 나치에 부역하여 네덜란드의 문화재를 넘겨준 게 아니냐는 협의로 1945년 5월 29일 메이헤런을 체포한다. 문화재 약탈자로 사형의 위협을 받은 메이헤런은 여기서 뜻밖의 고백을 한다. 사실 괴링의 손에 있던 이 그림은 가짜라고. 내가 이 그림을 그렸노라고. 그러니 베르메르의 진품이 아니니 나는 죄가 없다고. 여기서 또 진풍경이 벌어진다. 믿지 못한 법원은 기자들과 법원이 임명한 증인들 앞에서 메이헤런이 직접 베르메르의 작품을 위조한 수법으로 똑같이 그려보라고 한다. 증인들 앞에서 정교하게 그려가는 메이헤런의 솜씨에 모두들 깜짝 놀란다. 여론은 그를 ‘나치를 속인 국민 영웅’ 분위기로 바뀌고 1947년 11월 징역 1년이 선고된다. 항소를 준비하던 메이헤런은 1947년 12월 30일 몇 번의 심장마비 증세로 그의 나이 58세에 죽게 된다.


1945년 10월 법원에서 메이헤런이 베르메르의 위작 수법을 시연해 보이고 있는 모습.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메이헤런이 그린 위작이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메이헤런만 베르메르의 작품을 위작했을까? 현재까지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게 총 37점인데, 그중에 3점 정도는 아직도 논란 속에 있다. 베르메르의 수련생들이 그린 작품이 아닐까라고 하여 ‘베르메르의 스튜디오’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기도 하다. 의심받고 있는 베르메르의 작품 한 번 볼까? 여러분의 생각은?


왼쪽: 플루트를 들고 있는 소녀 Girl with a Flute, 1669-1675,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스튜디오 Studio of Johannes Vermeer,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오른쪽: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소녀 Girl with the Red Hat, 1669, (의심스러운)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왼쪽: 웃는 소녀 Smiling Girl, 1669, 아마도 메이헤런의 위조 친구인  테오 반 위겐가르덴 Theo van Wijngaarden,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오른쪽: 레이스 메이커 Lacemaker, 1625, 아마도 한 반 메이헤런 또는 테오 반 위겐가르덴,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이건 너무 한 건 아냐? 이 정도는 그냥 위조라고 할 수 있는 수준 아닌가? 그런데 매스컴에서 스토리를 입히고 전문가의 설득력 있는 인터뷰들이 더해지면 우리 같은 일반인은 그냥 속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 현재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는 작품 한 번 볼까? 순전히 저의 생각이니, 여러분의 생각은?


와인잔을 들고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with a Wine Glass, 1658-59,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Herzog Anton Ulrich-Museum, 독일

루트를 들고 있는 여인 Woman with a lute, 1662-1663,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Metropolitan Museum of Art

러브레터 The Love Letter, 1669-70, Johannes Vermeer , Rijksmuseum Amsterdam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playing a guitar, 1970-72, Kenwood House, London


소니픽처스 영화'라스트 베르메르'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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