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싱어 서전트 John Singer Sargent
마담 X (마담 피에르 고트로) Madame X (Madame Pierre Gautreau)
존 싱어 서전트 John Singer Sargent
1883 - 1884
Oil on canvas
208.6 x 109.9cm
1915년 이 작품의 모델인 마담 고트르가 56세의 나이로 죽고 바로 다음 해인 1916년 1월 8일, 존 싱어 서전트는 1890년대 초에 보스턴 미술관 큐레이터로 함께 일하면서 친구가 된, 그 당시 메트로폴리탄 관장 Director 인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inson에게 이 작품 ‘마담 X’를 메트로폴리탄에 £1,000 (현재가치로 는 약 $106,000, 약 1억 5천만 원)에 팔겠다고 직접 편지를 보낸다. 그때 이 작품은 전시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었고, 미국에 있기 때문에 미술관이 원한다면 그대로 미국에 있는 게 좋겠다고 서전트는 말한다. 그동안 이 작품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로빈슨은 깜짝 놀라며 바로 미술관의 구매 위원회 Museum's Committee on Purchases에 편지를 보내 너무나 좋은 기회이고 적당한 가격이니 꼭 구매해야 한다고 어필한다. 서전트의 편지를 받은 지 6일 후 위원회는 최종 구매를 승인한다. 메트로폴리탄에 구매를 제안하는 편지에서 서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I suppose it is the best thing I have done.
- John Singer Sargent -
먼저, 이 모델이 궁금하다. 누구일까?
이름은 버지니 아멜리 아베그노 고트로 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으로 1859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남북전쟁에서 죽은 후 그녀가 8살 때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넘어와 줄곳 파리에서 교육받고 생활한다. 그녀의 미모로 19살 때부터 프랑스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창백할 만큼 새하얀 피부, 브라운 헤어, 잘록한 모래시계 허리 등으로 등장하자마자 눈에 띄는 우아하고 세련된 파리지앵으로 스타가 된다. 얼굴색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벤더 파우더를 듬뿍 바르고, 피부를 더 하얗게 보이기 위해 바디 파우더를 많이 사용하고 머리와 눈썹을 염색하였다고 한다. 그녀 스스로도 외모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녀 스스로 사회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고 하여 ‘프로페셔널 뷰티 professional beauty’ 라 불렀다. 그녀의 나이 20살 때 그녀보다 22살이나 많은 프랑스의 은행가이자 해운 재벌인 피에르 루이 고트로 Pierre Louis Gautreau와 결혼하고 바로 다음 해 딸을 낳는다. 사진을 보니, 파리에 이름날 만한데?
이렇게 아름다움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마침 인물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돈을 벌고 있었던 서전트도 그녀를 그리고 싶었겠지? 그 당시 서전트의 생각은, 파리의 인플루엔서인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초상화 화가로 더 이름이 알려지면 더 많은 의뢰가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하여 고 트로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그녀를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처음에 그녀는 다른 많은 화가의 요청에 대했던 것처럼 거절하지만, 서전트에게는 같은 미국계로서 프랑스에서 사는 동병상련을 느낀 걸까? 3살 차이로 뭔가 말이 통했던 걸까? 이 정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면 맡겨도 되겠다 생각했던 걸까? 이 그림으로 한 번 더 도약하는 셀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서전트에게는 오케이 한다.
전문 모델이 아니었던 고트로는 그림 그리는 포즈를 잡는 것도 많이 힘들어하고, 차분히 앉아 있는 것도 쉽지 않아 해서 별 진전이 없다가 그녀의 제안으로 브르타뉴의 여행에 따라가 약 30여 개의 스케치를 그려보고 최종 지금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채화와 흑연에 의한 인물 연구 A figure study by Sargent in watercolor and graphite, c. 1883. Harward University art museum
그림 사이즈가 약 2m이다 보니, 앞에 서면 진짜 그 사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1:1 등신대 느낌이다. 이 그림 그릴 때 고트로의 나이 25살, 모델도 정말 이쁜 나이일 때 그렸구나. 그림도 너무나 이쁜데? 이건 뭐 그냥 사진인데? 안 그래도 이쁜 사람을 더 이쁘게 그렸는데? 1884년 작품이라는데 이건 그냥 지금 시대랑 다를 게 없는데? 이브닝드레스도 지금의 드레스 그대로인데? 검정 새틴 드레스가 정말 이쁘구나. 하얀 피부를 위해 가루를 듬뿍 발랐다고 하는데 하얀 피부를 더 빛나게 해 주네. 섹시함과 우아함 모두 잡아주는구나. 살짝 빛 받은 광택과 주름이 그냥 사진인데? 왼손에 들고 있는 부채가 나, 사교계에서 이름 좀 알려진 셀럽이에요-하는 것 같다. 탁자를 짚고 있는 오른손 포즈가 예술인데? 예술 작품을 보고 예술이라고 하고 있다. 탁자를 짚고 있는 저 오른손이 어색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전혀??!! 어떻게 이런 포즈를 끄집어냈을까? 오른손에 무게 중심이 살짝 가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옆으로 돌리고 있는 얼굴 옆모습은 신의 한수구나. 정면이었다면 지금의 매력보다 덜 하지 않았을까? 요즘처럼, 오른쪽이 더 이뻐서 저 방향이었을까? 오뚝 솟은 콧대가, 나 콧대 높은 여자예요- 하고 있다. 귀는 너무 놀라운데? 어떻게 저렇게 표현하지? 귀의 굴곡 하나하나 다 살려 놨네. 귀걸이가 있었으면 조금 과했을까? 장식이라곤 드레스의 빛나는 어깨 끈, 머리 위의 다이아몬드 초승달, 왼 손의 금색 결혼반지뿐이다. 고개 돌렸을 때의 목 힘줄이 그대로 다 살아 있네. 머리를 바짝 올려서 목선이 그대로 다 드러나네. 배경까지 심플해서 그녀에게 더 집중되는구나. 이쁜 사람에 이쁜 그림, 서전트,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이 그림이 왜 그 당시에 그렇게 욕을 많이 먹었을까? 1884년 파리 살롱전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작품명은 ‘ 마담 *** 의 초상 Portrat de Mme ***’이었다. 이 당시 서전트는 ‘이젠 나도 이 파리에 화가로서 이름 한 번 날릴 수 있겠지? 돈 많은 상류층의 초상화 의뢰가 봇물 터지겠지?’ 기대했지만 반응은 혹평이었다. ‘오 여기 아름다움이 있네, 오, 얼마나 끔찍한지! Ah, here is beautiful! Oh how awful!'라고 말하기도 하고, 창백하고 시체 같다고 까지 말한다. 처음의 살롱전에 출품했던 그림에는 한쪽 어깨끈이 살짝 내려가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하는데 그 그림 한 번 볼까?
이게 외설스러운가? 그 당시에는? ‘올해 살롱에서 가장 외설스런 작품이다. by L'Artiste의 한 평론가’라고 하기도 하고, ‘드레스가 떨어지고 있어! 일부러 그런 거야! by La Vie Parisienne’라고 풍자를 하기도 하고, ‘ 단순히 화제를 위해 고의적으로 과장한 것 by Art Amateur의 한 작가’ 이라고까지 비난했다. 벗겨질 듯 한 어깨끈, 도발적인 드레스, 모델의 거만한 태도, 인공적인 화장품, 부자연스러운 창백한 피부, 꽉 쪼인 허리, 속옷을 안 입었네 등 맹비난을 당한다. 왜일까? 이 보다 더 야하고 외설적인 그림이라고 하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도 ‘올랭피아’ 도 이 그림보다 약 20여 년 전인 1863년인데 이게 그렇게까지 욕먹을 그림인가? 내 생각에는 작품의 야함 보다는 모델이 고 트로여서였던 것 같다. 아름다움을 이용해 써먹고사는(?) 전문적인 ‘프로페셔널 뷰티’ 마담 고 트로가 이제는 아예 ‘나 섹시한 고 트로예요-’라고 뻔뻔하게 대 놓고 서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거기다 그림까지 너무 이뻐?! 이건 뭐 그냥! 확! 거기에다 둘 다 미국계인으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프랑스 주류를 이렇게 흔드는 모습이 얄밉지 않았을까?
서전트는 크게 실망한다. 고트로의 어머니는 그림을 당장 내려 달라고 한다. 서전트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그렸다며 거절하지만, 그도 참기 힘들었었나 보다. 전시 이후, 흘러내린 어깨끈 때문인가 보다 싶어 그 위에 덧칠을 하여 어깨끈을 올려놓는 모습으로 재작 업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재작 업된 고트로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 일 이후로 서전트는 파리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이 그림과 함께 런던으로 가 버린다. 이렇게 이 그림은 20년 동안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림이 된다. 1905년 서전트는 런던의 카팩스 갤러리에서 이 초상화를 다시 전시하기 시작해서 1908년 런던, 1909년 베를린, 1911년 로마 그리고 1915년 샌프란시스코의 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 Panama-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까지 전시하고 그렇게 미국 땅에 들어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정착하게 된다.
존 싱어 서전트 John Singer Sargent 1856 -1925,
부모님이 모두 미국인인 안과 의사 아버지와 몸이 쇠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이태리 피렌체에서 태어난 서전트는 줄곧 유럽에서 생활한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해외로 나갈 것을 결정한 가족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바다, 산악 휴양지 등에서 보내는데, 이렇게 다니면서 서전트는 자연과 풍경 그림에 빠진다. 아버지는 의료 일러스트레이터이고 어머니는 아마추어 예술가였는데 그 피를 고스란히 받은 걸까? 그가 그린 풍경 그림을 보면 정말 입이 쩍 벌어진다. 이런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 거구나 싶다. 우리 일반인은 도저히 따라기기도 힘들 정도로 감탄만 나온다.
카살레에서 굴 낚시하기 Fishing for Oysters at Cançale , 1878, John Singer Sargent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칸살레의 굴 낚시 하기’의 하늘의 구름은 정말 만져질 것만 같고, 그 보다 더한 건 바닥의 물 비침 보았는가? 물에 비치는 하늘과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이건 그냥 유화를 갖고 노는 사람이다. ‘야외 그림 연구’에서는 풀밭에 있는 하나하나의 풀을 어떻게 저렇게 살려서 표현하지? 정말 이건 풀인가, 물감인가? 풀들이 바람에 스치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서전트, 인물화만 잘 그리는 게 아니었구나.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모든 장르의 그림을 이 정도 그릴 줄 알아야 하나 보지? 그래서 사실 서전트의 마담 X 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가 인물화만 잘 그리는 줄 아는데, 그는 풍경화도 정말 잘 그렸다. 그의 풍경화는 인상주의의 느낌이 살아 있다.
서전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사조적으로 인상주의가 주 트렌드였다. 마네, 모네, 드가, 세잔, 반 고흐, 고갱 등이 활동했던 시기와 같다. 다양한 빛을 가지고 기존에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그림을 그려 냈던 대변혁의 시기였던 것이다. 심지어 말년에는 입체주의, 야수주의등 현대미술의 시작이 열리고 있었는데 서전트는 아직도 클래식한 그림에만 집착하는 사실주의자이다라는 비평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이 커다란 인상주의의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게 바로 그의 풍경화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인상주의의 대가인 모네, 드가, 로뎅, 휘슬러 등의 거장들을 만나 교류를 하고, 실제로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모네를 만나 야외 햇볕 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모네 작품을 4개나 개인적으로 구매하기도 하였다. 1885년 모네가 있었던 지베르니를 방문하여 모네가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서전트가 그린 작품이 있는데, 이건 뭐 그냥 인상주의 그림이다. 누가 서전트를 인상주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 이름을 분명히 보라. 그림은 인상주의인데, 작가 이름은 분명히 존 싱어 서전트이다. 이제 서전트의 풍경화를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풍경화도 잘 그리는 서전트 작품이군’ 하면서 자연스럽게 접하시길 바란다.
숲 가장자리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모네 Claude Monet Painting by the Edge of a Wood, 1885, John Singer Sargent, Tate Britain
하지만 이러한 풍경화 속에서도 인물들의 표현은 심상치가 않다. 물감 덩어리들 같은데 멀리서 보면 디테일이 살아 있는 듯하다. 서전트는 스케치 없이 물감으로 캔버스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쓱쓱- 어? 이거 알라 프리마? 맞다. 서전트는 미술관에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특히나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그림 연구하는 걸 좋아했다. 벨라스케스가 즐겨 쓰던 기법인, 특징만 잡아서 물감으로 한 번에 쓱쓱- 표현하는 것이 알라 프리마 Alla Prima (Wet-on-wet 이탈리아어로 ‘한 번에’라는 뜻) 기법인데, 그림의 대가들만 할 수 있다는 기법으로 마네도 서전트도 이렇게 그림을 그렸다. 벨라스케스를 정말 좋아했나 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에 영향을 받아 그린 서전트 그림 한 번 보아 볼까?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 1882, John Singer Sargent, Museum of Fine Arts Boston
아, 닮았네. 구성이 많이 닮았네. 왼쪽, 오른쪽 잘린 듯한 벽면과 앉아 있는 아이를 벨라스케스의 마가리타 공주처럼, 뒤에 살짝 보이는 모습으로 표현한 두 자매등 닮아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인물 묘사가 가희 역대급이다. 사람을 잘 그렸구나. 정말 사진처럼 살아 있는 듯하다. 누가 나를 또는 우리 가족을 이렇게 그려 준다면 하나 갖고 싶은데? 그래서 서전트는 먹고살기 위해 수요가 많았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서전트는 조수 없이 일했다. 그림이 걸릴 곳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의뢰인의 집도 방문하고 적절한 의상을 위해 고객이 옷장도 뒤지고 한 고객에 8-10번 자리를 잡고 그렸다. 좋은 표정을 위해 즐거운 대화도 이어가야 하고 피아노도 직접 연주하곤 했다고 한다.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이 나서 미국에서 그가 살고 있던 런던까지 직접 찾아온 고객도 있었다고 한다. 캔버스부터 미술 재료들, 포장, 배송등 모두 그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 한 초상화당 약 $5,000 정도 받았는데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3만 달러(1억 7천5백만 원)이다. 그래서 상당히 돈도 많이 번다. 하지만, 그의 나이 51세에 서전트는 초상화 그리는 작업을 공식적으로 끝낸다. 그가 했던 말에서 그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하는 동안 말하기를 강요받지 않는다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꽤 재미있을 것이다.
앉아 있는 모델을 즐겁게 하고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낄 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Painting a portrait would be quite amusing
if one were not forced to talk while working.
What a nuisance having to entertain the sitter and to look happy
when one feels wretched.
- John Singer Sargent -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시간은 내가 그림을 그릴 때이다.
The only time I feel alive is when I'm painting.
- John Singer Sarg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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