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례씨 기억 속, 일본. 일본인을 사귀는 손녀 딸
가끔 등장 하는 가십을 많이 하는 이웃 아줌마, 너무 경쟁을 하던 이웃 상가 횟집 주인 댁과 남편 진을 빼면 대부분의 나쁜놈들은 일본인이다.
정례씨의 삶이 영화화된다면 분명 도입부 큰 영향을 주는 악역 조연은 동네에 돌아다니던 ‘나쁜 일본놈’들과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도운 한국인들일 것이다. 같은 나쁜 짓을 했지만 그 시절 정례씨의 눈에는 일본인은 선천적 나쁜 놈, 앞잡이를 하는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나쁜 짓을 하는 선천적 착한 놈들이었다.
이런 선과 악이 뚜렷한 이분법적인 논리는 세월이 흘러 더 또렷히 정례씨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왔다. 상황이 사람을 나쁘게 만든다는 논리는 개과천선하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다양한 매개체의 이야기들과 실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지했지만, 정례씨의 이 너그러움은 오직, 한국인에게만 해당됐다. 정례씨는 종종 “일본놈들은 뼈 속까지 나쁜 놈들이야!” 라고 말을 한다.
“독도는 우리 땅인데 이제까지 저렇게 우기고, 게다가 아베*, 저 사람을 봐라! 딱 봐도 어? 인상이 딱…
으이그, 그리고 이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저렇게 쓰고 나오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정례씨의 말에는 한이 많이 담겨있는데 그것은 그 시기 어려움 때문에 글을 못 배워 생긴 열등감에서부터 시작된 듯 하다.
정례씨는 이 “나쁜 일본놈들”이 자신 집에 있던 양푼이며 냄비며 모든 쇠붙이는 다 챙겨가는 바람에 이것들을 몰래 숨겨야 했던 기억을 자주 곱씹는다.
시골에 살았고 딸이었고 게다가 계속 나빠지는 가정과 한국 경제 상황때문에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 했다. 딸이어서- 가 점차 그녀가 이해하게 된 이유였지만 그녀는 일본놈들만 아니었어도 당신은 학교를 갔을거라 확신한다. 경제 상황이 더 나았더라면 그녀는 분명 학교를 갔을 거고 더 편안한 삶을 이끌었으리라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정례씨는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지식에 대한 선망을 어릴 적 부터 했다. 그 무엇보다 그녀는 글을 읽고 싶었다. 이 세상에 난무하는 글들을 당신도 읽고 싶고 참여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지만 당신의 오빠와, 남 동생이 학교를 다녀야 했기때문에 정례씨는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평생 글을 못 읽는다는 열등감에 정례씨는 자신의 까막눈이 발칵될지도 모르는 장소를 모조리 피했다. 문화 센터의 수업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동네 모임도 정례씨는 즐기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글을 못 읽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티비를 보고 뉴스를 볼 때도 먼저 자막에 대한 말을 안 꺼냈다. 결혼을 하고 한참동안 나의 엄마 혜자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정례씨가 화를 내며 숨기려고 했던 자신의 까막눈은 평생이고 그녀와 함께 했다.
당신의 자식들이 가정을 이루고 경제적 독립을 했을 때 정례씨는 오래 운영하던 횟집 문을 닫았다. 팔목이 저려왔고 무릎도 아팠다. 이제는 아픔을 참고, 죽을 힘을 다해 생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을 미뤄두었던 글을 배우기 위해 야간 학교에 등록했다.
글을 배우고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정례씨는 티비 뉴스에 크게 나오는 글을 또박 또박 아주 크게 읽기 시작했다. 이전엔 어떻게 그러지 않았나- 라고 느낄 정도로, 옆에 있던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티비를 켜고 뉴스를 보며 정례씨는 자신의 눈 앞을 뿌옇게 가리던 문맹의 안개를 걷어버리고 평생 읽을 수 없었던 단어들을 하나 하나 자신의 눈과 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읽었다. 이제껏 못 읽었던 글들을 다 읽어버릴 기세로.
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당시 나의 교수님 중 몇몇 분은 정례씨의 나이었다.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시던 크리스티나 교수님 같은 경우는 정년 퇴직 나이를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대한 열정이 강하셨고 심지어 나를 포함 20명이 넘는 학생들을 책임지고 스페인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직접 운영하셨다. 여성 분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종종 정례씨를 떠올렸다.
마른 체형에 곱슬머리, 외모적인 부분도 정례씨를 떠오르게 했지만 더 정확하겐 성향이었다.
분명 정례씨도 글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박사학 까지도 꿈 꿨을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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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학교를 다니고 나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정례씨의 열등감은 감사함으로 변했지만 이는 또 가끔, 일본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진짜 나쁜 놈들이다. 너희는 모른다. 매일 눈 뜨면… 쌀이고 냄비고… 게다가 한국어도 못 쓰게 했어!”
그 어릴 적 습관으로 정례씨는 여전히 자신의 집에 있는 많은 물품들을 일본어로 호칭한다.
오봉, 다마네기,.... 등등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부엌에 관련된 단어인데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는 매번, 할머니 - 그게 뭐에요? 라고 묻고. 그럴때마다 정례씨는 자신이 일본어를 썼다는 걸 인지하고 기쁘지않다.
“다마네기는 양파. 승희야, 다마네기 하나만 저기 뒷 베란다에서 가져와줄래?”
한국어로 그 단어를 알려주고도 가장 편한 일본어의 호칭으로 다시 정정한다. 정례씨는 이런 자신의 모습에 기쁘진 않지만 그게 편하다.
진즉 여러 번 들어봤던 일본인의 이야기이지만 이 “일본놈은 나쁜 놈” 이라는 주제를 가진 이야기는 몇 해전 내 남자친구 D가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 더 잦아졌다.
D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의 부모님 밑에서 어릴 적 일본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닌 친구다.
나는 D와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 사귀게 되었고 종종 여름 방학에 기회가 되면 서로의 고향을 방문했다. D는 나보다 몇 살 어렸으며 이미 이는 정례씨에게 반대할 이유가 충분히 되었다.
하지만 D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정례씨는 그의 나이를 묻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다. 반대할 이유가 그 하나로 충족했기 때문이다.
D의 부모님은 후쿠오카에 살고 계셨고 나의 부모님은 마산에 사셨으니 부산과 후쿠오카를 오가는 이렇게 저렴한 배를 타고 서로를 방문할 수 있는 것도 운명이 아니냐- 라고 기뻐하던 시절이었다. 마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4시간은 기본인데 후쿠오카까지는 배로 3시간이라니! 나에겐 너무 기뻤던 이 물리적 가까움이 할머니가 느끼는 일본과의 감정적 거리와 대비되어 다가왔다.
무더위가 하늘을 찌르던 한 여름 날, D가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부산 항에 도착했다.
D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 나의 아빠 명권과 나는 부지런히 마산에서 출발해 일찌감치 부산 항에 도착했다. 시간 약속에 아주 철저한 명권 덕분에 충분히 30분 넘는 시간 일찍 도착했고 주차하기가 편하지 않은 곳이라 D가 도착하기 전까진 나 혼자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곤 명권은 당신이 정례씨에게 먼저 가있을테니 D가 도착하면 함께 택시를 타고 당시 정례씨가 입원해있던 영도의 작은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정례씨는 그 해 여름 독감이 심해져서 입원을 했고 병원에 지내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큰 손녀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하니 긴장 반 설렘 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D의 국적에 대해 정례씨에겐 귀띔을 해주지 않았다. 미리 알아도, 달라질게 없을거라는 판단이었다.
나의 남자친구 D 또 한 정례씨와 그의 일본에 대한 감정 거리에 대해 인지하지 못 한 상황이었고 나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이건 분명 나의 불찰이었을거다.
병실로 들어오는 D를 보고는 정례씨는 한국어로 만나서 반갑다고 쓰담 쓰담 D의 큰 두 손을 잡았다. 훤칠한 외모에 진심이 느껴지는 몸가짐과 눈 빛, 정례씨는 D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D는 그때서야 급하게 배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인사를 드렸다. 그에 정례씨는 큰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어마야, 한국 머슴아가 아니가?” 했다.
그러고 이내 자신이 소리지른 것에 D가 놀랄까봐 얼른 예의를 차리고
“아이고, 잘 생겼네 -”
하고 D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 날 저녁은 정례씨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할아버지 진이 혼자 계신 영도 집으로 갔다. 정례씨는 몸이 더 나을 때까지 며칠 더 병원에서 지내야한다고 했다. 인사를 나누고 명권과 혜자, 그리고 진과 D, 동생 은희 이렇게 식사를 했다.
혜자와 명권은 처음엔 언어장벽으로 인해 원할하지 않은 소통에 불편했지만 금세 마음이 착하고 성실해보이는 D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딸을 잘 챙기다니- 미워할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반면 그 날 저녁 정례씨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이제껏 큰 손녀가 보여준 남자친구는 D가 처음인데 일본인이라니. 그녀의 하늘에는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이 주가 넘는 기간 동안 D는 나와 함께 한국 곳 곳을 여행했다. 내가 자란 마산의 구석 구석을 돌아보고 부산도 갔다. 이모네 가족이 있는 대구에 가서 하루를 자고, 안동 그리고 서울. 짧지만 알차게 많이 먹고 많이 보았다.
정례씨와 진 말고도 이모와 이모부, 삼촌 숙모들을 모두 뵀다. 자라온 문화가 둘 다 가족과 허물없이 다 같이 보는 것을 좋아해 아무런 제한없이 편하게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다.
이주라는 시간이 꽤나 빠른 속도로 지났다. 그리고 부산 항에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D를 데려다 주러 다시 갔다. 이 날은 명권과 일정이 맞지 않아 버스를 타고 둘이서 이동했다.
D가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부산 항을 털레털레 나오는 데 전화가 울렸다. 정례씨였다.
“여보세요? 할머니!”
“응, 우리 승희. 남자친구 D는 오늘 갔제?”
“네, 어떻게 알았어요~ 방금 딱, 데려다주고 부산 항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헝 너무 슬퍼요… 할머니 뵈러 가고 싶은데 저도 오후 일정이 있어서 바로 마산으로 돌아가야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이고, 그건 괜찮다. 근데 승희야,”
“네?”
“일본아는 안된다.”
“네?”
“일본아는 안된다… 알았제?”
그러니까 D가 온 날 며칠 동안 한국에 머물것이냐라는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은 후 정례씨는 최대한 빨리 나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을 거다.
D와 함께 있을 때 전화를 하면 상처받을 그 친구를 걱정해 달력에 표시 해두고 D가 떠나는 날,
그 날 내 사랑하는 손녀에게 이걸 꼭 전해주리라 다짐했을거다.
꼭.
그리고 정례씨는 목소리에 힘을 줘서 말했다.
“일본아는 안된다.”