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 Auguste Renoir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녀의 아이들
Madame Georges Charpentier (Marguerite-Louise Lemonnier, 1848–1904) and Her Children, Georgette-Berthe (1872–1945) and Paul-Emile-Charles (1875–1895)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 Auguste Renoir
1878
Oil on canvas
153.7 x 190.2 cm
르누아르의 후원자이자 글 쓰는 작가였던 샤르팡티에 부인 Madame Georges Charpentier 의 의뢰로 그려진 이 그림은 1879년 살롱전에 전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고 르누아르에게 재정적으로도 큰 도움을 준다. 1904년 그녀가 죽고 다음 해에 남편까지 죽은 후, 그녀의 딸들이 이 그림을 경매로 내놓는다. 190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영국의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로저 프라이 Roger Fry 는 르누아르뿐만 아니라 인상주의 화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자주 사고팔았던 프랑스의 딜러 폴 뒤랑-뤼엘 Paul Durand-Ruel 에 의뢰하여 이 그림을 구입해 달라고 요청한다. 1907년 4월에 84,000 프랑에 구매하여 현재까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다.
작품명에 있는 샤르팡티에 부인이 궁금하다. 누구일까?
결혼 전 원래의 이름은 마거릿 루이스 레모니에 Marguerite Louise Lemonnier 로 그녀의 나이 24살 때 프랑스의 출판사 대표였던 조르주 샤르팡티에 Georges Charpentier 와 결혼하면서 마담 조르주 샤르팡티 Georges Charpentier 에 가 된다. 둘 사이에 자녀는 조젯 Georgette, 마르셀 Marcel, 폴 Paul, 쟌느 Jeanne 4명을 두었는데 이 그림 속의 두 자녀가 조젯과 폴이다. 샤르팡티에 부인은 매주 금요일 자신의 집 살롱에 글 쓰는 작가, 예술가, 배우, 음악가, 정치인 등 유명 셀럽들을 모아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이때 르누아르, 모네, 시슬리 등의 인상주의에 빠지게 되고 인상주의 그림을 사기 시작한다. 특히 르느아르에게는 1876년부터 1879년까지 후원자가 되어 경제적으로 지원도 하고, 거의 10년 동안 자신의 가족 모습을 담은 초상화도 많이 의뢰한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보는 그림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가족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 이런 가족의 모습을 꿈꾸지 않는가? 새벽부터 나가서 밤늦게 녹초가 되어 들어와도 이런 가족의 모습을 그리며 그렇게 고생하는 것 아닐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가 띠어져 있는 엄마의 모습, 참 우아하시네. 그냥 바로 평창동입니다- 라고 말할 듯하다. 이 엄마는 아이들 위해 직접 밥하고 세탁기 돌리고 할 그런 모습의 엄마는 아니겠지. 집에 일하는 이모님이 있지 않고서야 집에서 저런 드레스를 입고 있을 수가 없다. 어이쿠, 가슴에 있는 금색 브로치며 양쪽 손목에 차고 있는 묵직한 금팔찌들, 여러 손가락에 끼고 있는 금반지들, 진주 귀걸이 등 좀 사는 사모님 맞으시네. 좀 사는 집 맞는 게 거실 인테리어도 심상치 않다. 벽의 화려한 공작새 문양과 새가 있는 병풍 느낌 나는 벽지가 일본풍 인테리어다. 에잇! 꽃무늬의 의자, 화려한 꽃병과 과일을 담은 그릇과 술병 도자기들, 대나무 의자, 그 당시 유럽에 유행했던 자포니즘이 여기까지? 에잇!
갸악,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그냥 인형이네. 한 아이는 꽃무늬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한 아이는 털이 복실복실한 개 위에 앉아있다. 개와 얼마나 친밀감이 있는지 개는 아랑곳 하지 않고 푹 늘어져 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 검은색, 하얀색이 샤르팡티에 부인과 깔맞춤 했네? 개도 한 가족이구나. 샤르팡티에 부인의 네 자녀 중 두 자녀인데 왼쪽이 그 당시 6살인 여자아이 조젯 Georgette 이고 오른쪽이 그 당시 3살인 남자아이 폴 Paul 이란다. 어? 오타인가? 남자아이 폴이라고?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남자아이 폴이란다. 아, 남자아이를 이렇게 입혔다니? 머리모양도 누나인 조젯과 똑같은데? 하얀 양말에 신발만 굽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지 색깔도 똑같네. 그날 그림 그린다고 엄청 신경 써서 입힌 옷일 텐데 파란색 원피스에 하얀 프릴이 달린 너무나 이쁜 원피스를 남자아이에게도 원피스를 입혔다. 남자아이에게 원피스라니! 깜짝 놀랐다. 왜 남자아이에게 원피스를 입혔을까?
그 시기에는 성별에 구별 없이 남자아이에게도 원피스를 많이 입혔다고 한다. 사회현상이다 보니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은데, 첫째, 4-5세 전까지는 화장실 훈련을 받기 전이라 바지보다는 원피스가 편해서 실용적으로 많이 입혔다고 한다. 또한 너무 어린아이는 아직 성별의 구분이 없는 그냥 나이로 여겨졌기에 옷차림도 비슷하게 입히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 위생, 치료약 등이 발달되지 않아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던 시기였다 보니 이것을 악귀가 쓰여서 죽었다 생각하여, 남자아이에게 드레스를 입히면 악령이 순한 여자아이로 생각하여 괴롭히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다는 풍습이 있어 남자아이에게도 드레스를 많이 입혔다고 한다. 너무 재밌는데? 그럼 왜 또 파란 원피스일까? 핑크색이 아니고?
옛날에는 남자가 핑크, 여자가 파랑이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안료로 구하기 쉽지 않은 파랑, 특히 울트라 마린 Ultramarine 은 아프가니스탄에서만 귀하게 나는 라퓨즈 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라는 암석을 먼 유럽까지 가지고 왔던 터라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기도 하여 ‘귀한 성모 마리아의 색’으로 많이 쓰였던 여성의 색이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럼 남자는 핑크? 우스개 소리로 남자가 핑크색 셔츠, 핑크색 바지등을 입었을 때 놀리는 느낌으로 ‘오, 남자는 핑크지’ 라고 말하는데 사실 핑크는 처음에 남자의 색이었다고 한다. 왜 남자가 핑크였는지 여러 가지 설 중에 하나가 전쟁에서 남자들이 피를 흘리고 많이 죽다 보니, 피 흘린 군인의 모습을 조금 희석화시키기 위해 군복을 빨간색 계통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핑크였다는 것이다. 이게 남녀 구분 없이 오랜 세월 사용되어 오다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군수물자 공장등의 일손이 모질라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급증했고 1950년대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 때 부인이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메릴린 먼로의 영화, 패션 디자이너 등이 여성에게 많이 쓰면서 유행이 되고 지금의 여성 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핑크 Pink 라는 단어도 디아투스 Dianthus 라는 식물 꽃의 이름에서 파생되어 처음에는 색단어가 아니라 지그제그 꽃 모양을 나타내는 모양단어였다. ‘To Pink’ 라고 하면 ‘지그재그 한 모양을 만들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핑킹가위는 ‘핑크라는 꽃 모양을 만들어 내는 가위’라고 하여 핑킹가위 Pinking Shears 라 부르고 있다. 그럼 핑크라는 색단어 전에는 그 색을 뭐라고 불렀을까? ‘로즈, 로사 Rosa’ 장미색으로 불렀는데 이 꽃이 모두 그 색이다 보니 모양단어인지 색단어인지 혼용되어 쓰여지다가 지금의 색단어 ‘핑크’로 자리 잡게 된다.
르누아르, 참 아이들 이쁘게 잘 그리네. 너무나 사랑스럽게 잘 표현한다. 너무나 귀여워서 만져 보고 싶을 만큼이다. 발그레한 볼살도 놓치지 않고, 아기살 있는 볼록볼록한 팔, 다리도 잘 살려 그린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르누아르가 그린 다른 아이 그림 한 번 볼까? 그의 실력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어이쿠야, 잘한다- 잘한다 하니 더 잘하는구나? 어쩜 아이를 이렇게 표현하지? 저 파란 눈을 보았는가? 눈이 다했네. 파란 눈에 머금고 있는 하얀빛까지 놓치지 않고 다 표현했다. 발그레 볼살이며, 살짝 벌리고 있는 입술 사이고 보이는 이는 어떡할 거야? 금색 머리카락은 왜 또 이렇게 이쁜데? 아이들이 놀 때 뭐 묻히지 말라고 많이 입혔던 하얀색 피나포 pinafore 까지 너무 귀엽다. 아이가 원래 이쁜 거야? 그림을 잘 그린 거야? 아이의 가족 얘기에 따르면, 이때가 독일어 수업 중에 나와 계단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르누아르가 우연히 발견하고, 빠르게 그려 냈다고 한다. 그럼 저 눈망울이 눈물 맺힌 하얀 눈망울인가? 이 아이의 부모는 외교관이자 은행가인 폴 베라드 부부인데 위의 샤르팡티에 부인의 금요 살롱 모임에서 만나 인연이 되어 르누아르를 후원하고 가족 그림과 아이 그림까지 남기게 되었다. 샤르팡티에 부인이 주위에 르누아르를 많이 소개해 재정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르누아르는 이처럼 따뜻한 가족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마음도 따뜻하겠지? 르누아르가 그렸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또 다른 가족사진? 아니 가족 그림 하나 더 볼까?
아, 음악 하는 가족이다.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이 딸들도 있는 집 아이들 맞구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큰딸이 18살 위게트,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둘째 딸이 13살 클리우딘, 피아노를 옆에 서 있는 아이가 막내딸 10살 헬리온느라고 한다. 이 세상 모든 아빠들의 로망이 사랑하는 딸들이 각자 자기의 악기를 하나씩 다룰 줄 알고,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악기로 화음을 만들어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 아니까? 그 꿈을 이렇게 그림으로 보여주는구나. 이렇게 이쁘게 잘 커줘서 고마워. 내가 다 흐뭇하다. 누구의 딸일까?
르누아르의 친구인 카툴 멘데스 Catulle Mendès 의 딸이라고 한다. 카툴 멘데스는 프랑스의 상징 중의 시인이자 출판사를 운영하였고, 그의 부인은 피아니스트 거장인 아우구스타 홀메스 라고 한다. 음악 하는 가족이었구나. 그럼 이 악기들도 그냥 소품 연출용이 아니었구나. 약 10년 전에 그렸던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녀의 아이들’의 성공 이후로 다시 한번 더 이름을 알리기 위해 르누아르가 야심 차게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인정이다. 르누아르는 이런 가족 그림을 잘 그렸네. 르누아르는 이렇게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르누아르를 일컬어 ‘인상주의에 사람을 더한 화가’라고 부른다.
카툴레 멘데스의 딸들, 위게트, 클라우딘, 헬리온느 The Daughters of Catulle Mendès, Huguette (1871–1964), Claudine (1876–1937), and Helyonne (1879–1955), 1888, Auguste Renoir, The Met
르누아르가 사람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가장 단편적인 그림이 하나 있다. 르누아르는 함께 첫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었던 모네, 스실리, 바지유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림을 그리러 많이 다녔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다른 친구들과 달랐다. 1869년 센강의 한 리조트인 라 그르누이에르 La Grenouillère 에 르누아르와 모네는 함께 이젤을 세우고 같은 뷰를 그렸다. 모네의 라 그르누이에르 작품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고 보시길 바란다. 둘 다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 표현이 어마어마하다. 둘 다 저세상 사람의 실력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같은 듯 달랐다. 아래 첫 번째가 모네가 그린 그림이고, 두 번째가 르누아르가 그린 그림이다. 차이가 보이는가?
그렇다. 르누아르 그림에는 사람이 있다. 르누아르는 이렇게 풍경을 그리면서도 사람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을 담은 풍경을 그렸던 것이다. 르누아르에게는 사람이 중요했던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 답다. 다음 그림도 이런 관점에서 한 번 느껴 보시기 바란다. 같은 제목, 다른 느낌이다. 재미있다. 재밌다고 느끼면 당신은 이미 그림의 즐거움에 한 발 들여놓은 셈이다. 이래서 그림 보러 다니는구나.
모네가 그린 ‘양산을 쓰고 있는 여인 - 마담 모네와 아들’ Woman with a Parasol Madame Monet and Her Son, 1875, Claude Monet,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르누아르는 이렇게 행복한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가족 그림도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가? 그의 그림에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게 놀고 즐기는 주제들이 많다. 그래서 파티 그림도 많고, 연인들이 함께 춤추고 노는 작품들도 많다. 그는 이러한 그림들을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한다. 왜 이런 그림만 그리냐는 우리의 질문에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왜 예술은 아름다우면 안 되나요?
세상에는 불쾌한 것들이 충분히 많은 걸요.
Why shouldn’t art be pretty?
There are enough unpleasant things in the world.
- Pierre-Auguste Renoir -
파리 몽마르트르에 위치해 지금도 있는 물랭 드라 갈레트라는 카페의 무도회 모습이다. 인상주의 시대에 많은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왁자지껄한 모습니다. 그림 잘 그렸네, 르누아르. 나이브한 가족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는데 이런 그림도 잘 그렸구나. 그런데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림 안에 어른 거리는 그림자와 빛이 살짝살짝 눈에 들어오는가? 옷 위로, 모자 위로 내리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얼룩덜룩해 보이기도 하고 밝은 빛이 눈에 아른 거린다. 이게 르누아르식 인상주의의 특징이다. 인상주의의 큰 담론인 ‘빛을 담는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떻게 빛을 담느냐가 각자 화가들의 차별화인데 보통은 유화 물감의 색을 섞어서 빛을 담는 기법을 쓰는데 르누아르는 그것과 달리 기존 유화물감의 색을 건들지 않고 그 색 위로 빛과 그림자를 넣는 기법으로 빛이 있는 것처럼 그려낸다. 그래서 위 그림처럼 햇볕이 어른 거리는 느낌이 난다. 천재구나, 르누아르.
작품 제목이 너무 재미있다. 도시에서의 춤, 시골에서의 춤이란다. 작품 속 남자는 르누아르의 친구인 폴 로트 Paul Lhote 로 같은 사람인데 여인만 다르다. ‘도시에서의 춤’의 여인은 드가의 모델로 시작하여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나왔던, 자신도 화가인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이다. 수잔 발라동의 아들이 르누아르와 닮았다 하여 르누아르와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라는 설이 있는 여인이기도 하다. ‘시골에서의 춤’의 여인은 나중에 르누아르의 부인이 되는 알린 샤리고 Aline Charigot 이다. 알린 샤리고의 모습이 수잔 발라동의 모습보다 더 수수하고 세련되지 못하게 그렸다고 르누아르 나쁜 놈, 자기 와이프를 더 이쁘게 그렸어야지!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둘 다 충분히 아름다운데? 여러분의 생각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인상주의에 아름다운 사람과 여인을 더한 화가, 르누아르는 20대 초반에는 파리에서 미술 공부하면서 만난 알프레드 시슬리, 프레데릭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30대에는 카미유 피사로와 에드아르 마네 스타일에 영감을 많이 받았다. 나 인상주의요- 하는 화가이다. 그런 르느아르가 인상주의 창립 맴버로 1874년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부터 1877년 세 번째까지는 참여하였지만 그다음해는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엄청 강해서 시도도 많이 하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겸손함으로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화가이다. 그가 생애를 마감한 78세에 르누아르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제야 뭔가 좀 배우기 시작한 것 같아.
I think I'm beginning to learn something about it.
- 78세 르누아르 -
일례로, 1881년 이탈리아 여행을 가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등의 르네상스의 작품들을 보고 르누아르는 충격을 받는다. 지금까지 확신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인상주의 그림들이 르네상스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클래식한 그림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잘못된 그림이라 생각하고 데생을 더 강화하여 라인이 선명한 클래식한 그림으로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확 바꾼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린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이게 르누아르의 그림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 고전의 클래식 그림이다.
놀랍지 않나? 르누아르의 이러한 그림풍을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의 대가인 앵그르의 영향을 받았다 하여, ‘르누아르의 앵그르 시대’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1890년 이후 다시 방향을 바꾼다. 선명했던 라인이 조금 더 퍼져 보이는 초기의 르누아르의 스타일에 클래식한 느낌이 더해 새로운 르누아르의 스타일로 돌아온다.
그의 나이 52세에 찾아온 류머티즘 관절염에 기형적인 움직임으로 변해가는 손과 오른쪽 어깨의 경직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던 르누아르는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가면서, 그것도 모자라 붓을 손에 묶고 그림을 그리는데 아, 그의 모습 앞에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이토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렇게 까지 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이 그를 이렇게 까지 그리고 싶게 만든 걸까? 그는 답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The pain passes, but the beauty remains.
- Pierre-Auguste Reno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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